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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물때를 읽다 신덕룡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이제는 노을이 낸 길을 따라 돌아가야 한다. 양손에 하루치의 품삯을 들고 발목을 잡아끄는 뻘과 뻘을 떨쳐버리려는 굽은 등의 싸움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노란 비옷과 물신과 고무줄로 단단히 여미고 조였던 무장이 천천히 해제되는 저 ..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3년 · 상반기 제8호 (시와에세이, 2013) |시에티카 초대시 구광렬 송광사 가는 길 김금용 행운목을 세워놓고 김명리 비밀을 말하려는 순간 김이듬 변기 막힌 날 박현수 그저 열심히 유강희 가을 저녁, 무화과 세 개를 들고 온 여자를 위하여 이태수 한겨울밤 정..
악어를 위하여 진은영 자 덤빌 테면 덤벼봐 악어는 정글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다 복병처럼 숨어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세상이여 나의 납작해진 뒤통수를 보아라 질척질척한 늪, 진흙 속을 뒹굴며 헤엄치다 가끔 열려 있는 하늘 위로 홀로 비상하는 것들을 보면 악..
지하철에서 만난 여자 -물결의 안팎 장승리 역삼동을 가려면 이리로 가는 것이 맞나요 그렇다는 대답을 서너 차례 듣고서도 또다시 묻는 여자 역삼동을 가려면 이리로 가는 것이 맞나요 검은 뒤통수들이 뱉어 놓은 가래침이 여자 얼굴 위로 흥건하다 물결이 될 수 없어 아픈 여자 바람 한..
클 릭 ! 어머님 전상서 김 용 길 클릭! 어머님 전상서! 어머니 그간 안녕하신지요? 어머니 가신지 어언 17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가신 후로 논에는 벼 대신 풀이 무성히 자라고 고라니가 잠자고 갑니다. 밤 밭에도 취나 고사리 대신 천남성과 쑥과 쑥부쟁이가 무성히 자랍니다. 그래도 제..
시조새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이상의 ⌜날개⌟ 중에서 나는 믿는다 날개가 생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대구일보 기사등록 2012.10.15 01:00 핑크 펄 23호 김영애 동기의 승진 축하 모임에 참석하고 만취상태로 집이라고 찾아든 만년 과장 남편의 양복저고리를 벗기자 와이셔츠에 때 아닌 진달래꽃이 피었다 핑크 펄 23호, 이번엔 완벽한 증거물 확보다! 화르르 곧추선 손..
바다 속에 잠든 고래가 된다 외 1편 이현채 악세레이터를 밟으며 서해로 간다 언제 들어도 좋은 칸소네, 라디오에서는 밀바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영(無影)으로 떠도는 바람을 따라 악세레이터를 밟는다 장롱 속에서 반지잠을 자다가 멀뚱한 눈으로 방부제 가득한 생..
오르간 함기석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 누구의 익사체일까 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 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 파도가 모래해변으로 나와 하얀 혓바닥으로 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게들이 하늘을 본다 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원을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