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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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애지문학회 작품상 후보작품 10편

연안 燕安 2014. 9. 9. 05:47

제1회 애지문학회 작품상 후보작품 10편

 

 

 

너무 깊은 오해

박소란

 

 

세상의 모든 것은 오해로부터

태어난다 오해의 젖을 빨고 간신히 버티는 지진한 아들과 딸,

 

당신도 결국

하나의 오해다 나는 다만 오해할 뿐

 

우리는 자주 오해의 술잔을 기울인다 오해의 값싼 장신구를 두른 채

여관을 들락거린다 플라스틱 같은 서로의 살갗을 정신없이 핥다 보면

어느 순간 슬며시 드러나는 오해의 맨얼굴

서늘한 눈빛 아아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오해했나 봐 당신을

소스라친다 소스라친다고 굳게 믿는다

 

오해의 술잔은 더 아득히 기울어진다 이따금

당신은 내 빈 숟가락에

오해의 살점을 발라 얹어주기도 한다 먹어 봐 맛있어

그걸 먹고 나는 산다 살고 있다고 다만 오해할 뿐

 

오해에 불과하다 나와 당신 우리는

그러므로

오해로써 서로를 견뎌낸다 여관의 차디찬 공기 속에

불어난 오해의 젖은

심장 가운데 엉킨 피처럼 달콤하다

 

아아 이런 게 아닌데

 

신음하는 새벽의 어깨 너머로

오해가 단단히 솟아오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병약한 개가 한 덩이 오해를 물고

골목 끝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2013현대시학12

 

 

 

 

 

이응의 세계

김은주

 

 

 

숲이라 불리던 나무들은 한동안 자라기를 멈췄다

그림자를 잘게 부수는 데에만 밤과 초록을 쓸 때

먹는 것에 색의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누구지?

나는 밤과 오렌지가 좋은 사람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게 쓰며 친해질 때

아이들은 자주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나무 밑에 둘러앉은 무리가

그늘이 짜놓은 레이스를 뭉개며 시끄러울 때

공원 벤치는 요의(尿意)를 겨우 참는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덮고 잠든 척 하는 남자와

빈약한 가슴을 감추기 위해 엎드린 여자

다른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을 하나의 병에 꽂아두고 같은 냄새를 견디게 하는 일 사이에

투명한 벽을 종교로 삼은 늙은이들이 있다

 

마른 몸에 액체를 바르고

쓴맛과 단맛이 뒤엉켜 둥글어질 때까지

실온을 견디는 열매와

 

다 다른 맛이 날 때까지

손가락을 빠는 내가 있다

   

2014<애지> 여름호

 

 

 

 

 

부러진 깃발

박 강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기

헬리콥터를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아이들의

       손수건

 

순정은 뒤집힌

           선실의 커튼

차오르는 물살에

             둥둥 떠다니고

           오직

가만있으라는

          확성기 끝에

거짓과 욕망은

           날개를 펴고 있었다

검은 독수리처럼

 

,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 애달픈 목숨들을

                   맨 처음

바다에 매달 줄 안

               그는

 

 

2014<애지> 가을호

 

 

 

 

 

 

 

 

몸의 애인

이이체

 

 

 

잘못 온 편지를 읽고 운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의 거짓말들을 안다

사랑을 잃은 자의 심장을 꺼내본 뒤로는

백지에서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몸은 표현을 두려워한다

 

당신에게 나를 주어선 안 되겠구나

당신에게 나를 주면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아

나는 죽겠구나

 

부재가 되지 못한 존재

 

헤어진 애인과의 섹스에서

혐오가 무뎌질 때까지,

그 감촉의 비곗살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멀미를 잊으면 나는 사라질 수 있다

 

2014포지션여름호

 

 

 

 

 

 

 

 

부화

김지녀

 

 

나무들이 사나워진다, 이 문장을 쓰고 부르르 입술을 떤다

한 번도 잡아주지 않은 손을 향해,

달이 떴다

 

