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2014년 4월의 시 모음 본문
주제 : 신발
판정
정민나
구두굽이 떨어져 나갔다
3cm 세상이 달아났다
늘푸른 세탁소의 강아지가 3cm 기울어져
멍멍 짖는다 길가에서 공놀이 하던 혜성이도
아파트 앞 공터에서 걸음마를 배우던 아현이도 3
cm 기울어진 세상의 경사면을 걷는다
아슬한 오후의 경계를 밟으며 나는 수선소로 간다
한평 남짓 수선소가 법정이다
뜯겨지고 망가진 구두들이 제 순서를 기다린다
만인을 평등하게
억울함 없이 공평하게
기울어짐 없이 반듯하게
땅땅땅 3cm 달아난 세상을 불러 세운다
3초도 안 걸린다
순식간에 똑바로 선 나는 밀려있는 일과를 확인하고
평평해진 도로를 또각또각 밟으며 왔던 길을 다시 간다
아무도 모른다
새로 돋아난 길 위에 흑장미들이 줄 다투어 피어나는 것을
길 위의 집들이 3cm 자라난 주춧돌 위에
새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가작
항해
손병걸
비린내 그윽한 다대포 바닷가
꼼장어 구이집 방문 앞에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뒤엉켜 있다.
다른 구두에 밟힌 채 일그러진 놈
에라 모르겠다 벌러덩 드러누운 놈
물끄러미 정문만 바라보는 놈
날씬한 뾰족구두에 치근대는 놈
신발 코끝 시선들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어느새 젓가락 장단 끝이 나고
사람들 한 무더기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다대포 앞바다 썰물 빠지는 소리가
꼼장어 구이집 창 너머로 아득하다.
연방 뭐라고 중얼거리는 꼼장어 안주 삼아
슬며시 쓴 소주 몇 잔 들이켜고는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시 정박했던 배들이
저 푸른 바다로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 꼼장어 구이집 안으로
환한 웃음 실은 만선(滿船)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구두를 신다가
이경우
신장에서 구두를 꺼내다가, 문득
이 구두는
한 많은 생을 마친 어느 소의
가죽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이 겨우 반경 몇 킬로미터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고단한 노동의 현장을 살다간 영혼이
죽어서라도 자유롭게, 낯선 땅을 밟아 보고파
한 켤레 인간의 구두로
마무리 되었나보다
신장에서 구두를 꺼낼 적마다
나도 모르게
어디든 떠나고 싶어지는 것은
혹여, 소의 필생의 염원이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닐까
가엾은 소의 영혼을 위하여
구두창이 다 해지도록
자유로워지고 싶은 시간
왕방울 같은 눈을 끔벅이며
순한 소 한 마리가
코뚜레가 박힌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항해 일지
김종보
영안실 뒤뜰에 노아의 방주 떠 있다
들어선다
뒷굽 안쪽까지 젖은 구두는 벗어두고
벌써부터 구김살이 움켜쥔 넥타이는 풀어둔다
없는 게 없다
뻘건 국물엔 오늘 아침 잡았다는 소의 옆구리가 뜨고
붉은 화투패에선 화사한 꽃들이 피었다 진다
환호성도 터진다
투망한 화투패로 한 두릅 싱싱한 지폐를 낚아 올리고
푸른 새벽이 와도 충혈된 눈은 감길 줄 모른다
기우뚱! 기울어진다
배가 세찬 풍랑을 만날 때마다
승객들은 기우는 쪽으로 쓰러져 불편한 새우잠이 든다
이제 나서야 한다
뒤엉킨 신발 속에서 용케 딱 맞는 구멍을 찾아내고
아직 하품이 덜 끝난 구두 속에 발을 쑤셔 넣는다
어디로 가는가?
몸무게라도 재듯 잠시 구두 속에 서 있으면
어느새 내 몸은 긴 돛대가 되어
255미리 배 두 척 끌고
또 어디로 힘겨운 출항을 하려는가?
