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시골 창녀/김이듬 본문
2014년 제7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수상작
시골 창녀
김이듬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 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엄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
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 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유등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추는 것 같다
【서울=뉴시스】오제일 기자 = 웹진 '시인광장'이 제7회 '올해의 좋은시'상 수상자로 시인 김이듬(45)을 선정했다.
웹진 '시인광장'은 제7회 '올해의 좋은 시'로 김이듬(사진) 시인의 시 '시골 창녀'를 선정했다고 26일 밝혔다.
'올해의 좋은 시'는 웹진을 포함해 국내에서 발간되는 문예지에 발표된 신작 시를 대상으로 예선과 본선을 거쳐 수상자를 선정했다. '시골 창녀'는 '시인광장' 지난해 6월호에 발표됐다.
김백겸, 방민호, 정한용 시인 등 심사위원들은 수상작에 대해 "시적 화자의 마음의 풍경을 연을 바꾸어가며 리듬이 달라지는 드라마 속에서 극적으로 펼쳐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부산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경상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 시인은 2001년 계간 '포에지'로 등단해 '별 모양의 얼룩'(2005년), '명랑하라 팜 파탈'(2007년) 등 4권의 시집과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2011년)를 발표했다. 그동안 제1회 시와세계 작품상(2010년), 제7회 김달진창원문학상(2011년) 등을 수상했다.
수상작과 선정 시 100편은 '올해의 좋은 시 100선'이란 제목으로 다음 달 출간되며 시상식은 오는 3월 8일 서울 대학로 일석기념관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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