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승 시인
1973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씨옥수수전> 당선 2002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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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
이현승 끈끈함이란 파리들의 우정이네 같이 밑바닥을 기어본 자들의 것이지 날개가 피부든 손톱이든 간에 그 날갯짓이 경박하든 말든 그것은 떠오르는 데 도움이 되네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면 곧장 천상인 듯 날갯소리 힘차지만 한낱 파리 날개일지라도 누가 먼저 비상할 때 위험해지는 것이 바닥의 생리라네 바닥을 벗어나면 다른 바닥이 기다릴 뿐 껌딱지처럼 질기게 들러붙은 것이 밑바닥이지 호구에는 천상 고단함이 따르고 피곤은 업종을 가리지 않네 떼인 돈을 받으러 다니거나 밤길 조심해라 딸 예쁘더라 언뜻 들으면 어머니 말씀 같지만 한번 들으면 문신처럼 새겨지는 말들도 곧잘 한다네 상스러움과 불량기가 필수인 이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리듬인데 어딘지 뽕짝스러운 리듬은 건달들의 걸음걸이에 녹아 있고 흉투성이의 순정 위에 녹아 있네 건달은 양아치와 다르다는 굳건한 믿음 위에 있네
다정도 병인 양 이현승 왼손 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 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 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 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두 살의 주인공에게도 울분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 *레이먼드 카버, “괜찮아 너는 아직 서른둘일 뿐이야. 그리고 그건 서른 셋보다는 적지.” 시집「친애하는 사물들」2012년 문학동네
아이스크림과 늑대 이현승 도망을 이해하려면 말야 아이스크림을 봐 표정을 바꾸는 변검술사의 손놀림처럼 재빠르게, 혹은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지 아이스크림은 녹지 아이스크림은 표효하고 아이스크림은 분노하고 아이스크림은 자살협박을 하고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려 아이스크림은 도망을 이해할 수 있지 동물원을 탈주한 특대처럼 아이스크림은 도주하지 아이스크림은 사라지지 가령, 날렵한 혓바닥은 흔적을 지우면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꼬리 같아 도망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늑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을 밝히겠지 늑대들은 새빨간 혓바닥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처럼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리지 잽싼 손놀림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완전히 투명에 가까워질 수 있지 잠시 흔들렸다가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물주름 어느 날 위치가 바뀌어 있는 책상 위의 물건들처럼 혹은 아이스크림처럼, 또 늑대처럼 나는 사라지지
놀이공원 이현승 놀랄 만한 일들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매달리고 소리를 지르느라 얼굴을 붉히고 단맛을 보기 위해서 줄을 섭니다 거꾸로 매달고 소리 질러도 얘기 할 것이 없다면 당신이야 결백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총으로 머리를 쏴도 죽지 않는 이곳의 시민들은 오늘이 자신들의 날이라는 것을 잊는 법은 없습니다 공중에서 비명이 원심분리되는 동안 땅으로는 동전들이 빗방울처럼 떨어집니다 놀란 손에서 풍선들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하늘에도 선인장은 있어서 멀리서 웃음풍선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곳은 풍선과 선인장들과 원심분리기의 세계 충돌하고 뒤집히고 총을 쏘면서 딸꾹질이 멎는 곳 뾰족한 가시 끝에서 꽃들이 폭발합니다 울다가 웃으면서 머리카락이 하늘로 자라는 곳입니다
