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2016 신춘문예 당선작 본문

현대시모음

2016 신춘문예 당선작

연안 燕安 2016. 2. 22. 15:06
2016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해花蟹

 

하송


냄비뚜껑을 열자 꽃처럼 붉은 꽃게가

철갑을 하고 있다
건들기만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엄지발을 치켜든다
뭉툭한 가위로 발을 절단하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꽃게가 아니라
가위였다
골수가 울컥 쏟아지자
바다는 잠잠했다
사는 일은 파도가 잠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갯벌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것
꽃게, 파도가 거칠수록
두 눈 똑바로 뜨고 등딱지에 힘을 준다
한 평생 꽃처럼 배를 보이지 않는 것이 꽃게다
섬 하나가 안테나를 세우고
육지로 나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닷바람에 허리가 꼿꼿하다
바다를 버린 꽃게, 절대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화해花蟹 : 꽃게 
 
◆ 당선소감

 

  꽃게! 말만 들어도 입안에 군침이 돕니다. 속살이 꽉 찬 꽃게는 담백하면서도 입안에 오래도록 남는 특유의 향이 으뜸입니다. 꽃게는 찜, 탕, 게장, 무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를 합니다. 꽃게는 꽃처럼 예쁘게 생겨서 꽃게가 아니라 삶으면 빨개져서 꽃게입니다. 잘 익은 꽃게의 두 집게발이 치켜든 가위 같습니다. 작게는 쓸데없이 웃자란 욕심과 아집으로부터와 크게는 부정부패까지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는 듯이 집게발이 단호합니다.

 

  꽃게에 대한 시를 완성하고 제목을 정하는데 적잖게 고심을 했습니다. 꽃게의 옛 이름은 ‘곳게’입니다. 곳은 송곳(錐)으로 집게다리에 돋은 가시가 송곳처럼 뾰족하다는 뜻입니다. 암녹색 바탕에 구름무늬가 있는 등딱지는 옆으로 퍼진 마름모꼴로 두 집게발은 크고 길며 억세게 생겼습니다. 꽃게를 한자어로 시해矢蟹· 유모· 발도撥棹라고도 하고 우리말로는 것칠에 · 살궤 · 곳게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는 생소하고 어렵게 생각되어 결국 ‘화해花蟹’라는 제목을 선택했습니다.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다면 ‘화해’는 갈등과 다툼을 그치고 적대 감정을 푼다는 뜻도 있어서 나름대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는 범접할 수 없는 학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때는 태산보다 높다는 생각으로 무척 힘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절차탁마는 절제의 미덕을 알게 했고 확장된 사유로 시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 고통이라면 고통의 절반은 기쁨입니다. 기쁨은 때로 결핍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결핍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시에는 혼이 있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는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화해花蟹를 계기 삼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많은 이들에게 힐링이 되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시 ‘화해花蟹’를 당선시켜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 [심사평]

김동수<미당문학회장,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금년에 600여 편의 운문이 응모하였다. 시조와 동시, 한시 등, 그 종류와 형태도 다양하였다. 이 중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민옥순의 <헛발을 딛다>와 조양비의 <낯선 폭설>, 황병욱의 <포도밭 사막> 그리고 지연의 <다르미타>와 하송의 <화해>였다.

 민옥순의 <헛발을 딛다>는 조각이 난 접시의 형상을 치밀한 묘사와 아름다운 표현으로 시선을 끌었고, 조양비의 <낯선 폭설> 또한 다소 보헤미안적 풍경을 능란하게 묘사하였다. 두 작품 모두 언어의 직조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직조와 묘사가 내용의 공소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황병욱의 <포도밭 사막>은 흉작으로 남은 농부의 신산한 삶을 짜임새 있는 구성과 미감으로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3연의 ‘번화가’와 끝 연의 ‘열매를 맺는다.’는 돌연한 시어의 혼란과 상투적 인식이 새로운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끝까지 고심했던 작품은 지연의 <다르미타>와 하송의 <화해>였다. 지연의 작품은 쉬르레알리즘 기법을 연상케 하는 자유분방한 에스프리와 비유 그리고 감각적 묘사가 그간의 문학적 역량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다르미타>라는 제목의 낯설음에서 오는 이질감이 끝내 ‘불꽃의 접점’을 찾지 못해 아쉬웠다.

 

 <화해>는 ‘꽃게와 바다’라는 비유와 상징의 공간 속에서 ‘갯벌 속으로∼몸을 숨기’며 오늘의 고난을 극복해가고자 하는 화자의 자기 고백적 주문이 긴장과 이완의 율조 속에서 하나의 ‘빛’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한 평생 배를 보이 않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결연함에서 일말의 연민을 느끼게 된다.

 

 평이한 듯 보이나 체험이 육화된 그 평이함이 오히려 어떤 결기와 진정성으로 느껴져 앞으로의 가능성에 믿음을 갖고 당선작으로 올렸다. 보다 정진하여 격조와 품위를 더한 시인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201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수

 

김재필

 

하염없이 눈물 쏟는 애인을

또 하염없는 입맞춤으로 달래본 사람이 알 것이다

같은 이에게 다른 피가 돌 때가 있단 사실을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

 

너도 이제 그만 목소리를 내보려 한다

그러나 침묵하고 싶지 않을 때에야 침묵다운 무거움이 온다는 걸

우린 이제 알고 있다

 

네 혀에 도달할 문장을 기다린다

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늘어지는 고드름처럼

오랠수록 흉기가 되는

 

조금씩 심장 가까이

이 겨울 속으로 완전히 입수하기 전에

 

 당선소감

함께 해줬던 사람에게 보상 되길 바라며 써

  

  Soli Deo Gloria.