허공을 떠가는 고인의 배 한 척,
상주는 발인을 걱정하는데 빗줄기는 굵어진다
다시 삶으로 회항할 수 있다면
不惑의 구두
하재청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바람
이미 거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낙엽은 더 이상 밟히는 존재가 아니다
동강 동강 인화된 가을이
구두코에 부딪치며 몰려오던 날
그다지 바쁠 것 없는 귀가는
신발장에 버려진 낡은 구두처럼 고요하다
발뒤꿈치를 타고 가슴에 차 올라오는
먼 귀갓길 모퉁이에 매달린 소용돌이
때론 먼지처럼 뚝뚝 피어나던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현관문을 열다 뒤돌아보곤 한다
내가 걸어온 이정표가
골목골목 훤하게 적시는 순간
예정된 귀가는 늘 서툴고 불편하다
신발장 구석 낡은 구두가
허리 아픈 아내보다 먼저 인사를 한다
구두 속 갇혔던 하루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맞는다
그렇구나, 나를 맞는 하루의 시작이 지금부터구나
不惑을 넘긴 사람은 안다
저물녘이 고요에 젖어 흔들린다는 것을,
한 쪽으로 삐딱하게 닳은 구두 뒷굽이 나를 향해 휘청거린다
구두를 벗어 곧 살아 퍼덕일 내 하루를 신발장에 진열한다
낙엽에 할퀸 구두 뒤축
피 흘린 가을 몇 점.
누군가 골목을 건너갔다
마경덕
움푹 파인 발자국이 골목을 걸어간다. 막 포장을 끝낸 질척한 골목을 지나간, 발을 잃어버린 오래된 발자국. 딱딱한 콘크리트 발자국이 쉬지 않고 골목을 걸어간다. 구두가 운동화를 껴안고 큰 발이 작은 발을 업고 박성희 미용실, 월풀 빨래방 현대슈퍼를 돌아 나간다. 사라진 발을 기억하는 발자국들. 빈 발자국을 따라간다. 어느 날 찾아 온 사랑은 나를 딛고 가버렸다. 버거운 영혼이 가벼운 영혼을 밟고 저벅저벅 앞만 보고 가버렸다.
누군가 길에 마음을 빠뜨리고 한참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골목은 발자국 흉터를 가지고 있다.
우연
이선영
나는 우연이라는 구두를 신고 다닌다
대량 할인판매하는 구두를 매장에서
그 많기도 많은 구두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나는 눈에 들어온 구두 하나를 골랐다
고르고 나서 들여다보니 그 구두는 우연(Wooyeun)이 만들어 낸 구두였다
그처럼 우연하게 내 발은 지금 그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부터는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미 바꿀 수 없는 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 켤레의 구두를 내 생에 끌어들이면서 돌이켜보건대
나를 이뤄 놓은 모든 것이란 게
고작 우연이 우연을 불러내며 쌓아진 모래성은 아니었을까
덜 굳어진 만큼 약하게 더러 크게 흔들리는
오늘도 나는 우연이라 새겨진 구두를 신고
때로는 기특하고 때로는 무서운
우연의 발자국을 찍는다
신발의 꿈
강연호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벗어 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가지런히 놓여 있다
한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던졌지만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누구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그러나 신발은 맨발이 아니다
저 짓밟히고 버려진 신발의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신발의 벌린 입에 고인 침묵도 이 때문이다
말
김열
낡은 구두 솔질하다 멈추고 본다
말표 구두藥 뚜껑 위에 그려진
앞다리 치세우고 갈기 휘날리며 달리는 흑마를 본다
따각따각 먼지 일으켜 질풍 속으로
잇달아 뚜껑을 뛰쳐나와 질풍 속으로 달려가는 말들
구두약 둥근 뚜껑 안에서
말달리도록 맨 처음 고안한 사람의 마음과
아침마다 구두를 빛나게 닦아주는 푸른 풀밭 같은 마음을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와 풀밭 위로 밤을 누이는 말들을 생각한다