성분들 이현승 식칼은 마지막 먹이의 피맛을 기억하고 있다 어쩌다가 양파를 썬 칼로 배를 깎을 때 우리는 왜 여러 개의 칼이 필요한가를 깨닫는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그것은 아마 양파의 비교 우위를 설명해주겠지만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 모여들었다가 넘치는 피 베인 손가락을 빨며 제 피의 맛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비슷한 맛을 가진 피의 형제들이다 내 피는 어머니에게 수혈할 수 없지만 우리는 비슷한 침을 갖고 있어서 같은 음식을 앞에 두고 함께 입맛을 다신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면서 우리는 같은 성분의 눈물을 흘린다
근원적 골짜기 이현승 사과나무가 사과를 떨어뜨렸다 이곳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잠자리에서 벽지 들뜨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사과나무를 이해하기 위하여 바람이 불어오는 골짜기를 쳐다봐야 한다 어쩌면 구름을 바라보는 당신의 습관도 조금은 바뀌어야 할지 모른다 중력이 없다면 바보들의 행동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될 거야 최소한 야구경기 같은 것은 볼 수 없게 되겠지 사과나무는 자신이 떨어뜨린 사과에 대해서 생각중이다 자신의 아파트 난간으로 아이들을 떨어뜨렸던 여자가 있었다 골짜기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들이 바람에 날려왔다
살인의 기술 이현승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나는 쓴다.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고 바람 속을 지나가는 사람처럼 텅 빈 중심을 향하여 나는 걸어왔다. 어쩌면 모든 것은 기술의 문제. 죽은 사람의 초대를 받는 잔칫집에서는 소화제나 화투장 같은 것을 준비해두는 법이지만 식욕과 투기심이 생의 은유가 되기 위해서는 사육의 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악해지기 위해서도 소명 받아야 한다는 것을, 연쇄살인범으로부터 배운다. 원한도 분노도 없는 살인에는 무엇이 빠져 있는가. 어째서 현장검증에는 살인의 기술만 있고 즐거움은 없는가. 두 번째를 위해 힘을 아껴두는 것을 주도면밀하다고 하는가. 사고와 무친에 대해 생각하는 자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망연함으로 밥을 넘길 때 사육의 기술은 최대의 힘을 갖는다. 미래를 살아내느라고 내 청춘은 소진되었다고 나는 쓴다.
저글링
이현승 나는 손이 두 개뿐인데 잡아야 할 손이 여러 개지.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네. 너무 빨리 돌아가는 회전문 안에서 우리의 스텝은 배배 꼬이고 뒤엉킨다. 회전과 와류를 빠져 나가지 못해 우리는 빨래처럼 잔뜩 뒤엉키며 물이 빠지네. 아무나 막 목을 조르고 싶네. 남을 웃길 수 있는 능력을 남에게 웃음거리가 됐다로 번역하면서 우리는 자존심이 상한다. 슬픔을 팔고 있다는 수치의 감정이 우리를 화나게 하지. 손 안에 쥐고 있는 얼음처럼 차가움에서 시작해서 뜨거움으로 가는 악수. 나는 손이 두 개뿐이지만 여러 개의 손을 잡고 있네.
덩어리 이현승 불 꺼진 골목길을 접어들다가 본다. 내걸린 정육들의 아름다운 살빛을. 선홍의 피와 살과 기름들로 뒤섞인 아름다운 충동들이 붉게 빛나고 있다. 먹어서 이룩한 생존이 먹히기 위한 먹이가 되어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자의 눈빛으로 본다. 저기 분노와 절망과 포기와 공포와 열망과 미망과 격정과 순종과 저항과 욕정으로 뜨거워진 불꽃, 교수대 위 목 꺾인 사람이 지린 오줌 같은 어쩔 수 없는 육체. 나는 모닥불 앞에 앉은 사람처럼 여전히 더 큰 그림자를 뒤로 멘 채 붉은 빛을 얼굴 가득 받고 서 있다
저토록 환한 불빛을 받고 있는 냉동실의 정육들처럼 흘러내리지 않기 위해서 매달린 고드름처럼 나는 따뜻하게 얼어붙어 있다
젖지 않는 사람 이현승
죽은 사람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대듯이 나는 화분에 물을 주면서 귀를 기울인다 의심은 물줄기를 따라 뿌리들의 어두운 층계에 머문다 화분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귓속은 물을 채우기에는 너무 작은 용기이다
