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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숲 밖에서 새김질이 좋아 숲 속에서 나무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 쉬지 않고 나무만 내리찍다가 석양에 도끼질 힘겨워 도낏자루 버리고 숲 밖으로 도망쳐 나온 사람 가까스로 숨통 트여 노을 진 숲을 보며 한숨 내쉬던 사람 꽃보다 더 눈부신 단풍잎 바라보며 가까스로 세상눈 뜬 사람 힘 빠진 손가락으로 영원의 끝자락 만지작거리며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센머리 쭈글쭈글 주름진 얼굴로 키득키득 웃는 사람. --시에티카18호(2018년 전반기)--
늦바람 고함과 경적이 뒤덮인 세상 눈 쌓인 두메처럼 정적만 흐르는데, 무음의 진동에만 쫑긋거리는 귀 영원을 향해 아득하게 두루마리처럼 펼쳐진 양탄자 위를 늙은 개처럼 달린다 귓바퀴를 스치는 바람 명암이 빠르게 엇갈리는 눈앞 아, 풀밭을 지나가고 있구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낯선 곳일지라도 회색빛 머릿속을 뻥 뚫는, 들판의 내음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리 언젠가 마른 잡풀이 상여의 꽃처럼 뒤덮인 그곳을 찾아 차갑게 웃으며 열어야 할 달빛처럼 환한 영원의 문 환장하게 어른거리는 것은 웃을 수밖에 없는 삶 때문인가. --시에티카 18호(2018년 전반기)--
땅수제비 검푸른 이끼로 세월의 무늬를 새긴 성벽 무덕진 더위에 늘어진 나무 두꺼운 그늘을 가르고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 침묵의 공간을 꿰뚫는 율동의 파문 어두운 수풀에서 튀어나온 새 한 마리 파닥파닥 땅 위에 물수제비뜨고 있다 날카로운 발톱이 자신을 덮치도록 추적의 시선을 유혹하는 환장하게 몸부림치는 어미의 몸짓 배움도 연습도 없던, 저 절절한 춤사위의 근원은 어디인가 단명의 주검 앞에 눈물 한 방울 뿌릴 틈 없는, 팔락거리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 흩어진 새끼들 다시 불러 모아 절망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개바람 나도록 새 삶의 터전을 찾아 달리는 돌진의 발길, 그 눈부신 눈빛 달아오른 아수라장 속에서 루피너스 향기 가슴 깊이 파고든다 안개 속 잎새처럼 너울거리는 아득한 기억의 단층 오른발에는 삶을 왼..
천라지망(天羅地網) 어두운 구석에서 밤낮없이 끙끙거리며 꼬리 치는 개 목줄이 그리는 이차원 밀폐 공간 단단한 밥그릇, 달콤한 졸음에 깊이 빠진, 뒷간의 구린내에 무딘 중독자 긴 세월 매인 줄 풀려도 떠나지 못할 거야 모험이 깃든 자유란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강아지의 몫이지 몸담은 곳이 부서져 사라진다면 탈출을 꿈꾸어 보지만, 삶이란 욕망과 갈등이 뒤섞인 두엄더미 앞으로만 질주하는 오토바이 죽음으로 맑게 깨어 있으므로 물거품처럼 뜬 꿈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밥통에 질기게 얽힌 칡넝쿨은 쉽게 걷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여보세요, 허기진 배를 만지며 흐뭇하게 웃은 적 있나요 질깃질깃한 욕망의 삼밧줄을 벗어나는 날 비바람 자국 촘촘한 돌부처의 뒷머리에 대고 보잘것없는 집에서 빠져나온 낡은 구두처럼 빛나..
