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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멍에 콩에서 태어나 넝쿨로 뻗지 못하고 머리로 하루를 여는 콩나물 같은 당신에게 세상은 콩나물시루다 켜켜이 눌러앉은 시루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꼿꼿하게 위로만 솟아오르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는 당신은 타고난 극단주의 신봉자다 발 디딜 틈 없는 콩나물버스를 타고 아침을 여는..
낮달 한겨울 흰 추위에 얼어붙은 낮달이 동녘에 허연 접시처럼 덤덤하게 떠 있다 붉은 해를 지우고 실내 어둠 속에 희끄무레 해를 띄웠던 낡은 촛대엔 시든 불빛 아직도 흐릿한데, 에구붓이 뻗은 나뭇가지 위로 납빛 장막을 젖히고 드러낸 은자의 희뿌연 얼굴 호젓한 초극(超克)의 길, 가..
소멸 燕安 김재기 창밖에 초록이 한창인데 하얀 벽 숨소리 가라앉은 방안 환자복을 수의처럼 걸친 77세 김 할아버지 해쓱한 얼굴에 퀭한 눈이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가슴에 모르핀 패드를 붙이고 십칠 일간 굶주린 몸에 링거줄을 매달고 문병객을 맞는다 핏기 없는 입술에서 종소리처럼 ..
삼천 평 정원 아파트 뒷산 아담한 공원이 가시 달린 피라칸타 울타리를 두르고 들어왔다 화살나무와 사철나무도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잔디밭 사이 산책길에 터를 잡은 매자나무, 배롱나무, 산딸나무, 산사나무, 자귀나무, 자작나무 홍단풍, 해당화, 산철쭉도 끼어들었다 줄지어 늘어선 메..
정상에 오르다 새벽부터 산을 오르는 사내 산봉우리를 향해 전진했다 무거운 배낭에 휘청거리는 걸음 가쁜 숨을 토하며 쉬지 않고 걸었다 칡넝쿨이 발목을 잡고 가시덩굴에 뒤엉켜 기어오르는 비탈 억새와 잡풀이 물결치는 등성이를 지나 정상을 향해 올랐다 구름의 옷깃만 펄럭일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