 

  준모 형께 감사하다. 이런 날이 오면 가장 먼저 형의 이름을 쓰고 싶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언어로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무능이 허락되기 전까지 어떻게 견뎌야 할까. 이런 태도가 모두에게 중요할 수 없으므로 농담은 필연적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 언어를 삼키기 때문에 외롭단 걸 알게 되면 농담은 미운 애인 같다. 만약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을 인간이 언어를 연마한다면, 그런 생은 도대체 어떤 수수께끼의 대답이 되는 건지 생각하며 웃었다. 그런 세계에 누가 거주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언젠가 그런 인간이 방문했을 때, 그에게 필요한 대답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오랜 시간 함께 해줬던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되길 바라며 썼다.

 

  뽑아주신 황동규 선생님, 정호승 선생님, 김기택 선생님, 문태준 선생님께 감사 인사드리고 싶다. 부족한 작품이지만 가능성을 봐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마음의 빚을 덜게 해주심에 감사하다. 스승이신 박찬일 교수님께 감사하다. 조금이나마 힘이 되셨기를 바란다. 졸업 후에도 이끌어 주신 이형우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제자라 말하기엔 민망하여 성함을 적진 않지만 청강을 허락해주셨던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인정이란 걸 가르쳐주신 김미향 선생님께도 감사하다. 그리고 부모님께 감사하다. 역시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되신다면 행복할 거 같다. 더 많은 분께 감사하고 있다. 말 대신 찾아뵙는 걸로 대신하겠다.

 

△1988년 전북 무주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최근 응모작 추상·관념의 유희 과해 … ‘입수’ 소통의 모호성 벗어나

 

  최근 신춘문예 응모 시는 갈수록 모호성이 두드러지는 부정적 특성을 지닌다. 구체에서 일탈된 추상과 관념의 언어 유희가 지나쳐 소통의 길이 꽉 막혀 있다. 언어와 언어의 시적 관계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여 도대체 무엇을 왜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배배 꼬인 언어의 꽈배기를 맛도 보지 못하고 마냥 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도 인간을 위해 쓰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인간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갈수록 그 소통의 길이 막혀있다. 이제는 시의 불통마저도 유행인가. 불통으로 훈련된 투고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분별없는 불통의 세계에서 분별 있는 소통의 세계로의 전환이 시급한 시점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4편이었다. ‘패러글라이딩 하는 새’(김영미)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보다 “날개를 펼칠 때보다 접을 때가/ 더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을” 등의 통속적 단점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강물학교’(진창윤)는 강물을 찾아오는 겨울 철새들에 대한 진술적 묘사가 진부하고 지루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하였다. ‘평행한 세계’(강은재) 또한 꿈속과 꿈 밖의 경계를 넘나드는 만남의 세계가 펼쳐져 있으나 결국 “멀리 있어도 우리는 하나인 것 같다” “나도 내가 좋아질 때가 있다 이런 것은 혼자만 아는 비밀이다” 등의 통속적 산문성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입수(入水)’(김재필)는 비교적 소통의 모호성에서 벗어난 시다. 내가 너(애인)의 사랑의 강물 속으로 입수하는 과정의 순간을 짧으나마 극명하게 그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떠오르는 감정은 아직 발 떼지 않았다는 것/ 너는 위험한 마음으로 바닥을 문지른다’라는 표현은 이 시의 백미다. 지뢰를 밟았을 때 발을 떼면 생명을 잃게 되므로 발을 떼지 않고 있는 상태, 그 절체절명한 상태에서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이 시의 전체적 정조를 이룬다.

  다른 시에 비해 작품성이 높다는 장점도 있지만 소통이 가능한 시라는 장점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시를 쓰는 일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이므로 당선자는 남다른 노력을 통해 한국시단을 풍요롭게 꽃피워주길 바란다.

 

                                    


                                                                                                                                                                                                                                                      

2016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양을 찾아서

구녹원
 

마침내 양은 사라졌다

한 의식을 잃고서 나는 은주발에 담긴 눈*이 되고 싶었다

갈피가 다 바랜 경전 속에 없던 신이

밑창 닳아 낮아진 가죽신 아래에서 흘렀다

눈 내리는 게르 뒤란에서 그 의식은 치루어졌지

양 한 마리는 선택되었고

모든 자연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무죄한 저 걸음걸이

죽음으로 걸어갈 때 누구라도 하늘을 보고 땅을 볼 것이다

단도가 양의 숨길을 통과하는 직전 그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워지고

목자牧者는 숨 털 한 올을 뽑아 속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한다

산 자에게 건너간 울음소리, 가슴에서 질척이고

가장 조용히 자기를 버려 안식을 얻는 양의 침묵을 본다

양떼구름이 언덕으로 무리 지어 지나갈 때

두루마리 편지처럼 자꾸 도사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초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펼친다

만나고 싶은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침상 캐시미어에 머리를 파묻고 싶었다

천년을 흐르는 구름도 있었다

양은 어디에 있을까

 

*벽암록 제 13 칙 파릉(巴陵)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 차용.

사진<네이버 포토앨범>

 
당선소감

나만의 나무를 찾는 사유의 길

 

  당선 소식을 접하는 순간 왜 그날이 떠오를까? 달걀 3개로 석유 한 홉을 바꾸고 환한 심지를 바라보며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고 훌쩍거렸던…. 사유하는 내 의식, 내 표현은 늘 허기졌다. `시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발언이다'라고 매슈 아널드 영국의 시인, 문학비평가는 말했다. 나만의 나무를 찾고 싶었다. 어쩌면 저 광활한 초원 위에서 나의 구름을 찾는 한 마리의 양이었을까?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립니다. 느린 저를 사유의 길로 이끌어 주신 경기대 이지엽 교수님께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명지전문대 이경교 교수님, 열린시학아카데미 하린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와 길, `아카데미' 시우님들 친구분들 모두 힘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또 저희 사랑하는 가족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다섯 번의 장례의식을 치렀지만. 떠난 그 오솔길에서 저는 아무것도 해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하늘에서 미소를 지으실 것 같습니다. 더 겸허히 공부하여 좋은 작품 쓰겠습니다.

