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한국의 시인들 (43)
벌레의 숨결
이기철의 ‘청산행’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연기 생목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시인의 고향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뻐꾸기 소리는 내내 따라다녔다. 뻐꾸기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는 산비둘기가 울었다. 뒤란 언덕에서 대나무 잎이 바스락거리고 오래된 지붕에 와송(瓦松)이 솟아나는 그 기와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인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처로 떠나기 전까지,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고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옛집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눈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장석남의 '옛 노트에서' 닳고 닳은 그리움의 모서리엔 섬집아기의 기다림이… ◇덕적도 서포리 해변에 피어난 해당화. 장석남 시인은 유년기에 이 해변에서 해당화와 더불어 기다림과 그리움을 배웠다. 덕적도 가는 바닷길에 내내 비가 내렸다. 섬에 당도해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
대숲사이 하얗게 피어 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 끝없이 펼쳐진 황토길… 뻘… 南道의 맑은 숨소리 ◇비 내리는 강진 영랑 생가 뒤안의 대숲을 배경으로 송수권 시인이 상념에 잠겨 있다. 누군가 그의 용모를 일컬어 점잖게 ‘시골풍’이라고 시집 발문에 쓴 걸 보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성산포로 가는 해안도로에 희미한 일출봉을 배경으로 오징어들이 줄에 걸려 운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골목길’에 해당되는 말인데, 그 길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귀포를 중심으로 제주 남서부 해안을 12코스로 이어놓았다. 어쩌다 행복하게도 3박4일 동안 그 올레를 걸을 기회가 생겼던 터에, 이생진(80) 시인의 ‘술에 취한’ 성산포가 보고 싶어 하루를 따로 떼어 홀로 제1코스(시흥초등학교~말미오름~종달리소금밭~성산갑문~광치기해변, 15㎞, 4~5시간)를 걸었다. 이 코스에서는 걷는 내내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
송찬호 시인의 ‘늙은 산벚나무’ “누구나 고향에서는 평등합니다. 젊었을 때는 고향이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일지 모르지만, 늙어가면서는 욕망의 키를 재다가 지위고하도 없고 모두 평등해져요.” ◇송찬호 시인의 고향마을에서 구병산 계곡을 향해 가는 길목의 먼 산자락에 산벚꽃이 등불처럼 환하다. 멀리 산벚나무, 신화 속에 피어난 꽃처럼 이마에 환하게 불을 밝혀놓았다. 송찬호(50) 시인의 ‘늙은 산벚’은 아닌 것 같다. 멀어서 분명하게 보이진 않아도, 호리호리하고 제법 키도 큰 것이, 화사하고 젊다. 숲은 아직 초록 물이 차오르기 전이어서, 오히려 그 회색 배경 탓에 노란 산수유와 젊은 산벚이 더 돌올하다. 시인을 찾아 충북 보은에 내려와 그가 자주 찾는다는 속리산국립공원 안쪽 구병리 계곡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는..
안도현 시인 데뷔작 ‘낙동강’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낙동강’에 등장하는 안도현(48) 시인의 아버지 안오성(1934∼1981)은, 후일 유명한 시인이 된 큰아들이 스물한 살이었을 때, 마흔여덟 살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다. 시인의 어머니 임홍교(1939∼ ) 여사가 우리..
황지우 시인 데뷔작 ‘연혁(沿革)’ “저희는 우기(雨期)의 처마 밑을 바라볼 뿐;가난은 저희의 어떤 관례와도 같았습니다.” 멀리 섬들이 봉분처럼 떠 있다. 근경(近景)에는 허리를 구부린 노파 세 명이 초록의 마늘밭을 부유한다. 바다와 늙은 여인들 사이로, 무덤들이, 뻘밭의 갈대를 울타리 삼아 해변에 누워 있다. 머지않아 죽을 이들과 이미 죽은 자들의 집 너머로, 섬과 섬 사이에, 살아가야 할 자들의 생업을 부표로 띄워놓은 청태밭이 희미하게 보인다. 죽음과 노동과 생업이 아침 해무 속에 부옇게 빛난다. 운이 좋았다, 이 사진을 건진 건. 운도 노력의 결과라는 말을 이쯤에서는 인정할 수 있겠다. 미황사에서 일행이 아직 자고 있을 때 해남의 아침 바다가 궁금하여 달마산을 내려와 어란을 향해 달렸다. 황지우(5..
최서림 시인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1993년 『현대시』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물금』 등이 있고, 시론집으로 『말의 혀』가 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인의 탄생 -서울 풍경 44 내 아내가 초등 1학년 때 광안리서 톰 소여랑 놀 때 청도서 나는 글자도 몰랐다. 내 아내가 마크 트웨인, 빅터 위고랑 여름을 피할 때 나는 붕어, 피라미, 물새알과 더불어 개천에서 방학을 홀라당 까먹었다. 서울 올라와 내 아내는 밤샘하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나 역시 먼 길을 돌고 돌아 밤을 지새우는 시인이 되었다. 나를 시인으로..
시인 문성해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당선. 수주문학대상, 해양문학대상, 김달진문학상, 대구시협상, 젊은시인상 등을 수상 . 시집 창작과비평사 랜덤하우스 창비 등이 있다 자라/ 문 성 해 한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그 임자 취한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번 내밀지 않던, 한 평의 컨테이너를 등껍질처럼 둘러쓴, 깨어나보면 저 혼자 조금 호수 쪽으로 걸아나간 것 같은 지하철 역 앞 코튼 판매소 오늘 불이 나고 보았다 어서 고개를 내밀라 내밀라고, 사방에서 뿜어대는 소방차의 물줄기 속에서 눈부신 듯 조심스레 기어나오는 꼽추 여자를. 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 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틀니 / 문..

최금진 시인 출생충북 제천시 데뷔2001 제1회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학력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졸업 웃는 사람들 웃음은 활력 넘치는 사람들 속에 장치되어 있다가 폭발물처럼 불시에 터진다 웃음은 무섭다 자신만만하고 거리낌없는 남자다운 웃음은 배워두면 좋지만 아무리 따라해도 쉽게 안 되는 것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난다 계층재생산, 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려져 있는 어색한 웃음은 보나마나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것 자신의 표정을 능가하는 어떤 표정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웃다가 제풀에 지쳤을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처럼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웃음은 배가 고프다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들을 뚝뚝 떼어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