아침이면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는 말들
약을 더 발라 솔질 계속하자
돌멩이 걷어차다 상처 난 구두코 반짝거리고
현관 밖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진다
누군가 금세 밖으로 나갔는지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금언처럼
따각따각 세상을 넓히며 말없이 달려가는 말들
죽기 전까지
종마는 살아있다
2013년 영남일보 시 당선작
말(馬)
정와연
수선집 사내의 어깨에 말의 문신이 매어져 있다
길길이 날뛰던 방향 쪽으로 고삐를 묶어둔 듯
말 한 마리 매여 있다
팔뚝에 힘을 줄 때마다
아직도 말의 뒷발이 온 몸을 뛰어다닌다
고삐를 풀고 나갈 곳을 찾고 있다는 듯 연신 땀을 흘린다
저 날리는 갈기를, 콧김을, 이빨 드러내는
투레질을 굵은 팔뚝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을
저 사내 알기나 할까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절에 스스로 마구간을 짓고
지독한 결심으로 고삐를 매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말은 복종하는 발굽과 항거하는 발굽이 다르다
앞발을 굽힐 때 뒷발은 더 빡세게 버티는 법이다
어느 뒷골목의 시간들을 붙잡아
사내의 안쪽을 향하게 단단히 묶었으나
꿈틀거리는 역마살이란 언제까지 갇혀 있을 발굽이 아니다
비좁은 마방에서 수년 째 구두를 깁는 일이
자못 수상하기까지 하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偶然)이 있다면 그것은 다 길의 파본이다
발굽을 갈아 끼울 때마다 사내는
박차고 나가려는 팔뚝의 불뚝한 말을 오래 쓰다듬듯 주무른다
이제야 말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는 듯
말과 주인이 따로 없다는 듯이
喪家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저녁 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들이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식구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몇 개
슬리퍼
이문숙
지압 슬리퍼를 팔러 온 남자를 보고 생각났다
작년에 신다 책상 아래 팽개쳐 뒀던 슬리퍼
먼지를 폭삭 뒤집어쓰고 까마득 버려져서도 슬리퍼는
여전히 슬리퍼다
기억이란 다 그런 것이다
기억 속에는 맨홀 뚜껑 같은 확실한 장치가 없어서
그 아래 무언가를 고치러 들어간 사람을 두고도
꽉 뚜껑을 닫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남자가 질식하건 말건
그러다 숨을 놓기 직전
고철 덩어리 같은 기억을 붙들고서야
아차, 뚜껑을 열어보는 것이다
어쨌든 물건이라는 건 마지막이라는 게 없어서
먼지만 활활 털어버리면 또 슬리퍼가 된다
망각의 먼 땅을 털벅거리며 돌아다니고서도
금방 뒤축이 닳아빠진 슬리퍼로 돌아온다
작년 이맘때 어디서 무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발을 충실히 꿰차고
슬리퍼는 또 열심히 끌려 다닐 것이다 저러다가도
슬리퍼는 또 책상 아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처박힌다
기억이 그렇게 시킨다면
케케한 먼지와 어둠을 거느리고
누군가 슬리퍼를 사납게 끌며 또 어두운
복도 저쪽으로 사라진다
슬리퍼, 쓰레빠
정익진
슬리퍼, 왠지 쫄딱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것 봐,껌 짝짝 씹으며, 두 손 청바지 앞주머니에
팍, 찔러 넣고 삐닥하게, ‘에이 제기랄’ 하는 표정으로
쓰레빠 질질 끌고, 기산비치상가 앞을 지나는군,
저 자식이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나?
너 도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
중학교 다닐 적, 수학 선생님에게 숙제 안 해왔다고
쓰레빠로 뺨도 맞아봤어. 에이, 재수 없는 그놈의 쓰레빠
퉤, 퉤,
쓰레빠, 확실히 방정맞고 불량스러워.