죽어가는 나무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저녁은 제 물줄기를 부어 텅 빈 집을수족관처럼 빈틈없이 채운다
이럴 때 가장 어두운 동굴은 눈 속에 있는가 귓속에 있는가
어떻게 돌고래들은 해안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하고 어떻게 나무는 스스로 죽을 결심을 하는가 어떤 범람이 나무에게서 호흡을 빼앗은 것인가
라디오 이현승 편의점 가판대에서 스위티오 바나나가 익어갑니다. 그 옆에서 수박도 함께 꼭지를 말리고 있습니다. 심지가 타들어가 터지는 폭탄처럼 저렇게 입술이 바짝바짝 탑니다. 달콤해지다가 달콤해지다가 마침내는 치워질 것입니다. 달콤해질수록 값이 싸지는 가판대의 법칙입니다. 엉덩이가 바닥처럼 평평해졌습니다. 사지도 않을 사람이 머리통만 두드리고 가는 오후입니다. 바깥으로 내놓은 스피커에선 라디오 소리가 들립니다. 어린 부모가 탯줄을 달고 있는 아이를 피시방 화장실에 유기했습니다. 터질 듯한 여름입니다. 틈
이현승
물류집하장과 열차계류장이 있는 소읍은 소란스럽다 국철과 도시철도와 화물열차와, 온갖 실을 것들과 탈것들로 분주하다 분주함이야말로 얼마나 오래된 소읍의 미덕인가 과학과 기술을 꿈꾸었던 근대가 통일과 무궁화와 새마을을 외치며 이 길을 지났다 기괴한 경적을 내뿜으며 힘차게 달려가는 철마는 이 소읍 사람들의 오랜 자랑이었다 그러므로 그때마다, 열차가 지날 때마다 열차의 거대한 소음으로 사적인 대화들은 잠시 중단되어야 했다
이 순간이 중요하다 열차가 소읍으로 진입할 때까지 사람들은 일제히 목청껏 소리 높여 떠들어대다가 일순 고요해진다 열차가 지나가는 동안 소리를 잃은 말들이 사람들의 벌어진 입에서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말에도 색깔이나 모양이 주어진다면 게임오버 직전의 테트리스식 벽돌이나 각목처럼 쌓이는 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말들에 모양과 색깔과 향기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총성과 함께 일제히 날아올랐다가 무심히 내려앉는 새 떼들처럼 열차가 지나간 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사람들의 말과 말 사이, 열차가 굉음을 울리며 도시를 관통해 가 는 사이에 틈이 있다 틈 속에서, 가령 소읍에서는 말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과 동작들 까지 소리를 잃는다 한낮의 시에스터처럼, 그림자를 잃은 사물들처럼 틈 속에서는 모든 동작이 부분이 없이 완성된다
그러나 사실 열차가 소읍을 지나가는 시간에도 모든 대화가 중단되는 법이 없으니 거대한 덜컹거림 속에 틈이 있다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세계가 있다 이곳에서 소음이란 기념품 같은 것이므로 누구도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묻지 않는다
대화의 기술 이현승 누군가에게 인질로 붙잡힌다면 우리는 그에게 부단히 말을 붙일 것이다 피륙을 짜듯 세헤라자데는 밤과 낮을 얼룩덜룩 이어붙일 것이다 어둠속에서 빛을 감촉하는 곤충의 더듬이처럼 필사적으로 또 은밀하게 그의 역사를 완성하며 꺼질 듯한 촛불의 심지를 돋우듯 조심조심 생을 늘려 붙이리라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니므로 불같은 성미를 건드리지 않는 지혜로 사려 깊은 아내처럼 불완전한 결혼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총애를 구해야 하는 열세 번째 아내가 되어 기꺼이 그의 존재를 잊게 되리라 어쩌면 목숨밖에 더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제 무릎을 베고 잠든 야수의 등을 쓸어내릴 때 야수의 등에서 돋아난 부드럽고 따뜻한 털을 만질 때 핏빛 아름다운, 천 하루의 퀼트가 완성된다
이사
이현승
마지막으로 집을 나오면서 나던 문소리 나는 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에서 나는 경고음 저문 길에서 밥집을 찾는 사내들의 허기처럼 거친
욕망을 다독여 주던 따뜻한 살 냄새 같은 것 집이란 그렇다. 길 듦, 오래 지낸 가축의 온통 닳고 해진 끈처럼 질기게 우리를 붙잡아 매는 숙명, 그러나 모를 일이다 잔뜩 술에 취해서도 나를 찾아들게 했던 정든 慣性들. 세상의 바람이 나를 통째로 날려버리려 할 때마다 더 세게 못 박아댄 내 뿌리, 그러므로 이 지상에 세들어 사는 동안 한때는 이 집을 중심으로 한 떠남과 돌아옴이었듯 나의 말뚝, 지긋지긋하다. 깊은 밤 심드렁하게 코 골아대던 주전자며 식구들 발자국 소리 마냥 익숙한 미닫이소리 어디 하나 조심스럽지 않은 이 어지러운 세간들과 함께 나는 지금 어디로 영원히 출타하려는 것이냐.
