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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2016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해花蟹 하송 냄비뚜껑을 열자 꽃처럼 붉은 꽃게가 철갑을 하고 있다 건들기만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엄지발을 치켜든다 뭉툭한 가위로 발을 절단하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꽃게가 아니라 가위였다 골수가 울컥 쏟아지자 바다는 잠잠했다 사는 일..
간고등어 한 손 유안진 아무리 신선한 어물전이라도 한물간 비린내가 먼저 마중 나온다 한물간 생은 서로를 느껴 알지 죽은 자의 세상도 물간 비린내는 풍기게 마련 한마리씩 줄 지은 꽁치 곁에 짝지어 누운 간고등어 껴안고 껴안긴 채 아무렇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서로가 이별을 염려..
꽃은 신상이 아니야 문성해 마른 꽃나무에 봄꽃들이 벌써 다 번졌네 한 때는 그 꽃 빛을 내 다 받아서 내 마음이 이리 심란한 줄 알았건만 이제야 알겠네 꽃 빛은 어디 먼 데로 가는 게 아니라 제 속으로 풍덩 우물처럼 빠지는 것 홨던 길을 도로 밟아 돌아가면 몇 겹의 알토란 같은 방..
제1회 애지문학회 작품상 후보작품 10편 너무 깊은 오해 박소란 세상의 모든 것은 오해로부터 태어난다 오해의 젖을 빨고 간신히 버티는 지진한 아들과 딸, 당신도 결국 하나의 오해다 나는 다만 오해할 뿐 우리는 자주 오해의 술잔을 기울인다 오해의 값싼 장신구를 두른 채 여관을 들락..
제12회 애지문학상 후보작품들 전갈 최금진 독하다는 말, 감사히 받겠다 악전고투의 버릇이니 내 평생 달고 가마 황무지 태생인 것도 잊지 않으마 부모가 선인장이고, 조상이 채찍인 것도 기억하마 태양에서 독을 빌어 왔고, 무덤을 갑옷처럼 몸에 껴입었으며 양 훅을 날리는 알몸의 권투..
2014년 제7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수상작 시골 창녀 김이듬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
이현승 시인 1973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씨옥수수전> 당선 2002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 ---------------------------------------- 누아르 이현승 끈끈함이란 파리들의 우정이네 같이 밑바닥을 기..
불새 박형준 봄꽃들― 나는 공기 속에서 죽은 사람을 태운 재를 마시는 상상을 한다 포클레인이 변두리의 집을 부수고 난 뒤 며칠이 흘렀다 집 부서진 자리마다 꽃송이들이 피어났다 잿더미 속에서 부활의 역사를 쓰며 자신이 죽을 때마다 그 흔적 속에서 태어난다는 태어날 때마다 아름..
주제 : 신발 판정 정민나 구두굽이 떨어져 나갔다 3cm 세상이 달아났다 늘푸른 세탁소의 강아지가 3cm 기울어져 멍멍 짖는다 길가에서 공놀이 하던 혜성이도 아파트 앞 공터에서 걸음마를 배우던 아현이도 3 cm 기울어진 세상의 경사면을 걷는다 아슬한 오후의 경계를 밟으며 나는 수선소로..
솟구쳐 오르기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