슬리퍼라고 말을 바꾸어 봐도, 본질적으로 재수 없군.
근데 말이다. 일요일 새벽까지, 술 마시고,
조금만 자다, 목욕탕 가려고 겨우겨우 일어나,
어질어질, 운동화조차 제대로 신을 수 없을 때,
그때, 그놈의 쓰레빠가 그리 반가울 수가
해수탕을 나와 바닷바람 한 번 쐬고
송도초등학교 근처 오뎅집, ‘아! 그집’을 향해
슬리퍼 끌고 올 때의 아! 그 상쾌함이란
펑키젤리 슈즈다, 아쿠아 샌들이다 뭐다
유행이라지만, 역시 슬리퍼 신고 소똥에 미끄러진
표정을 지으며 ‘쓰레빠를 질질 끌고’가야
그게 제 맛이야.
샌들의 감정
정와연
그것은 엉키는 방식에 따라
수십 가지의 무늬로 바뀐다
여름엔 숨고 겨울엔 나타나는 맨살의 감정이 있다
부푼 발등과 바람의 방향, 그리고 햇살의 끈
강풍의 힘으로 멀리 갔다 오는 여행이 있다
끈을 엮어 장식을 만드는 것은
매듭을 지나온 것들이지만
한철 풀리지 않고 감기는 줄기는 고집이 질기다
풀어지지 않는 매듭을 얻고
끊어지는 부분을 허락했다
작두콩들이 줄기를 신고 보폭을 재며 걷는다
잘려진 전파와 달팽이무늬
흩어지기 직전의 비행선을 풀어
가시와 소음을 골라내는 방식
코사지가 있는 것들은 나팔꽃줄기를 애용하고
거미줄은 몇 끼 식사를 보관해 둔다
옥수수껍질로 밑창을 깔고 그 수염을 꼬아서
발목을 두르면 하모니카 소리가 난다
매미는 갈라진 뒤꿈치를
날개로 감싸고 여름 한철을 운다
겨울의 장식인 맨발을 여름에 신는다
가장 앙상한 미학,
여름에 끊어지지 않던 줄기들
겨울바람은 툭툭 끊어지기 일쑤다
겨울은 샌들이 쉬어가는 계절
샌들은 나무에서 내려와 줄기가 된
진화론을 가지고 있다
겨울이면 샌들은 다 운동화 끈으로 바뀐다
원피스 감정 밑엔 샌들의 감정이 있다
고요한 바닥
홍승주
지하철 안, 마주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아이의
신발 밑바닥이 다 보인다
어느 갯벌에라도 다녀오는 중인지 개흙이 엉킨 채 말라 있다
입 다문 조개라도 잡은 걸까 썰물을 부르다 부르다 지쳐
돌아오는 길일까 꼭 쥔 채 잠든 저 손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나는 내내
녀석의 지나온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다
누군가의 신발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건 아주 드문 일
사람들은 그저 부은 발등을 보여 줄 뿐이다
나는 발을 들어 내 신발바닥을 들여다본다
들러붙은 지 오래된 듯한 껌자국
작은 돌멩이, 풀물, 알 수 없는 흔적들이
미로처럼 얽혀 납작하게 눌려 있다
그것들을 읽고 있자니 발목이 점점 무거워 온다
잘 떨어지지 않는 찐득한 길들을 데리고지하철이 달려가고 있다
어둠 속에 스쳐 지나는 바닥들이 잠깐 환하다
병든 말의 속울음 같은 生의 바닥이
오래된 무성영화처럼
구두 한 마리
길상호
일년 넘게 신어온 구두가
입을 벌렸다 소가죽으로 만든
구두 한 마리 음메- 첫울음을 울었다
나를 태우고 묵묵히 걷던 일생이
무릎을 꺾고 나자 막혀버리는 길,
풀 한 줌 뜯을 수 없게 씌어놓은
부리망을 풀어주니 구두가
길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기억이
그 입에서 되새김질되고
소화되지 않은 슬픔은 가끔
바닥에 토해놓으면서 구두 한 마리
이승의 삶 지우고 있었다
바닥에서 달아나는 시간을 따라
다시 걸어야 할 시린 발목,
내가 잡고 부리던 올가미를 놓자
소 한 마리 커다란 눈을 감으며
구두 속에서 살며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2007년 <우리시> 신인 작품 당선작
구두
박승류
전생이 소였던, 나란히 선 구두의 발목을 보면
우멍한 소의 눈을 보는 것 같다
눈을 끔뻑거리며 쟁기를 끌고 가던 지난날의 소가
환생을 해서 콧김을 뿜으며 현관에 누워 있다
아침이면 은근히 재촉하는 소를 따라
매일같이 생존이라는 봇짐을 지고 길을 나선다
그때마다 그는 나직나직 소를 달래며 걷는다
급하지 않아 급하지 않아 오늘은 모두 다 잘될 거야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소, 문득
