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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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애지문학상 후보작품들
전갈
최금진
독하다는 말, 감사히 받겠다
악전고투의 버릇이니 내 평생 달고 가마
황무지 태생인 것도 잊지 않으마
부모가 선인장이고, 조상이 채찍인 것도 기억하마
태양에서 독을 빌어 왔고, 무덤을 갑옷처럼 몸에 껴입었으며
양 훅을 날리는 알몸의 권투선수처럼 두 팔을 들고 네게 가마
나는 가슴팍을 파고 들어 한 방을 노리는 인파이터
얼얼할 틈도 없이 노랗게 노랗게 마비되는 하늘
백스텝도 없이 으르렁거리며 전진하는 사막의 포클레인처럼
불을 뿜는 정유소 굴뚝을 네게 선사하마
네게 치명상을 안겨주마
부푼 흰 동공을 보이며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가는 달
똑똑히 보아라, 네가 잘 못 쏜 화살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와서 네 등에 다시 박히리라
네 눈에 몰려오는 사막의 바람 속에서 어룽대는
베두윈족의 경전을 네 앞에서 축문처럼 읽어 주리라
사과는 받지 않겠다, 너는 너 때문에 죽는다
쉬잇, 호들갑 떨지 마라, 너는 이제 죽는다, 네 잘못이다
독종이란 말, 맞다, 네게서 들었다
----{애지} 2014년 가을호에서
아청(鴉靑)빛 시간
- 서울 풍경 59
최서림
淸道라는 아청빛 시간에 푹 젖었다 왔다
시인인 나를 부러워하는, 나보다 더 시인다운 농부를 만났다
소들이랑 한 식구처럼 살고 있었다 소를 닮아 눈망울에
초겨울 저녁 검푸른 물빛 하늘이 출렁출렁 담겨 있었다
마들이라는 두꺼운 시간 속에 아청빛 시인이 살고 있다
간판들이 켜질 무렵 얽매이지 않는 말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도봉산 겨울 능선 위 저녁 하늘빛이
노시인의 눈에 흘러내릴 듯 가득 차 있다
광주 진월동에는 이른 새벽부터 푸른 저녁까지
편백나무로 시를 짜는 목공이 있다
총알이 스친 다리처럼 시리지만
옷깃을 여미게 하는 묘한 빛깔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말에 찔리고 베여 갈라터진 이 땅 어디에서도
붕대 같은 저녁이 찾아오듯이
시의 순간만큼 짧은 아청빛 시간이 왔다 간다
----{애지}, 2014년 여름호에서
8時가 없어진다면
김행숙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또 지나갔으니
8시처럼, 목요일 저녁처럼, 여름날의 긴 오후처럼 돌아오는 중이겠군요
봄에 여름이라고 부르고, 여름에 가을이라고, 가을에 겨울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당신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둥근 것들, 해와 달,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오는 구두들의 닳은 굽, 뉴욕제과점 모퉁이를 돌아 언덕을 오르는 마을버스들, 자꾸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
그러나 나는 어느샌가 한눈을 팔게 됩니다. 미안해요
그사이에 8시가 없어지면 당신이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어요. 8시가 없어지면
8시 5분이, 9시가, 없어지고 다음날 아침이 없어지고, 여름날의 소낙비가 없어지고 가을날의 천둥이 없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없어지고, 겨울 눈꽃축제가 없어지고, 새싹이, 연두빛 새싹이,
옆집은 한달 보름째 빈집입니다. 세상의 모든 옆집이 빈집이면 내가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어요
캄캄한 하늘에 당신이 무한한 원을 긋고 있는 중이라면
-『창비』 2014년 여름호에서
말벌과 춤을
박이화
일억 년 전 말벌 화석을 본다
커다란 몸집의 거미가
어린 말벌에게 손을 뻗을 찰나
눈앞 노랗게 덮쳐 온 송진에
일억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갇혀버렸다는 화석
학자들은
거미가 이제 막 말벌을 잡아먹을 찰나였다고
일억 년이나 유예된 거미의 굶주림을 이야기하고
일억 년이나 지속된 말벌의 공포를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알겠는가?
저 송진 냄새 진동하는 호박 속
거미와 말벌의 관계를
일억 년의 시간이라면
적과의 동침도
달콤한 밀월로 진화되지 않았을까?