 
△전남 목포 生

△경기대 예술대학원 독서지도과 재학 
  

심사평

신선한 상상력·큰 스케일이 마음 사로잡아


  본심에 30여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응모 편수는 많았으나 산뜻하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적 철학이나, 시적 사유의 폭이 약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종적으로 논의가 거듭된 작품은 송현숙의 `배고픈 이름'과 구녹원의 `양을 찾아서'였다.

  `배고픈 이름'은 잊혀져 가는 `도장'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독특한 시각과 발상으로 `불운한 가족사'를 잘 그려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상투적인 표현으로 시적 긴장감이 떨어졌다. 제목 또한 상징성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당선작 구녹원의 `양을 찾아서'는 오랜 숙련의 흔적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사라진' 양의 죽음을 통해 삶을 영속하게 하는 존재의 비의에 천착한다. `가장 조용히 자기를 버려 안식을 얻는 양의 침묵을 본다'는 시구의 깊이, `초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펼친다'는 신선한 상상력과 큰 스케일이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진하. 이영춘시인






                                    
20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 / 김상현                                                                                   

2016.01.06. 08:33

                                                             

20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 

김상현


가을 산길 위에서 느닷없이 냄새가 혀를 밀어 넣었다

하얀 앞발톱의, 엎어져 있는 두더지 주검

두더지는 반지하 방이 되고 있었다

잘 닦은 화이바 같은, 검은 갑옷의 벌레가

시체에 세 들어 늦깎이 신혼방을 만들고 있었다

주검이 있을 때, 짝을 맺는다는 송장벌레

저 더듬이 끝이 뭉툭한 것은

그 교감도 한때는 부딪혀 옹이 박힌 것

구린 터 속에서도 더듬거리며 전등을 갈겠지

저 등판의 빛은 그들 눈에 모닥불이 타오르는 증거다

자글자글 끓는 된장찌개 투가리, 그런 뜨거움 올린

양은밥상을 들고 거뜬히 문지방 넘는 삶

둘은 두더지를 땅에 묻을 때까지

쉬지 않고 흙을 파내려갈 테지

흙으로, 나무뿌리를 갉았을 몸을 닫고 쓰러진 밑바닥 위에

꽃 장판을 깐 다음

반지하가 지하가 된 방 안에서 서로를 쓰다듬겠지

때로는 이웃 풍뎅이 애벌레와 다툴 일도 있겠지만

샛별 같은 알을 낳고 그 아이들은

가까스로 냄새를 막은 몸의, 한 터럭까지 다 뜯어먹고서야

벽 틈새에 손톱 밀어넣는 것이 햇살이었음을 알겠지

목숨이 윤이 나는 저 까만 옷의 청소부 부부

오늘 같은 초야(初夜)면,

숲 속은 달이 익어 참 부끄럽겠다

  

당선소감

 "글쓰기로 혼 뺏겼던 한 해 소망 이뤄"

 

  내가 글을 쓰면 잘 될 것 같으냐, 점집에 가 물을 때마다 그쪽 사람들은 말한다. 글 쪽과는 잘 맞습니다만, 그냥 취미로만 쓰라고, 쓰면서 행복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그런데 지난해 참 이상하다. 9월에 3일 간격으로 문학상을 받았다. 김유정 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과 근로자 문화예술제에서 최고상인 대통령 대상을 역시 시를 통해 받은 것이다. 정부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도 다녀왔다. 그저 생계의 길 위에서 줍는 법만 익힌 개미, 그런 개미 한 마리가 구름 위의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그 옛날 우체국 계단에서 글 봉투를 품고 있던 한 아이의 눈망울을 생각하였다. 개미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은 그 아이의 반짝이는 까만 눈망울을 닮았을 거라고 상상해보았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서, 신문에서 오려 벽에 붙여놓은 201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상식 사진을 바라보았다. 2년이 흘렀고, 사진 속에 한 자리에 내가 앉아야 할 일이 생긴 것.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였다. 고백하건대, 사진 속의 저 현장 속으로 간절히 들어가고 싶었었다. 올 여름방학 기간에만 시 50편, 동시 35편, 단편소설 1편을 쓴 게 사실이었다. 혼을 빼앗겼다는 표현이 맞다. 혹시 내가 이렇게 창작에 홀려 내 정해진 팔자를 바꿔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기호지세, 호랑이를 탄 기세로 끝까지 몰아가야 한다는 생각. 도중 내려오면 호랑이에게 먹힌다는 생각을 하였다.

 

  졸고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전북일보 사에 감사의 말씀 올린다. 글눈을 뜨게 해주신 우석대 문창과 교수님들과 제 옆을 지켜준 문우들께 우체국 계단에서 망설이던, 낯 잘 가리는 그 아이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고 거듭 감사의 말씀 올린다. 글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점괘는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나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겠다. 끝으로 (달려라 검정분필) 제자들에게 영광을 돌린다.

 

심사평

 "삶에서 희망 발견하는 시각 뛰어나"

 
   신춘문예라는 제도는 한 편의 작품을 뽑는 일이지만 한 사람의 시인을 문단으로 불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한 작품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응모자가 습작에 쏟아 부은 훈련의 흔적까지 읽으려고 한다. 시와 그 시를 쓴 사람을 같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작품을 판별할 때, 구태의연한 서정시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시를 꿈꾸고 있는지, 시에 끌어들인 특수한 성격의 언어들이 이 세계의 보편적이고 균형적인 감각을 확보하고 있는지, 그리고 발설하고 싶은 개인의 일과 발언해야 하는 집단의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과정을 거쳤는지 등을 살펴보게 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것은 모두 9명의 작품이다. 말을 다루는 솜씨들이 뛰어나 다들 오랜 습작을 거쳤으리라 짐작되는 작품들이었다. 그렇지만 내면의 울림이 느껴지는 중량감은 대체로 부족해 보였다.