여물통이 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밭머리에 서서 먼 산을 한참이나 올려다본다
골목골목 긴 밭이랑에 발자국을 찍어가며 다녀야 하는
계단식 논밭을 오르내리며 쟁기질을 해야 하는
새로운 자신의 일이 생소했던 그날, 처음의 밭이랑은
참으로 길었던 것이야, 눈을 감았다가 뜬다
사래 긴 밭으로 가서 오늘은 기어이
성공을 하고만 싶은 외판外販을 위해 그는
빼곡히 적힌 방문 예정 고객명부를 또 다시 펼쳐본다
밭을 갈 듯 다시, 소처럼 차곡차곡 걸어가던 그
파종을 하고 거두어들이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다
서걱이는 발걸음으로 밭이랑을 헤쳐 나가듯
그의 일생은 늘 소처럼 걷는 것이다
어두워지면 잠시 쉬었다가 아침에 또 들로 나가는
눈이 더 깊어진 소 한 마리
이어지는 무실적으로 깊게 패인 수심愁心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수선집 근처
전다형
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
주일만 빼고 수선 일을 했네
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
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
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
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
맞은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
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
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
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
나는 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
의수족 아저씨가
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
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
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
땅으로 기우는 어깨 위에서 강물소리가 들렸네
아저씨가 자꾸만 되돌아보았네
신발 밑창에 친 못처럼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네
수선집 근처 굵은 주름살 떨어져
뒹굴고 있었네
2008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두 수선공
최일걸
그는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더듬는다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그의 손마디가 저릿하다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거나
뜀박질이 그의 심장을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자꾸 엇박자를 놓는 길과 걸음이 구두를 망가뜨린다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걸음과 길에서
절충점을 모색하기 전에 그는 먼저 숨을 고른다
쉼 없이 구두 뒷굽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길,
막바지로 구두를 몰아세우는 걸음걸음,그
를 여기까지 내몬 것은 길도 걸음도 아니었다
구둣방 선반 위에서
번득이며 광휘를 뿜어내는 구두가
시치미를 떼고 돌아앉는다
그는 어긋난 길들을 구두에서 삭제하고는
도톰한 밑창으로 새로운 길을 포장한 다음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한다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굽의 높이를 조정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못이 박인 손으로 나달나달 떨어진 날들을 깁는
