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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공광규 햇살이 잠시 머물다 가는 산방 누군가 말하고 누군가는 새겨듣고 느껴야 하는 시간 초석 깐 방바닥에 디딤돌처럼 펼쳐 놓은 화폭 속으로, 우리는 허물어진 흙집 담장을 넘어 육백 평 정원을 고을의 영주처럼 거닐다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며 수만 리 비단으로 흐르는 물에 물수제비를 뜨기도 하고, 햇볕에 살과 뼈를 날리며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하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늙은 느티나무처럼 속을 다듬고, 돌담 아래 구절초 희끗희끗한 문방 앞에서 그림 몇 장 둘둘 휘말아 가슴에 안고 한동안 말을 잃고 있었지만. 도라지꽃 돌밭, 별빛 사리, 하늘 문장, 무량사 꽃살문, 왕밤 눈망울, 얼굴 반찬, 폭설 지우개, 몸 관악기, 초록 경전, 미루나무 붓글씨, 말똥 한 덩이 숱한 영상을 시간의 강물에 띄워 보..
파탄의 달 앙상한 손가락이 마스크를 더듬고 흐릿한 눈빛이 씁쓸한 미소를 던지는데, 미친개처럼 흘린 침방울, 뒤덮은 갈색 땅 어둠 속에서 달빛은 오슬오슬 떨고, 잿빛 바위의 울음 으슥한, 한낮이 절름발이처럼 걸어가고 수렁에 두 발 깊이 박고 빠득빠득 버티는 삶의 뒷맛은, 구름 낀 하늘은 존재를 부정하고 개울물은 킬킬거리며 흘러가네 잿빛 시간, 눈과 등이 하얀 침상에서 일어나고, 사람의 내연기관이 폐차를 기다리는 자동차처럼 털털댈 때 눈이 어두운 늙은이, 나는 볼 수 있노라 칙칙한 바다처럼 가라앉은 도시의 거리를, 욕망에 뒤척거리던 가면들이 두려움 속에서 굼벵이처럼 움츠리는 것을. --시에티카 22호(2020년 상반기)--
마른 강가에서 으스름 황혼 옛정 걷묻어 일어나는 은회색 갈대숲 늦가을 늦바람 속에서 문득 뒤돌아보니, 반가움 출렁이는 갈꽃 사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갈림길 벗어나 헤죽거리는 사람 뒤에서 살며시 걸어 나오는 해맑은 어린아이 ............... --시에티카 22호(2020년 상반기)--
담벼락 좀비의 세상에서 쉬지 않고 쓰다듬네 창백하게 눈동자 위로 치켜든 삶을, 갈라진 시멘트 벽 틈새로 도둑맞은 사랑과 자유를 훔쳐볼 뿐, 담벼락 두른 영욕의 우리 안에서 별과 달을 잃고 눈뜬장님으로 사네 서지도 눕지도 앉을 수도 없고 고요마저 없는 곳 마른 천둥소리만 잇따라 울릴 뿐, 조용히 혼자 있을 수도 없네 벌어진 틈으로 들여다보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들이 썩은 이빨 드러내고 비웃고 으르렁거릴 뿐. -- 리토피아77호(2020년 봄)--
매립장 찬바람 일고 먼지 날리는 십이월은 창백한 달 얼어붙은 땅바닥에 환멸과 비애가 뒤틀린 가랑잎이 나뒹군다 한때 불볕 아래서 우리는 결실을 꿈꾸었다 잔디는 우거지고 나무는 푸르렀다 비탈에 서서 구름으로 갈증을 달랬으니, 어디에 소나기는 내리는가? 헐뜯는 자는 누구이며, 차디찬 쓰레기 더미에서 어떤 꽃이 피어나는가? 취한 자여! 그곳엔 바람이 불지만, 부러진 나무는 막지 못하고 돌덩이는 소리를 내지 못하지, 이곳 안에만 소리가 있지 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오라 끌려다니는 그림자와 달리 나는 당신에게 한 줌의 티끌 속에서 차가운 슬픔을 보여주겠소. -- 리토피아77호(2020년 봄)-- .
한라산 둘레길 푸른 향기 종처럼 울리는 숲속에서 사박거리는 발걸음으로 아득한 옛 시간 겹겹이 쌓인 오솔길의 호스럼을 즐겨봐 가슴이 메마른 하늘바라기가 되어버린 날 가마솥처럼 끓어올라 답답한 날 파랑새를 찾아 무거운 등산 배낭 하나 짊어지고 짙푸른 그늘 드리워진 길을 저벅저벅 걸어봐 축축하게 젖어 드는 울퉁불퉁한 돌길이면 더 좋으리 천아숲길과 동백길을 걸어보면 고달픈 삶이 왜 필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네. -- 시와사람 94호(2019년 겨울)-- . <p><br /></p>
길라잡이 저녁노을 속에서 나는 초라한 봇짐을 메고 끝없이 길을 걷는 싸구려 보따리장수 거친 땅에 굽이치는 강 가파른 바위산 넘고 불볕 부어내리는 황무지에서 휘늘어진 나는 고독감이 뼈에 저린 절름발이 가로막는 가시덤불에 발걸음은 꿈속처럼 휘청거리고, 낭만을 꿈꾸며 끝없이 뚫고 가는 갈증과 굶주림의 열풍 속 잿빛 머릿속을 호리는 울음소리 허허로운 들판 푸른 달빛 아래 눈을 반뜩이며 길장승처럼 웃고 있는 긴 꼬리 붉은여우, 감쪽같은 눈가림에 보따리를 잃고 절룩거리며 발길을 돌린다 붉은 황혼에 늘 꿈꾸던 피안을 찾아 다시 되돌아 비바람 몰아치는 불모의 황무지 안으로. -- 시와사람 94호(2019년 겨울)--
어둠의 힘 누구도 다친 부엉이처럼 아무 때나 밤을 그리워하지 않아, 어쩌다 어두운 밤을 그려보면 무덥고 지겨운 낮도 가슴 깊이 품어지는 것 같아 시커먼 강바닥을 훑고 불어오는 몸서리치게 비릿한 밤의 냄새 돌풍처럼 몰아치면 텁텁하던 낮이 그렇게도 싱싱한 향기를 풍기는지 저녁 어스름은 헛된 갈등의 끝판 슬쩍 간만 봐도 삶은 한층 싱그럽고, 다가오는 어둠 앞에서 희미한 불빛도 옛 골목집처럼 그립더군 어떤 사람도 거부할 수 없는 환장하게 궁금한, 시커먼 밤의 터널이 있기에 피가 돌지 않는 한낮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견디며 버틸 수 있는 거야 -- 사이펀 15호(2019년 겨울)--
황혼의 구토 천변 은회색 물억새 서걱거리는 난벌 온몸으로 마른 나뭇가지 흔들어 묵은 나무가 날바닥에 흘린 흘림체 몇 줄 지나온 뒤안길 자국이 촘촘하다 저 어둠 속 화톳불의 장작더미처럼 타오르던 한때가 있었던가 물먹은 나뭇단 짊어진 나무꾼으로 비바람 몰아치는 둑길을 밟던 지난날 덜 으깨진 음식물이 톱밥처럼 목구멍을 지나갈 때 얼마나 깊은 두려움 속에서 떨었던가 더부룩한 뱃속에 미처 삭이지 못한 거친 푸성귀 조각들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어리석게 살아온 날들을 희미하게 세어보니 가물거리는 저녁노을 속에서 붉은 모란꽃처럼 쏠리는 무엇인가가 나를 뒤흔들어 온몸으로 뒤틀린 문장을 토한다. -- 사이펀 15호(2019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