 

  우리는 그 중 5명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정재돈의 <산낙지>, 이시윤의 <4분의 3박자로 반달이 지나간다>는 낯선 이미지를 충돌시켜 새로움을 구하고자 하는 작품들이지만 아직은 덜 익어 어색한 느낌이 강했다. 서귀옥의 <망중한>은 안정된 호흡으로 주제를 의도대로 차분하게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의식의 찌’ ‘생의 잔해들’과 같은 낡은 표현을 하루바삐 걷어낼 줄 알아야 새로운 시의 나라에 당도하리라 생각한다.

 

   이동한의 <사과>는 깜찍하고 활달한 상상력, 군더더기 없는 언어 운용 기법이 매혹적이어서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어깨를 겨루었다. 그런데 시의 뒷부분이 공허한 말장난으로 마무리되는 점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당선작은 김상현의 <두더지 반지하 신혼방>으로 결정되었다. 죽은 두더지의 몸에 깃들어 사는 벌레를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의 따뜻함을 길어 올리는 시인의 시각은 예사롭지 않다. 오밀조밀한 감각의 배치도 뛰어났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에서도 우리는 만만찮은 필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죽음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는 당선작의 온기가 이 냉랭하고 삭막한 세계의 불꽃이 되기를 빈다.













2016 신춘한라문예 詩 당선작

 팥죽

 

이은주


매월 달의 소유 기간은 멀면서 가깝다 

쟁반에 빚어놓은 옹심이 

달이 되려면 뜨거운 솥 안에서 익어야 한다 

반은 떠있고 반은 잠긴 달들 

팥물을 빨아들여서 잔뜩 부풀어 있다 

오늘 뜬 달엔 팥죽이 묻어 있다

붉은 저녁이 걸쭉하게 담긴 그릇마다 

몇 개의 잘 익은 달이 떠있다 

그릇마다 달빛이 새어 나온다

그릇 하나를 밝히는 달빛,

하마터면 달빛을 엎지를 뻔 했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많이 떴었다

죽보다 달을 먼저 뜨셨다 

만월이 씹히지도 않고 몰락한다

달이 하나 씩 줄어 들 때마다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그대로 떠있다

어디로 가는 길을 비추려고 

죽 그릇에 달 하나를 남겨 두었을까

달 하나를 남기는 식량 

누군가에게는 달이 되고 부적이 되는 애기동지

보름으로 갈수록 살이 오른다 

 

동짓날 밤 수십 년째 비어있는 어머니의 밤을 열어 보면

그릇하나를 밝히는 얼음으로 빚은 달이 무수히 떠있다

해마다 오는 긴 밤을 비춰줄 달을 꺼내 놓으시는 걸까

그런 밤이어서 달이 익어 가는 걸까 

저 달이 잘 익으면 드시기 좋겠다

청상은 불구의 밤을 부적으로 쓰는 달 

저 달들을 골목마다 내걸고 싶다

 

 

당선소감

시에게 진 빚 시로 갚고 싶다


  기쁨은 오후에 찾아 왔다.
 
  도전할 때 마다 글이 업그레이드 되는 느낌은 스스로 만드는 우리이며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초겨울 얇은 종이 옷 한 겹만 입혀서 보낸 마음은 빚이다. 춥고 캄캄한 곳에서 수없이 떨었을 내 글에게 따듯한 옷 한 벌 입히게 되어 기쁘다. 거의 맨 몸으로 보내졌던 내 글과 화해하고 싶다. 혼자 노는 법과 혼자 앓는 고통과 허탈을 안겨 주었던 시의 영역을 인테리어하고 싶다. 따뜻한 옷을 더 많이 입혀주고 싶다.

  스스로 버려지고 스스로 상처받는 내 글은 치열하게 정진하며 돌보아야하는 미숙아다. 걸쭉하고 붉은 밤이 짧아져 가는 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다.

  아름다운 제주, 살고 싶은 제주의 한라일보사와 글을 가려주시고 선하여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또 나와 시를 이야기했던 분들, 아버지 같은 오빠, 엄마 같은 언니, 언니 같은 동생, 선배 같은 친구 문희씨, 내 글의 첫 번째 독자인 남편, 사랑하는 진우 정우와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약력 ▷1962년 강원도 홍천 출생 ▷인천 거주 ▷'시아카데미 시회'동인

 

 

 

심사평

세밀한 시적 구성, 신뢰와 온기 전해져

 

  여전히 젊은 시를 대할 때는 가슴이 뛴다. 가슴에 달이 뜨게 하는 것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함을 건네는 것도 시 한 줄의 힘이다.

 

  단 한 편의 당선작밖에 내지 않는데도 신춘지대를 통과하고 싶은 가슴이 아직도 여전한 시대라는 점은 즐거운 고통이다. 더구나 한라일보 신춘문예는 그 지정학적 위치부터 얼마나 매력적인가. 응모작들에서는 그러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광활한 시의 숲을 헤쳐 나오면서 어디에 이러한 예비시인들이 숨어 있었던가. 고투의 흔적들을 함께 느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응모한 이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몇 가지는 짚고 가자. 신춘의 경향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작품들, 대체로는 산문시가 적지 않았다. 리듬감을 무시하거나, 현란하고 모호한 언어의 기교로 내면의 고백에 치중하고 있는 것도 거슬렸다. 간혹 내용이 허술한 경우, 정작 시가 지녀야 할 응축과 긴장성 등의 요소를 담보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있어도 감정의 과잉, 단순 발상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시는 시인의 내면과 외피를 아우르는 치열한 과정에서 탄생하지 않는가. 과연 그런 작품을 찾을 수 있을까.

 

  당선작 '팥죽'에 이르러서 심사위원들은 망설이지 않아도 되었다. 옹심이, 그 달의 이미지를 통한 어머니의 기억은 섬세하면서도 가볍지 않았다. 탄탄한 시적 구성으로 잔잔하게 직조된 그 속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신춘의 성격처럼 신선함, 치밀함, 신뢰할 만한 수준이라는 점에서 믿어도 좋았다. 확장된 시세계를 보이고 있는 '임관의 숲' 등 다른 경향의 세 편 역시 내공이 엿보였다.