그는 차츰 지워지고 실밥이 그를 대신하여
툭툭 삐져나온다
보행을 손보는 일은 손님의 몫이지만
그는 시선을 곧게 펴서 손님의 종종걸음을 떠받친다
그의 뼈마디가 시큰거리다가 어긋난다
[201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검은 구두
김성태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소가죽 구두
손순미
늙은 소의 발을 굽는다
늙은 아버지의 발을 굽는다
토막난 아버지의 발을 잡고
아버지의 삶을 다듬기 시작한다
검은 육질에서 기름이 돌기 시작한다
탕약처럼 검고 어두운 터널을 걸어온
아버지 평생의 켤레,
아버지 고통의 부위가 누릿하게 익어간다
나는 아버지의 삶에 지나친 광택을 낸다
아버지 평생의 車, 아버지 구두가
모처럼 호사를 한다
반짝! 아버지의 영광은 짧았다
사람의 발을 한 짐승이, 짐승의 발을 한 사람이
아버지를 짓밟았다
그렇게, 칠십 평생 찍어온 아버지의 낙관(落款)은 불발이었다
윤을 낸 구두를 선반 위에 올려둔다
평생 바닥이었던 아버지가
높은 곳에 올라가 계신다
한밤중
구두의 울음이 구성지게 들린다
아버지가 구두를 타러 오신 것일까
소가죽 구두
김기택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집어넣고야 만다
내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조용히 오므린다
소가죽은 제 안에 들어온 발을 힘주어 감싼다
살가죽구두
손택수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구두와 고양이
반칠환
마실 나갔던 고양이가
콧등이 긁혀서 왔다
그냥 두었다
전날 밤 늦게 귀가한
내 구두코도 긁혀 있었다
정성껏 갈색 약을 발라 주었다
며칠 뒤,
고양이 콧등은 말끔히 나았다
내 구두코는 전혀 낫지 않았다
아무리 두꺼워도
죽은 가죽은 아물지 않는다
얇아도 산 가죽은 아문다
대짜고무신
서상만
“대짜고무신 한번 보입시더!”
내 나이보다 서너 살을 앞서 부르던 어머니
장날 시장골목으로 들어서면
내 발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발가락이 헛도는 대자고무신을 신고
터덜터덜 산길을 걸었다
고무줄로 발등을 칭칭 조여도
발보다 앞서가는 문수에
십리 길 오리 밖에 걷지 못했다
어느 날
흐르는 강물에 신발 한 짝을 던져버리고 돌아온 날
회초리를 내려놓은 어머니는 돌아서서 우셨다
고무신처럼 질긴 가난과 억척스런 어머니
내 발보다 작아진 어머니를 만나고 올 때면
헐렁한 신발 하나가 헐떡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잃어버린 신발을 찾으려고 나는 평생을 헤맸다
발 치수 마음치수 꼭 맞는 짝을 찾아
먼 길 함께 걷고 싶었다
주인 잃은 신발은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오늘도 외짝 헌 신발을 끌고 무작정 걷는다
발소리를 포장하는 법
정지우
신의 자리에 신발이 리본처럼 매어져 있다
마지막까지 동행했을 발자국은
헐겁게 풀어져 있고
허우적거렸을 수면은 파문으로 덮개를 삼아 재빠르게 수습되었을 것이다
맨발을 주춤거리게 했을 매듭
마지막 닫고 간 문 같다
그가 지나온 걸음마다 잠긴 흔적이다
부러지면서 처음이자 마지막 마디를 삼아 놓았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길 묶을 곳이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겨진 결심에는 기우뚱거린
현기증이 신겨 있다
막다른 지점에 가지런히 모았을 무릎의 봉인
한 짝의 신발로 엇비슷하게 겹쳐 묶은 매듭엔
하루쯤 지난 시간이 매여 있다
중얼거리며 끝내 풀려고 했던 우문(愚問)처럼 머뭇거린 소용돌이로 고정한 수면 한폭이 잠잠하다
정성스러운 포장으로
벗겨진 발소리를 수거해 간다
가파른 함구는 축축하게 어두워지고 있다
목련나무 신발
이혜순
한철 허공을 딛던 목련나무 신발들