노른자위처럼 오롯하고 싶었다

빛이 조금 흘러들어오는 쪽창으로

반쪽만 얼룩져 있고

반쪽만 다정해져

흰자위같이 미끄러운 것을 흘리고 싶었다

 

깨지지 않는 껍데기에 둘러싸인 밤에 그랬다

그러나 공난포처럼 속없이 부풀어 내게 무엇이 있겠는가

없지만, 어지러운 맹세를

맹세할 뿐, 그런 날엔 입을 크게 벌리고 달빛을 모았다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짙어지는 것처럼

몸이 사나워졌지만

 

늙은 얼굴보다 더 두꺼워진 손을 잡고

담을 따라 이끼가 번진다

짖지 마라 알아듣지 못하는 발음으로

푸른 입술로 젖지 마라

밤을 뚫고 나온 나무들이 더 높아진 계절이다

한 번도 잡아주지 않은 손을 향해

달이 커지고 있다

 

2014<시산맥> 여름호

 

 

 

 

뮤리엘 벨처 양, 세 개의 습작

주하림

 

 

너랑 할 때 몸이 상했었잖아 영혼에서 악취가 난다는 둥… … 더 젊을 때는 꿈이나 미래를 쫓는 일에 관심이 없었지 대신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갈색 나방이 나를 공격하곤 했다 방에 있는 시간보다 외출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침대 구석에서 나방은 몸집을 늘렸지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계속 의식되어졌다

 

손등에 적는 올해까지 살자, 올해까지만 살자 너의 정신에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면 내 꿈은 얼마나 널 더럽혔는지 아니? 네가 얼마나 내 꿈을 더럽혔는지 바지 속주머니를 털면 애초부터 작고 홀로였던 빈방들이 쏟아지곤 했어

 

너랑 처음 잘 때 내 몸은 정말 앙상했잖아 몸에 나무를 키우고 있었던 거야 겨울에서 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지 않으려던 나무는 무척 지쳐있었지 그 나무를 안고 이미 오래 전에 떠난 네가 흘려주는 고름을 받아 마시며

 

몸속이면서 몸의 전부였던 나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우리 둘은 끌어안은 채 그것을 바라보았고 먼 곳의 나를 보다 먼 곳으로 가는 나를 붙잡지 못했던, 그건 갑자기 어디론가 굴러 떨어진 언약 같았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유화 제목

 

2014<애지> 봄호

 

 

 

발등에 내리는 눈

박연준

 

당신이 꽃을 주시는데

테이블에 던져놓고 잊어버린 밤

사라진 것은 밤이 아니라 빛의 다른 이름이다

 

일회용 컵 뚜껑을 깨물다

입술을 베였다

가벼운 것에 베이면 상처가 숨는다

틈으로 들어오는 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허공을 더듬는 거미의 열기인지

허방, 이라는 계단인지

 

눈밭에서 참았던 오줌을 누며 생각했다

지금,

어딘가에서 젖니들은

여전히 지붕 위를 날고 있을 것이다

지붕이 하늘의 발등이라면

젖니는 발등에 내리는 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까놓은 엉덩이로 별이 떨어지면

별의 자식을 수태할 것 같다

정정당당하게 사라진 얼굴들

눈밭에 풀어놓으니

쉽게 녹는다

 

이제 어떤 키스가

내 입술을 벨 수 있을까?