이제 보이지 않는 그 끈들이 잘려나가는 것을 본다. 어느 집 창을 함부로 흔드는 바람의 손 낮은 각도로 쳐들어오는 사나운 바람의 뿔을 잠재우고 모든 집들의 고향, 마구 뻗어나간 길고 긴 길을 본다. 저 길 어디쯤에 지워지지 않는 손자국 같은 집을 지으리라. 순간 나는 날아갈 듯도 하고 날려갈 듯도 한
때론 집이 아닌 것들에게서도 이사를 해야하는 법. 나는 아직 이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죽음의 한 연구'를 넘기다 늦게 배달된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나는 자고 있고, 자고 있는 나에게 편안함을 당부하는 글씨들
서둘러 쓴 게 분명한 글씨는 아쉽게도 너무 늦게 당도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별하는 법을 깨우치지 못했다.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 이현승 이것은 웃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있어 웃음은 보호막 일종의 비누 거품과 같다 문지르면 더 잘게, 더 많이 일어나는 거품처럼 손끝이 닿을 때마다 소스라치듯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럴 때면 나는 작은 거품들에 둘러싸인 비누가 손 안에서 미끌거리는 것을 본다 작고 미끌거리고 단단한 그녀는 웃음풍선을 마신 사람처럼 기글기글 웃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 감당할 수 없는 간지러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흘러넘친다 흘러넘치는 소리를,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나는 그녀의 웃음 소리에서 발견하다 작은 웃음으로 이루어진 보호막 웃음 속의 공포 이것은 공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웃음을 멈추려는 의지와 웃음을 중단할 수 없는 명령 사이에서 그녀가 미끄러지듯 그녀와의 스킨십을 기대하는 것은, 우습다 나는 웃음이 두렵다 터져 나오는 웃음 앞에서 나는 웃음을 금지하는 근엄한 독재자였다가 볼까지 빨개진 벌거숭이였다가 얼렁뚱땅 함께 웃고 있는 바보였다가 끝없이 터져나오는 웃음 끝에서 결국 눈물을 한 방울 짠다 그것은 슬픔같은 것이고 그것은 공포이며 그것은 완전한 벌거숭이인 육체로서의 웃음이며 공포 속에서도 웃는 사랑이다 이것은 억압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무도하가
이현승
건너지 못할 것은 다 강이라는 생각, 그러므로 지천으로 널린 것이 강이다 하품하다 흘린 눈물처럼, 슬픔이란 미천한 내가 미천한 그대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 보이지 않게 흐르는 강 울컥 물비린내가 나는 강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하면서도 어쩐지 실패했다는 느낌 나는 헤어질 준비를 다 끝낸 사람처럼 자꾸 허탈하다 그러므로 최대한 밀착된 거리에서 만나고 있다는 거 그건 어쩜 그대를 볼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하여 기꺼이 나는 방종했다는 걸 거리에서 만나는 저 사내 거주지 불명의 저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앞을 보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보지 않는 그 눈빛 앞에서 나는 변방의 곽리자고처럼 또 백수광부의 처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대로변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사내여 소주를 마시며 행려도 벗어놓고 구걸도 벗어놓고 사내는 길 건너를 망연히 보고 있다 노상에서 노천에서 끝없이 이어진 사내의 행려가 지금 사내를 내려놓으려는 듯 강심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가지런히 신발을 벗었다
길 건너에 있는 사내 강 건너에 있는 사내 물수제비처럼 물에 잠길 사내
그 집 앞 능소화
이현승
1. 이를테면 제 집 앞 뜰에 능소화를 심은 사람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여름날에, 우리는 후두둑 지는 소나기를 피해 어느집 담장 아래서 다리쉼을 하고, 모든 적막을 뚫고 한바탕의 소요가 휩쓸고 갈 때, 어사화같은 능소화 꽃 휘어져 휘몰아쳐지고 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집의 좋은 향기에 가만히 코를 맡기고 잠시 즐겁다. 능소화 꽃 휘어진 줄기 흔들리면, 나는 알고 있다. 방금 내가 꿈처럼, 혹 무엇처럼 잠시 다녀온 듯도 한 세상을.