헐거워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맨발로 달려온 바람이
몇 번을 신었다 벗었다 금세 바닥이 까맣다
바람이 제 발보다 큰 신을 신겨
아이를 대문 밖으로 불러냈다
이제 막 날갯짓을 배우는 새끼종달새처럼
나풀나풀 흔들리는 두 팔이 나비를 닮았다
길가에 피어있는 민들레꽃 냉이꽃이
아이의 걸음을 끌어당긴다
봄볕 같은 눈길로 바라보던 어미가 잠깐 한 눈 파는 사이,
달려오던 봄이 아이를 덮치고 지나갔다
하르르 꽃비가 떨어지고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화들짝 놀라 달려 나간 길 위에
신발만 꽃잎처럼 뒹굴고 있다
저만큼 모퉁이 뒤로 꼬리를 감추는 자동차
그날, 봄이 어미의 가슴을 딛고 지나간 뒤
깊이 박힌 발자국 두 개, 영영 지워지지 않았다
신발을 다 벗어버린 목련나무가
한껏 다리를 뻗는다
푸른 뒤꿈치가 햇빛에 반질거린다
제2회 월간<우리詩> 신인상 당선작 중에서
수인선 닭발
이경희
잘린 발들이 접시 위에서
오글오글 모여 궁리를 하고 있다
잘 자다 일어난 아침,
길 떠날 행장에서 어처구니없이 빠지게 된
도둑맞은 군화 같은 닭들의 발목
어느 볕 좋은 마당을 거닐다가 도난당한
장물인 줄도 모르고
매콤하니 쫀득한 닭발을 열심히 뜯다가 문득
그 많은 닭들은,
날다가도 이제 어디 가서
내려앉지도 못 하겠구나
신발 신으려다 말고 휘청 날개나 퍼득거리겠구나
매운 발들만 모여서 빨갛게 웅성대는 걸 보니
어쩐지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 들릴 것도 같고
어디로 가시는가,
몸통이 없는 닭발만 걸어 다니는
아무래도 수인선 닭발집에 발 없는 닭들은 차표라도 끊어서
기차 태워 보내 주어야 할까 부다,
어디까지 갈 건지
무릎 꿇고
눈 맞추고
글썽,
찬찬히 물어 본 다음에
가족
강연호
거실에 모인 잠이 깊다
이백 개가 넘는 채널이 있으니
끼니는 그것으로 족하다
리모컨은 묵주
채널을 돌릴 때마다
웅얼웅얼 경이 경을 불러 모은다
두 시에도 세 시에도 뉴스는
상자 속의 미궁을 미궁 같은 세상을
거기 놓친 실끝이 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줄 듯 말 듯 혼자 심각하다
휴일 오후가 불러온 낮잠
천근만근 무겁다
안방까지 가는 길도 천산북로다
가족, 내력이 깊은 흉터
저마다 세상이 곤하고 가려워
코를 골며 허벅지를 긁으며
잠 속의 잠 속의 잠 속의 잠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
잠의 겹상자
꿈의 겹상자
현관의 신발들은 뒤꿈치를 드는 법이 없다
집에서만큼은 이쪽저쪽 뒤집어지고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야 한다
다우너
이성목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뒷다리의 힘을 풀고 주저앉는다. 인부는 전기 창으로 소를 찔러 일으켜 세우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는다. 오물 진창에 드러누워 다리를 버둥거리는 소를 지게차로 들어 일으켜 세우지만 또 주저앉는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인부는 필사적으로 소를, 살아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얼마 전 새로 산 구두는 천연 소가죽인데도 뒤축이 자주 무너진다. 주저앉은 굽을 뽑고 새 징을 박아 구두를 일으켜 세운다. 일어서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나는 먹고 또 살아야 하므로, 필사적으로 구두를 걷게 한다.
청계광장에, 촛불을 하나씩 받들고 주저앉은, 어린 소는 이제 막 이마에 뿔이 나기 시작했다. 소가 뿔로 땅을 밀고 스스로 끙 일어서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고요하게 엎드려 짙푸른 생을 되새김질하며 늙어갈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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