길을 잃다 낙타의 등처럼 불거진 혹을 매달고 붉은 모래언덕이 숨어 있는 사막을 걷는다 말귀가 터지면서 느낀 사막의 뜨거운 바람 뭇 시선을 받아먹은 혹은 점점 무거워지는데, 텅 빈 삶이 조가비처럼 널브러진 석양의 모래밭 바라볼수록 더 묶이는 삶의 발목 뒤틀린 걸음과 갈증의 조각들 오아시스는 멀다 싸움소처럼 팽팽하게 맞선 두 개의 힘 두 무릎을 꺾고 내려앉는다 점자 같은 세상 한가운데서 빈 병에 든 하루를 쏟으며 길을 버리고 여담처럼 걷던 내 삶이 쓰러진다. -- 시와사람 86호(2017년 겨울)--
버티기 막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짙은 안개 속을 거니는 것 칙칙하게 늘어나는 시간과 싸움 숨 깊이 들이쉬지만 좀처럼 열리지 않는 굳게 빗장 걸린 공간 아삼아삼한 안개 속에서 엇섞인 마음은 박새처럼 오르락내리락 눈앞은 어웅한 동굴 속 달려오는 차바퀴처럼 재깍거리는 시계 바람 따라 우러나온 생각만 안달복달 한여름 모래밭에 밀려드는 밀물처럼 가슴을 흥건히 적셔 놓지 설렘이 깃든 기다림이란 결코 달콤한 것만은 아니야 시린 달빛이 어루만지는 은빛 산야처럼, 긴긴 기다림은 후비어 파고들며 핏줄을 울리게 하지만 무기수의 가출소처럼 한 줄기 희망을 주기도 하지 누구도 짧은 여름밤의 단꿈을 포기하지 않아 옴나위없는 애옥살이처럼 짓눌려도. -- 다층 75호(2017년 가을)--
봄의 점묘 흥건히 젖은 단꿈 깨어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봄날은 도둑고양이처럼 떠나가는데 호젓한 산길 힘없는 나무 긴 팔 뻗어 칙칙한 길바닥에 심어 놓은, 점점이 피어나는 꽃잎 멀리 떠난 여인의 눈빛처럼 흔들리는데 매달리던 손 놓아버리고 너운너운히 허공의 밑바닥에 내려앉아 더 환하게 물결치는 뒷마무리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뛰어넘어 무희 같은 몸짓으로 마지막 그려 놓은 풍경화 세상의 먼지 털어버리고 그림이 되어 그림 속으로 들어선다. --다층 75호(2017년 가을)--
펭귄마을 시냇가 가로수 타오르는 늦가을에 시냇가 옛길을 걷는다 기억의 시루 안 층층이 쌓인 켜에서 팔락거리는 마른 나뭇잎 늘어진 나뭇가지에 등불처럼 매달린 잎 하나 뜯어 씹어 본다 위장에서 목구멍까지 아랫배에 고였던 열기가 뜨겁게 올라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 무거운 짐 지고 먼 거리를 걸어온 듯 눈앞이 가물가물 흔들린다 허기진 위장이 꼬르륵거리는 한낮 희뿌연 연기 실오리처럼 피어오르는 검불 덩이 냇물에서 건져 올린 미꾸라지 노릇노릇 익어가는 더럽고 어수선한 냇가가 환장하게 그리워지는 것일까 시내처럼 흐르던 시절이 있었는지 정말 답답할 때면 옛집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골목 담벼락과 텃밭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세월의 속삭임에 귀를 세우고 아무도 뒤돌아보려 하지 않는 나의 냇가를 뒤뚱뒤뚱 펭귄처..
묘수 바둑을 잘 둔다는 것은 바둑돌을 놓아야 할 꼭 알맞은 자리를 찾는 것 상대와 자신이 둘 자리를 내다보고 날렵하게 무희의 발처럼 수순을 밟는 것 수십 수를 내다보는 뛰어난 바둑의 고수 이세돌 세계의 눈길을 끌며 오로지 한 수만을 바라보는 인공지능 알파고 앞에 어린애처럼 무릎을 꿇었다 한때 나도 여러 사람의 발자국을 깔보며 흐릿한 앞날을 내다보려고 몸부림치다가 돌쟁이처럼 거꾸러진 적이 있었다 늘 외곬만 바라보다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에야 빈 잔을 들고 축축이 젖으면, 숨은 발자국이 푸른 들판에 노란 민들레꽃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 --불교문예 77호(2017년 여름)--
못난, 꽃의 운명 마음을 비우는 것은 엎질러진 물처럼 나에게는 죽음을 택하라는 것 욕망은 꿈을 키우는 마법의 손길 불타는 욕정은 창조의 원동력 개털보다 못난 자여 쥐꼬리보다 못한 자여 이글거리는 탐욕의 불꽃이 사그라질 때 낮은 휘청거리며 상여처럼 다가오고 밤은 백치처럼 요란하게 우는가 불붙은 마음이 창고의 짐처럼 줄어들면 창백하게 빈 곳으로 암담한 어둠이 누룩뱀처럼 기어들지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 것이 화려하게 피어나려는, 개똥밭에 구르는 못난 꽃의 운명이지 --열린시학 82호(2017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