2. 말걸어 오지 않는 세상을 향한 말걸기. 언뜻언뜻 바람을 틈타고 와 확, 뿜어져 나오는 향기란 아무것도 예비할 수 없었던 도난사고처럼 툭, 어깨치며 떠난 자에게서 후발되는 것. 뒤숭숭한 꿈자리처럼 파편적으로만 나타나는 기억 속에서 징후로만 읽혀지는 것. 그러나, 감추어진 것을 향한 나의 짐작은 두렵다. 다 익었다는 것 속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 열매도 없는 화초의 지독한 향기. 급소를 중심으로 썩어가는 맹독성 혼기 지난 여인처럼 꽃은 향기 속에 늘 부패의 경고를 담는다.
모든 향기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뚱뚱한 그녀, 혹은 비둘기에게
이현승
물론 나는 새가 무거워서 날지 못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문젠 무게가 아니라 그 무게를 들어올리려는 의지에 있어. 도도는 멸종되었고 닭은 사육되고 있어. 가령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영화에서 물풍선처럼 부푼 엄마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도 나에겐 작은 비행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녀의 발 밑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 신음하던 목조계단보다 먼저 그녀는 죽어버렸지만 그것은 그녀가 감행한 일생의 모험, 낯설고 두려운 공기 위로 사뿐히 자신의 전존재를 던지는 비행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녀를 운구하기 위해 곤도라와 인부가 동원되었지만, 애초에 외출을 그만두고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한 것은 다 슬픔때문 아니었으까? 그녀의 운구가 빠져나온 집도 화장되지만 ……그러니까 나는 그녀도 새는 새라고 생각해. 뚱뚱한 식욕보다 무겁게 그녀를 내리 누르는 중력, 슬픔. 경동시장통 신호등 위에 앉아 지나가는 차량 위에 하릴없이 똥이나 흘려대는 비둘기들. 가학의 도시에서 나보다 먼저 시민권을 얻은 저 권태의 새,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 길 그건 타락해가는 자신을 용서하는 길 뿐이야. 숙취의 아침 슈퍼마켓에서 내가 해장으로 빵봉지를 뜯을 때, 조건반사적으로 내 쓰레빠 주변으로 딴죽거리며 모여드는 너희들에게 나는 몇 조각 빵덩어리를 던져주며 생각해. 아주 오래 전 날기를 그만 둔 나의 조상님들을,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연신 새로운 빵봉지를 뜯고 있을, 등에 퇴화한 날개자국이 흉칙하게 남은 내 모습을. 미친 듯 고함치는 햇볕 속에서 간신히 간신히 광기로부터 벗어나 있는, 조금씩 배가 나오려고 하는 존재.
훌라후프를 돌리는 여자
이현승
당신은 훌라후프를 돌리네 당신은 유연한 허리를 가졌어 허리춤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당신은 여유만만하게 훌라후프를 돌리네 잡지를 보면서 TV를 보면서 당신의 훌라후프 솜씨는 뛰어나서 허리춤에 훌라후프를 매달고 내게 말을 거네 당신은 훌라춤을 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신상품을 광고하는 나레이터 모델 같기도 하네 원래 그 자리에서 돌고있는 행성처럼 당신의 훌라후프는 변함없이 돈다네 그럴때면 나는 훌라후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해보네 내가 당신의 원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 훌라후프를 돌린다면 이건 좀 변태적이지 훌라후프는 쉬지않고 당신의 허리춤을 도네 당신의 허리는 참으로 유연하다네 유연한 당신의 허리 유연한 당신의 훌라후프 당신은 TV를 보며 깔깔거리다 그렇지않아? 말을 건네네 유연함이 바로 당신의 무기라네 유연한 허리를 위하여 당신은 훌라후프를 돌리고 나는 그것을 보네
밝은 방*
이현승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36살 때이다. 아버지의 가장 오래된 사진은 제대 기념사진이다. 지금은 이미 백발이 된 아버지가 군모를 삐딱하게 착용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우들과 카메라 앞에 선 육군하사 이 하사는 웃고 있다. 웃는 군인의 윗입술이 Ⅴ자 모양으로 패여 있다. 굶주림의 흔적만이 시간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디선가 구멍이 뚫린다. 밝은 빛이 쏟아진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젊은 군인의 아내는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결혼 직후 입대한 젊은 군인은 그의 아내에게 삼 년 동안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쉬지 않고 편지를 썼다. 쉼없는 연서 때문에 아내는 시어머니로부터 눈총을 샀고, 또 너무 바빠서 답장조차 쓸 수 없었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일로 허리가 녹을 젊은 아내의 눈매를 그리며 편지를 썼다. 그들이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우고, 누에를 치고, 논을 갈고, 그리고 함께 배가 고픈, 노랗게 바랜 시간들
아무도 부모의 어린 시절을 만날 수는 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 26살의 젊은 군인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도대체 이 밝은 빛은 어디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가.