 

  당선작 외에 최종심까지 올라 논의된 작품들은 '망모'(홍성남) 등 네 편. '망모'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오래도록 정진해오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미지의 조율과 사유의 깊이 또한 엿보였으나 평면적이고 치밀함에서 조금 미흡했다. 산문시 '따뜻한 숲'(강동완), '꽃의 잠복'(이윤주)은 기교는 탁월했으나 상징과 이미지가 지나쳤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자신만의 언어의 집을 지으며 정진하고 있는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에게는 오늘이 또 다른 시작의 관문이 되길 기원한다. 그리고 오늘 이 신춘의 첫 아침, 잠시나마 이 한 그릇 팥죽의 온기가, 달이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를!







2016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길

 

문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 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고
늙은 벚꽃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는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내비게이션
  

당선소감

"나의 시 쓰기는 사람과 풍경을 알아가는 과정"


  세상과의 교감은 열린 정신에서만 가능하다. 많은 삶들이 길을 찾아 떠돌다 돌아오곤 한다. 나의 시 쓰기는 사람과 그 사람의 풍경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시를 왜 쓰는지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은 적이 없다.

 누군가를 왜 좋아하냐고 물을 때 난감하듯 시를 쓰는 것도 그렇다. 무엇인가 내게 다가오고 그것을 언어의 형식을 빌려 드러내면 서툴지만 시가 된다. 그렇게 십년을 쓰고 지웠다.

 스무 살의 나는 빨리 늙고 싶었다. 어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괜찮다는 일에 상처받기 일쑤였다. 어른이 되면 세상이 초연하게, 바라보듯 살아지는 줄 알았다. 현실은 여전히 나를 허둥대게 한다.

 하지만 이 서툰 삶이 덮어주고 안아주는 주위 사람들 덕분에 나쁘지 않다.

 땅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회현실을 시의 세계로 옮겨보는 작업, 내가 그들은 안는 방법이다.

 시 쓰기에 주춤대는 내 손을 잡아주는 전화를 받았다. 크리스마스에 근무라 김치찌개를 넉넉하게 끓이고 있었다. 들 뜬 목소리의 통화가 끝나자 딸아이가 다가와 가만히 안아주었다. 늘 지켜 봐주는 가족들에게 '나 좀 멋지지 않아?' 라고 자랑하며 이 좋은 기운을 나누어 주고 싶다.

 일곡시회를 이끌어주시는 고재종 선생님, 광주대학 신덕룡 이은봉 선생님께 이제라도 배움에 보답을 하게 되어 기쁘다.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용기를 주신 광남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좋은 글을 쓸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해 본다.

  
 ▲1964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5ㆍ18문학상 동화 당선
 ▲현재 국립5ㆍ18민주묘지 근무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일곡시회 동인

 

심사평

"당선작, 詩를 밀고가는 힘 좋았다"


 

  좋은 시는 어떤 것인가. 동서고금을 통해서 변치 않는 것은 좋은 시는 음악성(가락ㆍ리듬)과 회화성(그림ㆍ이미지)을 잘 갖추되 삶을 이끌어 올리는 힘이 엿보여야 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는 있지만 보지 못하는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데 시의 운명과 책무가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시인이 되려고 하는 자는 현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물론 과거와 미래까지도 동시에 담아내는 숨쉬는 그것들과 끊임없이 접신(엑스터시)하고 밀교해야 한다는 데에 시와 시인의 운명이 요구하는 그것일 터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광남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작품을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다. 온라인시대인지라 응모자들이 가히 전국적이었다. 서울, 경기, 강원, 경상, 충청, 전북을 비롯하여 광주전남에서 의욕적인 시작품이 들어왔다. 그런데 '시는 짧고 소설은 길다'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지나치게 지루한, 마치 콩트나 단편소설의 한 대목을 잘라다 놓은 것 같은 작품들이 많아 작금의 한국시의 병폐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최종에 오른 세 사람의 작품은 믿을 수 있는 대목이 많았다. 먼저 '탑의 형식' '장수하늘소의 꿈' 등의 응모자는 현대시의 특징 중의 하나인 판타지의 기법이 너무 지나치게 드러나서 시적 리얼리티 즉 감동이 따라갈 수 없었다.

 다음으로 '동행' '저녁의 합석' '천년웃음' 등의 응모자는 시 속에 서정성과 서사성을 잘 교직하는 저력은 엿보였으나 삶을 눈뜨게 만드는 '아픔의 힘(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성 혹은 카타르시스의 힘이라고 말했다)'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둥근 길' '플라잉 가이' '장구' 등 3편을 응모한 문귀숙 씨는 전체적으로 작품의 구성이 탄탄하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시적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 시를 밀어 올리는, 끌고 가는 힘(에너지) 그리고 시적 의지가 좋았다. 음악성과 회화성 그리고 민요정신(Ballad Esprit)을 두루 갖춘 점이 크게 사줄만했다.

 다만 모더니티와 언어의 나이브한 참신성, 리리시즘의 부족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우리시대를 깊이있게 통과하는 담론을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동시에 보여주면서 정진하기를 기대해본다. 새해를 맞아 당선시 '둥근 길'로 출발하는 문귀숙 씨가 나름대로 꽉 찬 '만월'을 보여주고 있어 독자들을 기쁘게 할 것으로 믿는다. 축하한다.   