 

2014<애지> 봄호에서

 

 

 

 

 

맛의 질량

이지호

 

감정이 안의 맛인 줄 알았다

맛도 안이 있고 바깥이 있었다

 

붉은 혀를 버리는 나무

저것은 단식이 아니라 절식이다

한 며칠 단식의 끝, 침이 고이지 않는다

혀를 데리고 멀리 간 이름에 통속의 맛 기억이 들어 있다

 

재치기 끝의 밀리그램맛, 가려움 뒤 붉은 흔적의 그램맛, 스침 후에 붙어있는 킬로그램맛, 격렬한 맛인 통증의 톤맛

 

온갖 맛의 뒤끝이 모여 있던 며칠간의 복통

맛을 모르는 곳에서 탈 난 맛

 

항생제 같은 창문 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부위들이 혈관 속으로 다 숨어버리고

팔엔 아무 맛도 없는 혀만 숨어 있다

맛없는 맛

혀를 데리고 한 며칠 떠나있는 곳마다

내 것이 아닌 내 것들이 아프다

 

입을 닫아 버리는 나무 혈관, 맛을 보는 팔의 혀가 숨어 버렸다

간절한 맛의 무게를 잴 수 없다

 

-2014<애지> 2014년 봄호에서

 

 

 

보라는 아프다

정 선

 

 

햇빛이 하루 소임을 다할 때

숨죽인 짐승처럼

보라는 서녘 하늘에 제 거친 숨을 토해낸다

한 호흡에는 열정을

한 호흡에는 절망을

그 많은 호흡들이 갈 곳을 몰라

때로는 먹구름으로 밤새 궁륭을 헤매고

때로는 뜨거움을 바다에 쏟으며 통곡하는 걸

바람은 뜬눈으로 기록한다

 

지산동 1975장 마당 높은 집

보라는 자꾸만 디귿자형 마당으로 흘러간다

뭐슬 잘혔다고 워디서 본데없이 햄부러

죽어도 나는 성님이라고 못 불르겄소

기어이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던 그 여자

어허이 뒷짐 지고 헛기침만 하던 아버지

불룩한 배를 내밀며 퐁퐁다리를 건너가던

본데없는 년 울 엄마를 몬당허게 본 년

그 팔뚝을 물어뜯지 못한 열세살 아이

 

보라는 도드라진 흉터와 기억들의 불순물

한 열정의 붉음과

한 절망의 푸름과

진흙탕을 뒹굴다 바닥까지 납작 엎드린 후

증오의 순도 깊숙이

염통의 피가 화학적 촉매제로 반응한

보라!

혹자는 애증이라 부른다

조금만 증오를 걷어내면 붉은 기와가 붕어처럼 퍼덕거려

제 처마를 잃어버리는 경계의 위태로움

차마 발설하지 못한 울타리의 배후

지금 코모도 걸음으로

느릿느릿 애증의 저녁이 온다

감정이 녹아 있지 않은 얼굴 위에 흐르는 빛

오랜 기다림 끝에 보라가 운다

 

날것의 보라

격렬한 후 쓰리다

 

2014<애지> 가을호

 

 

 

 

오히려

박성준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독이 든 은수저처럼 입에 문 말들이 검게 변할 때 삼덕공원에서 담배를 피운다 연기는 왜 푸르지 않을까 생각이 생각만큼 저릴 때쯤 교복을 입은 아이가 다가와 담배 두 갑만 사달라고 부탁한다 돈은 드릴 테니 아무 것도 묻지 말아달라고, 딱 말보로 두 갑이면 된다고 한다 그토록 모르던 바람은 누군가의 몸을 살다나온 숨이라 너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려던 찰나, 언니들이 안 사오면 죽이겠다고 꼭 사가야 된다고, 아이는 모르는 팔을 잡고 흔든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독이 되려나, 허나 말 하지 못하고 담배 두 갑을 사주고 난 후 나는 몇 분전보다 조금 더 파래진다 꾸벅 인사를 하고 아이는 왜 한 번 이쪽을 돌아봤을까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담배 한 대를 더 피우고, 대체 나는 누구의 편일까 생각한다 내일에 살고 있을 아직 모르던 내가 겨우 그리워지는 순간, 침묵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평생을 쓴다

삼덕공원을 지나 모텔 골목, 그 아이가 뒷문을 온몸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말보로 두 갑을 손에 꼭 쥐고

 

2014<인광장>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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