* 카메라 루시다 : 롤랑 바르트의 사진에 관한 노트
仲秋 부근
이현승
양계장집 사내는 대머리 벌어진 어깨 근육이 잘 발달된 사내는 60가까운 나이가 무색할만큼 건장하다 사내는 양계장 옆에 개를 키울 생각이다 충성스러운 동물들은 밤마다 컹컹 짖어댈 것이다 인부들과 함께 새로 들여온 자재를 옮기다 우리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는 사내의 얼굴과 몸이 땀에 젖었다
스물 넷인가 그쯤 사내의 아들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내와 사내의 아내는 거적을 둘러쓴 하얀 맨발을 보았고 지나쳤을 뿐 검은 제복을 입은 불안이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사내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젊은 경찰관이 찾아왔을 때 그제서야 사내는 현관에 놓여있는 아들의 신발을 보았다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아들이 이제 제 그림자를 어둠 속으로 풀어놓기 시작하는 나무 곁에서 떨어졌을 때의 모습 그대로 놓여있었다 사내도 사내의 아들도 외아들이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키워서 죽이기 위해 사내는 닭을 키우고 다시 개를 키울 것이다 작업중인 사내의 대머리에서 연신 땀방울이 샘솟는다 고인 땀들이 사내의 눈고랑을 파고드는지 약간 찡그린 웃음으로 사내는 악수를 받았다 조카는 서울에서 공부한다면서? 그래 건강이 최고다 잘 지내라 이거 어제 걷은 건데 신선할거야 건네진 달걀들은 오와 열을 잘 맞추어진 채 가지런하다 중추절이 가까운 가을의 햇살은 눈부시고 따갑고 사내의 머리에선 연신 땀이 솟고 사내는 눈가를 자꾸 훔친다 돌아서는 사내의 뒤통수가 계란과 닮았다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씨옥수수전> 당선작 씨옥수수전
이현승
가슴에도 너테가 끼는 한겨울 농가 창고에는 시렁마다 고드름 같은 씨옥수수 주렁주렁 매달려 있단다. 단정하게 갈래머리 땋은 채 한여름 열기 다 식고 눈물기 다 말라 지조 높은 청죽에나 앉는 시설도 슬그머니 얹힌단다. 시렁 위를 지나가는 새앙쥐들 허기도 놀리면서 사흘 굶은 흥부 이빨마냥 고즈넉하단다. 소슬바람 엄동한설 다 보내는 동안 밤궁금증에 티밥 마실 가면 여문 이력에 할머니 틀니에만 자꾸 끼지만, 가지마다 엉긴 바람 같은 걱정에 보름 기울고 명년 여름에 새끼 볼 딸년에게도 섭섭잖게 보내야지 느지막이 오느라 시집살이 시킨 막둥이 외아들 헛물켜는 객지살림에는 알 굵고 다디단 옥수수로 보내야지 하는 생각에 딸부잣집 큰며느리 어머님 시한도 바쁘게 지난다나. 이듬해 명지바람 끄트머리 초여름 신록 에 슬그머니 밭섶에다 두 알 세 알 뿌릴 좋은 씨앗이란다. 땅 한 움큼 억세게 후여잡고 기지개 켜듯 쑥쑥 금방 자라나 어느 틈에 샌님처럼 수염도 난단다. 세월이 선생이지 첫애기 낳고 퉁퉁 불은 에미젖모양 바람 많은 살림에도 살오르는 기차게 실거운 종자란다. 고시랑 고시랑 할머님 옛이야기 엿듣는 씨옥수수들이 뉘얏뉘얏 저희들끼리 여물어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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