 

  심사평 (김준태 시인)  

                     



  
                                      

201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한상록

 

보십시오. 내게 빈 하늘을 열어

가벼운 마음 옷차림으로 흙을 밟게 하십시오

어디선가 두엄 지피는 향내 그윽하고

새살 돋는 들풀의 움직임 간지럽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꿀벌의 잉잉거림 속에 묻어오고

겨우내 강을 건너지 못했던 나무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 실핏줄로 살아나지 않습니까

잃은 것이 있다면 내 뜰로 와서 찾으시지요

이제 내 뜨락에 샘을 내므로

흩어진 목숨붙이들 찾아 모으려 합니다

바람만 드나들던 수족관을 가셔내고 맑은 수면에다

튀어오르는 날빛 지느러미를 풀어놓으면

찰랑거리는 햇빛을 입고 내 생의 물보라 아름다울 겁니다

옥상에 내어걸린 빨래 나날이 눈부시어가고

누군가가 돋움발로 벗어붙힌 몸을 넘겨다 보면

산록의 묵은잠을 흔들어 놓을

아스라한 진달래향 더욱 곱지 않겠습니까

저 만치 다가오는 나무들의 길이 보이고

새순같은 배꼽을 드러낸 개구쟁이 아들놈

동화 속의 악당을 찾아 타앙 탕 말을 달리면

그 길목을 따라 몇굽이의 강이 흘러서

우리의 얼어붙은 꿈도 촉촉이 적셔지지 않겠습니까

 

 

당선소감

견뎌내기 힘든 나날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동지를 몇 시간 앞두고 퍼져있는 겨울햇살이 온누리를 물들여 가고 있다. 그 햇살의 누리를 뚫고 겨울나무의 깡마른 우듬지가 마지막 남은 허공 몇 점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우주가 품고 있는 넓고 깊은 섭리의 눈초리는 저 작은 매만짐 하나하나 마저 놓치지 않는 치밀함으로 가득해 있으리라.

 

  당선통보를 받기 바로 전에는 내게 짐 지워진 삶의 녹록치 않음을 두고 마냥 한탄만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삶에 대한 내 나름의 고집이 있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든 나날이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비루하기 짝이 없고 손대는 족족 막히기만 했던 내 인생의 나날 가운데 참고 견디다 보니 이런 엄청난 홍복까지 주어지는 날도 있다니, 이 당선소감을 쓰고 있는 이 시간까지도 얼떨떨하기만 하다.

 

  이십 년 전에 나는 어느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으면서 당선소감문에 백의종군하는 마음가짐으로 오직 한 길만을 걸어가겠다고 힘주어 말한 적이 있다. 그 다짐이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나의 글 쓰는 일을 가로막는 많은 악조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견뎌냈다. 하지만 바늘구멍보다 뚫기 힘들다는 신춘문예 당선이 어디 일념 하나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란 말인가.

 

  나는 이번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 말이다. 끝으로 이번 당선을 통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와 글 쓰는 일을 계속해나갈 명분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불교신문사에 멀리서나마 큰절을 올린다.

 

 

심사평

재주 부리지 않고 평상심 거스르지 않았다

  뽑는 자는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을 바라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작품이 “여기 나 있소” 하고 나타나는 일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이번의 응모작 가운데서 나에게 뽑혀온 작품들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다시 골랐다. 네 번씩이나 읽은 나머지였다. 그것이 ‘검’, ‘나무의 모든 냄새들에 대하여’, ‘돌고래 정착기’, ‘물 위에 지은 집’, ‘단풍’, ‘남술이’, ‘연보라 제비꽃’, ‘귀공’, ‘느그는 좋겠다’, ‘봄’, ‘풍경’, ‘산사에 눈이 내리면’, ‘서울 아리랑’이었다. 이 가운데서 ‘봄’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봄’의 인상은 첫째 안정감이다. 들쭉날쭉하지 않다. 재주 부리지도 않는다. 언어에 무리가 생기는 일이 드물었다. 진부한 표현이 한 두군데서 걸렸으나 작품 전체의 평상심을 그다지 거스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러나 이 작품 바로 다음에 ‘검’, ‘나무의 모든 냄새들에 대하여’가 아쉽게 뽑히지 못한 사실에 빚지고 있다. 

-심사평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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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정자나무를 품다

 

염병기
 

내 고향

동구 밖
수백 살 나이에 지난 세월 움켜쥔 늙은 정자나무는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다

 

고향 길에
어김없이 지나야 하는 그 곳은
돌담 길에 호박 엮이듯
어릴 적 추억들도 걸려 있다

 

옹기종기 모여 동네의 쉼터로
부초처럼 동네를 돌아다니는 이야기
풍문으로 떠돌던 이끼 낀 세월의 얘기도 묻혀 있고
저마다 자신만의 사연으로 바라본다

 

만만치 않은 세상, 삶이 고달플 때
의연함으로 시절을 버틴 정자나무는
살아온 날에 대한 다독임
살아갈 날에 대한 묵묵함으로 속마음을 대신한다

 

한 움큼씩 안고 사는 시린 사연도
송두리째 흔들렸던 삶의 모습에도
지나온 세파에 견딘 세월의 약(藥)으로
그 앞에서면 살포시 봄눈 녹듯 치유가 된다
     
고향 정자나무에서 느끼는 바람결
한 자락 쓸어 담아 가슴에 품는다
말 없는 살랑거림은 존재 의미를 더 하고
굳건함은 의지에 다시 일어나 시작할 마음을 부추긴다

 
당선소감

글은 ‘마음의 향기’  누군가에게 힘 됐으면

 

  참,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뜻밖의 당선 소식에 기분 좋은 날이 되었다.


  습작을 하면서 글이란 마음의 향기라는 생각을 자주하면서 글 속에, 한 편의 시가 누군가에게 그 향기가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 있다는 위안으로 시를 쓰려했다. 그래서 지난 시절의 빛바랜 글일지라도 두고 두고 읽혀지고 느껴지는 부초(浮草)의 편린(片鱗) 같은 마음들이 있었으며 살면서 한때 잠시나마 힘든 시간도 있었다. 그저 내 자신에게 하고픈 이야기(詩)가 하나, 둘 모아졌고 언젠가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책 갈피(葛皮)를 넘기고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더불어 함께하기를.. 그들도 어느 순간에 잠시나마 인생사가 힘들 때 곤고해 질 때 한 줄의 글에서나마 새삼스레 목청을 더 높인 거창한 외침은 아니지만 나지막이 들려줄 이야기로 공감과 소통의 부분으로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었었다.