그 일억 년을 기억할
천둥번개를 동반한 한 차례 소낙비가 지나자
어디선가 몰려 온 한 패거리 말벌들
누런 호박꽃 속에서
붕,붕,붕 엉덩춤 한창이다
----{애지} 2014년 가을호에서
DD에 가면
정채원
먼지로 뭉쳐진 심장과 발가락
그리고 입술들이 사는 곳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진다
먼지로 만들어졌지만 먼지맛이 나지 않는다
향기롭고 따뜻하다
미세 먼지처럼 폐포를 뚫고
혈관으로 스며드는 단맛에 눈 뜬 연인들
스모그 낀 하늘처럼 가슴은 답답하고 숨이 차고
이유도 모르는 채 어딘가 자꾸 아프고
손을 잡은 거리에서도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로 그 표정을 가늠할 뿐이다
문자 속에 이모티콘을 추가할 때처럼
잡은 손에 몇 번 더 힘을 주거나
깃털처럼 손바닥에 간지럼을 태우거나
부서질라, 이미 부서진 영혼이지만
흩어질라, 수 천 번 산산이 흩어진 몸이지만
달빛 아래
잠시 역광으로 빛나는 실루엣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몇 만 광년을 달려온 듯 눈은 빛나고 싶겠지만
얼굴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누구에게 쫓기는 건지
어떤 일로 도망 다니는지도 모르는 채
신호등도 보이지 않는 길을 헤매고 있다
밤낮으로 앞을 가리는 저 자욱한 먼지는 분명히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허파꽈리 속에 가득 찬 먼지를 뱉어내려는 듯
기침소리, 기침소리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아직은 서로가 곁에 있다
짙은 먼지 속에도
----{애지}, 2014년 봄호에서
손을 베다
천양희
세상에는 베이는 일이 많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
사람도 잘못 잡으면 마음을 벤다
그러니 마음아
아무 곳에나 널 내려놓지마
어디나 다 사막이야
세상에 참 많이 베어본 사람은 안다
손을 베이면 손이 아니다
베인 건 마음이다
그러니 마음아
아무 곳에나 들어가지마
어디나 다 늪이야
----{애지}, 2014년 봄호에서
냉이꽃
송찬호
박카스 빈 병은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신다 버려진 슬리퍼 한 짝도 냉이꽃을 사랑하였다
금연으로 버림받은 담배 파이프도 그 낭만적 사랑을 냉이꽃 앞에 고백하였다
회색 늑대는 냉이꽃이 좋아 개종을 하였다 그래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긴 울음
을 남기고 삼나무 숲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냉이꽃이 내게 사오라고 한 빗과 손거울을 아직 품에 간직하고 있다
자연에서 떠나온 날짜를 세어 본다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 {유심}, 2014년 3월호에서
분홍 외 1편
송종규
저 작은 꽃잎 한 장에 천 개의 분홍을 풀어놓은 제비꽃, 저것을 절망으로 건너가는 한 개의 발자국이라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물어지는 빛들과,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또 누구의 무덤이라 한다면
바이올린과 기타와 회중시계가 들어 있는, 호루라기와 손풍금과 아쟁이 들어있는 액자 속을 고요라 한다면
층계마다 엎드린 저 납작한 소리들을 또 불운한 누구의 손바닥이라 한다면
하루 종일 꽃잎 곁에서 저물어도 좋겠네 절망절망 건너는 발자국마다 분홍즙 자욱한 삶의 안쪽
손바닥으로 기어서 건너가도 좋겠네
세상은 슬픔으로 물들겠지만 꽃잎은 이내 짓무르겠지만 새의 작은 가슴은 가쁜 호흡으로 터질지 모르지만
슬픔으로 물들지 않고 닿을 수 있는 해안은 없었네 짓무르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세월은 없었네
눈부신 분홍, 한 때
----{애지}, 2013년 겨울호에서
탄센의 노래*
나희덕
1.
이것은 불의 노래,
노래할 때마다 등불이 하나씩 켜져요
불은 번져가고
몸이 점점 뜨거워져요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노래를 불러요
강물도 끓어오르기 시작해요
뜨거워요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요
사랑이여, 도와줘요
비의 노래를 불러줘요 비를 불러줘요
2.
이것은 비의 노래,
노래할 때마다 불꽃이 하나씩 꺼져요
비가 내리고
몸이 점점 식어가요
강물도 가라앉기 시작해요
기다려요 기다려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이 소나기가 당신을 적실 때까지
사랑이여, 사라지지 말아요 노래를 불러줘요
3.
그러나 노래의 휘장은 찢겨지고
비에 젖은 잿더미만 창백하게 남아 있는 밤
불과 비도
어떤 노래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밤
*고대 인도의 가수 탄센과 그의 딸에 관한 설화. 원주.
----?문학사상?, 2014년 6월호에서
사람의 자리
이병률
깊은 밤에
집으로 가는 길에 집 앞에
한 사내가 두 손으로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고 서 있다
할 말을 전하려는 것인지
의지하려는 것인지
매달리는 사실은 무겁다
사내가 한 층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나무에 매달리는 모습을 몇 번 더 보았다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지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지
나뭇가지는 닿기 좋게 키를 내려놓기까지 했다
어느 밤에
특히 오늘 같은 밤에는
그 가지가 허공에 손을 섞어
말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새를 날려 보냈는지
아이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는 위층 사내도
나처럼 내어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 가지 손끝에 줄을 그어 나에게 잇고
내 눈에다가도 줄을 그어 위층의 사내에게 잇다가
더 이을 곳을 찾고 찾아서 별자리가 되는 밤
척척 선을 이을 때마다
허공에 척척 자국이 남으면서
서로 놓치지 말고 자자는 듯
사람 자리 하나가 생기는 밤이다
--- ?유심?, 2014년 7월호에서
애지문학상 역대 수상자들
제1회 수상자 시부문 이대흠 문학비평부문 장석주
제2회수상자 시부문 함민복 문학비평부문 유성호
제3회 수상자 시부문 손택수 문학비평부문 권혁웅
제4회 수상자 시부문 이은채 문학비평부문 홍용희
제5회 수상자 시부문 김선태 문학비평부문 하상일
제6회 수상자 시부문 민경환 문학비평부문 오형엽
제7회 수상자 시부문 윤의섭 문학비평부문 이재복
제8회 수상자 시부문 김혜영 문학비평부문 이경수
제9회 수상자 시부문 황학주 안정옥
제10회 수상자 시부문 함기석 양애경
제11회 수상자 시부문 곽효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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