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국의 시인들 (43)
벌레의 숨결
■무제 시편 529 책을 덮는다 캄캄하다 캄캄하기만 하다 겨우 이 지상에는 붓다나 누구밖에 없다 너와 나밖에 없다 인간을 긍정하는 것도 인간을 부정하는 것도 인간밖에는 아무도 없다 풀도 물속 전갱이들도 달도 별들도 인간의 가치를 전혀 알 바 없다 이토록이나 모르는 대상이 인간이..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나희덕(Ra Heeduk) 출생 1966년, 충청..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
10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
김사인의 ‘노숙’ “언제나 고향 돌아가 그간의 있었던 일들을 울며 아버지에 여쭐까” 엉뚱하게도 멀리 카이로까지 날아와 새벽에 시인 김사인(54)을 쓴다. 그이의 고향 충북보은 회남면의 대청호 수몰지 부근을 돌아본 건 두어 주 전이지만, 어쩌다보니 해외출장길까지 그를 안고 나섰..
강정의 ‘노래’ 늘 장신구처럼 따라다니는 죽음폭발적인 내압이 최고조에 다다른 강정의 시들은 하나같이 독하다 길 위에서 1년 가까이 시를 읽어오는 동안 처음으로 서울 도심에서 시인을 만났다. 그것도 청춘들이 넘치는 홍대 입구에서, ‘미래파’의 원조라는 ‘젊은’ 시인 강정을 ..
이문재 ‘소금창고’ 내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우주라는 제자리로 돌아갈텐데… 내 몸은 이미 오래된 중금속 곰소로 내려가는 길에 눈이 내렸다. 눈이 사정을 두지 않고 차창으로 몰려들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서해대교 아래 휴게소에 내려 진정하기를 기다리다 다시 남쪽으..
조정권 ‘산정 묘지’ 달이 아닌 죽음을 맞던 山頂의 독락당 대월루… 천상의 누각을 꿈꾸며 절대 고독을 즐기다 그를 만나고 온 시간은 꿈같다. 꿈처럼 황홀하다는 의미보다는 순간처럼, 희미했다는 맥락이다. 과연 만나기는 한 건지, 사진을 보면 분명하게 증명되긴 하지만 그를 만났..
문정희 ‘물을 만드는 여자’ 사랑의 도가니서 냉탕으로 던져진 소녀 이순을 넘긴 지금도 그 그리움 찾아 떠돌아 아들이 재수 끝에 수능시험을 본 다음날, 문정희 시인과 함께 그의 고향 전남 보성으로 떠났다. 성장기에는 그냥 아내에게 모든 걸 맡겨 놓았는데, 그 아내마저 직장 일로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