  추운 겨울날 몸을 옴츠리고 있다고 겨울이 따뜻해지는 건 아닌 걸로 안다. 견디고 적응해 나가고 그렇게 추위를 이겨내야 한다. 추위를 이겨내는 것도 이러하듯이 삶의 역경도 견디고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라 믿는다. 세상 살아가면서 삶의 상처야 덧나고 아프면서 겪는 게 있다. 처음에는 적당히 아파도 하고 그냥 무작정 외쳐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새살이 돋고 또 잊혀지면서 세월의 나이테가 그려져 나갔다. 때문에 너무 아파하지도 너무 힘들어하지도 않기를 스스로에게 독려 했다. 또한 성공이란, 작은 의미에는 자신이 무엇이든 시작한 용기가 씨앗이 되어 해 보겠다는 의지와 열정으로부터 싹을 틔운다.


  아직은 역량과 필력이 많이 부족하여 생각처럼 삶의 향기로 옮겨내지 못한 부족한 글에 조금은 속살처럼 드러나는 부끄러움도 있지만 그래도 이름 석자 앞에 시인이란 명패를 달고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명분과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정연덕 시인)과 동양일보 문화기획단 관계자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사랑하는 가족인 아내 박지혜, 특히 딸 염은비(창작동화) 작가, 그리고 문학박사 김정수 시인, 염민기 시인, 지인 장택산 이들과 좋은 시간으로 지향점이 같은 모습에 함께 나눈 문학적 교감과 아낌없는 격려에 큰 힘이 되었고, 새삼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 1957년 경남 거창 출생.
● 서울 광운대 산업정보대학원(무역학) 중퇴
● (주)신한개발S&D 대표이사, 중국 신한그룹 총경리 역임
● 현 (주)유림기업 전무이사, ㈜핑거팁스 대표/컨설팅

 

 심사평
자기숨결의 정체성 찾기 능력 돋보여

 

   이번 신인문학상 공모에 응모한 작품(472편)을 읽고 대부분의 시작들이 다양하고 나름대로의 개성과 새롭고 탄탄한 시세계가 엿보이기도 하였으나 아직도 신인문학상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는 전효정의 ‘골목의 어둠’과, 김회권의 ‘엎어진 개밥그릇’과, 허은규의 ‘삼거리 청정횟집 감성돔의 푸른 눈’, 그리고 염병기의 ‘정자나무를 품다’란 작품이다.


   전효정은‘골목의 어둠’이란 작품에서 밤의 골목은 저만의 어둠과, 낡은 시멘트벽엔 덕지덕지 광고지가 회색빛으로 물든 골목과 화자, 백열등의 불빛과 밤벌레의 유혹, 그 어둠이, 옹크린 골목에 백열등을 통해서 또 다른 희망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김회권의 ‘엎어진 개밥그릇’은 토방 아래 달싹 엎어진 개밥그릇을 백구 한 마리가 반나절 넘게 자기의 밥그릇을 일으켜 세우려고 입으로 물고 제쳐도 뒤집어지지 않는 막사발을 일으켜 보았자 뜨거운 공기만 고봉으로 담겨져 있을 터인데 자기 밥그릇을 위한 발버둥치기행동에서 산 생명의 존재적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허은규의 ‘삼거리 청정횟집 감성돔의 푸른 눈’이란 작품은 철갑고래와 흰 얼굴들이 등 무늬로 번지는 고향 닮은 바다에 백합조개, 난파선을 들락거리는 해마, 강장동물의 촉수로 그려지는 해협과 청정횟집 감성돔의 푸른 눈을 통해서 저들의 무리와 헤엄치고 싶은 충동을 애증의 모습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엿보인다.

   염병기의 ‘정자나무를 품다’란 작품은 고향 길에 지나는 동구 밖의 정자나무는 마음의 고향으로 믿음의 그늘로 그리움의 터전으로 존재한다. 부모와의 삶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곳이란 걸 일깨우고 그 앞에 서면 세파에 견딘 세월의 약으로 한 자락 쓸어 담아 가슴에 품게 한다. 뿐만 아니라 다시일어나 시작할 용기와 힘을 주는 존재로 의미가 강한 사유의 깊이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도구적인 목적시나 관념적인 산문시가 난무하는 세태에 자기숨결의 정체성 찾기의 능력이 돋보인다. 염병기의 ‘정자나무를 품다’를 당선작으로 밀며 사물과 사유를 절제된 시로 갈고 닦는 작업에 힘써 건실한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정연덕 (시인)






묵계 / 조경숙                                                                                                                          





 

갠지스강가의 화장터에서 인생의 허무를 보았다고 나는 결코 말하지 않겠다

차라리 타다만 인육을 기다리는 까마귀를 보았다고 말하겠다

어깨를 들썩이는 어떤 이의 붉은 눈자위를 접사렌즈로 바라보던 날이었다

2015년 9월 576시간, 볕 뜨거운 나의 인도를 일기장 갈피에 끼워 넣는다

매운 연기에 발등으로 떨어지는 내 눈물 핥던 개 한 마리를 바라보던 시간이었다.

 

<문예사조> 300호 특집 2015년 12월 이달의 시인

 

 

 조경숙 시인

 

강원 영월 출생

제23회 인천시민문예대전 시 부문 대상 수상

2012년『시와정신』‘진통제 외 4편’으로 등단

2014년 시집「절벽의 귀」북인 


 

심사위원 조강석(문학평론가 김소연(시인) ) 황인숙(시인)

                                    
2016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큐브 / 강기화                                                                                   

2016.01.01. 16:56

                                                                

 2016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큐브

 

강기화

 

면을 돌린다 
네 개의 뿔을 가진 성난 눈초리
다가갈 수 없는 모서리
익숙하지 않은 경계
 

면을 돌린다 
반듯하게 줄을 긋는

곧은 대답

전설처럼 등지고 있는 벽

위로받을 수 없는 

네모의 의혹은 커지고

수상한 귀퉁이의 각은 증명한다

 

면을 돌린다

중앙을 공격한다

눈을 뜬다

놀이가 된 도형

일정한 방향으로

서로 맞춘다

 

다시 면을 돌린다

갇혔다가 풀려나는

매혹을 느끼며

활기차게 뛰어든다

 

비즈니스센터의

저녁 창문은 

퍼즐의 공식

밀폐된 면과 면이 

독기를 띠며

부활한다

 

 

당선 소감 
"한 편의 시는 생명을 가진 치열한 실천

 

  늦은 나이로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했고,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치열한 생활 속에서 다시 시를 쓰고 있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글은 나에게 업이다. 20대는 시를 쓰는 것이 마냥 재미있었고 좋았다. 늦게 시작한 공부는 삶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30대에 삶과 글이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스스로를 꾸짖으며 방황하였다. 주위의 동기들과 문우들이 등단을 하고 책을 통해 소식을 전할 때, 안부를 전하지 못하고 전공을 숨겨야 하는 버릇이 생겼다. 삶 속에 시가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을 때, 시를 쓰지 못하였다.
 
  한 편의 시는 생명을 가지고 활동하는 치열한 실천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는, 혼자 시를 쓰는 철없는 막내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항상 지켜보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모두 존경하는 어머니의 덕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향, 부산을 몇 년은 떠나 살기도 했다. 다시 찾은 고향은 시를 품으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길을 열어주신 부산일보와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시가 생활 속에서 치열하게 스며들도록 노력하겠다.
 
  쑥스러워 표현하지 못했던 말이 있다. '권옥순 어머니, 당신의 딸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동학의 세계로 이끌어 주셨던 교수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문우들과 동기들 고맙습니다. 흐르는 물과 같은 생명력으로 작품 속에서 보답하겠습니다.'

 

 강기화/1973년 부산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졸·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국어·논술 학원 강사

 

 

 

시·시조 심사평

큐브'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 참신한 표현 돋보여

'봄눈' 가락의 묘미, 회화성,연가류의 애틋함 조화


  올해 접수된 시작품은 2천 편에 가까웠다. 지난해보다 배 가까이 많게 투고됐다. 시의 저변 확대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이긴 하나 다르게 보면 올 한 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로 표현하고 싶으리만큼 힘들고 스산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상당수의 시가 생활고에 젖은 내용이거나, 늙음과 관련된 쓸쓸한 감정을 많이 배출하고 있어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어두운 시대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음을 밝힌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주름의 집', '움파', '물의 건축설계도', '자연사박물관', '큐브' 등이다. 먼저 '주름의 집'은 삶의 쓸쓸함을 거미의 집에 빗대어 탁월하게 형상화한 점은 돋보였으나 삶의 문제를 너무 탐미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한계로 제기되었다. '움파'는 파의 움이 싹트는 자연적 현상의 의미를 잘 살려내었으나 표현의 신기성에 머물고 만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물의 건축설계도'는 삶의 외로움을 풍부한 감성과 사물의 참신한 형상으로 표현해내는 점이 눈길을 끌었으나 시대적 문제의식이 빈약하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었다. '자연사박물관'은 뼈 이미지의 특성을 통해 삶의 쓸쓸한 이면을 독창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점이 계속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붙잡았으나 너무 미학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점이 신춘작품으로 뽑기에 주저케 하였다.

 

    이에 비해 '큐브'는 작품 전체가 우리시대의 문제의식을 참신한 발상과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고, 무엇보다 투고된 다른 작품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가져야 할 전망에 대한 가능성이 풍부하다는 점이 장점으로 제기되었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큐브'를 당선작으로 정하였다. 당선자의 등단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한국시단의 빛나는 별이 되기를 바란다.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듯 한 편 한 편 작품을 읽어나갔다. 소재가 새로워졌다는 점, 형식을 모르는 응모자가 거의 없다는 점, 제목이 구어체로 달려 있어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 우리 생활과 가까운 노래라서 시조의 현실의식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는 점 등이 선자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특별한 개성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서정시로서 시조를 읽는 재미를 선사해주는 '벌초' '어머니의 틀니' '푸성귀 음표 피어나다' '가을 한토막' 등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당선작으로 밀기엔 조금씩 약점이 있었다. 지나치게 예스럽다거나 참신성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상이 너무 평이하고 제목과 내용이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있었다.

 

  당선작으로 정한 '봄눈'은 달랐다. 응모한 4편이 두루 고를 뿐 아니라 넘치는 가락의 묘미와 회화성 그리고 연가류의 애틋함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시인의 안목과 능력은 우리 시조시단의 한 이채가 되리라 확신하며 대성을 기대한다.

 

201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족

 

정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당선소감

詩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게로 온다

 

  여러 해 전 도시 생활을 접고 이곳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에게 온 햇빛과 바람과 풀 한 포기, 아이들과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는지를 자연에서 배운다. 그것은 소리 없이 물처럼 내게 스며든다. 어떤 과장도 억지도 없이 나를 불러 세우고 일으켜 세운다. 나는 내게 온 어떤 것도 가꿀 줄 몰랐다. 남편도 아이도 부모와 형제도 하물며 이름 없는 풀이며 벌레며 이웃들이랴. 내가 짓고 있었던 것은 시가 아니라 몽상가의 잠꼬대였고 허세였다. 내가 아닌 타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나무와 풀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마음을 읽고 나누고 드디어 그들이 되는 것, 오늘도 햇빛과 바람과 나무들의 살림살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시는 나보다 먼저 내게 닿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했다. 몸이 없던 내게 몸을 입혀 수도꼭지를 틀어 밥공기를 닦게 하고 바닥을 훔치게 했다. 밭고랑에 남아 있던 애기파가 등 뒤에 내려앉는 눈을 털어내고 있다. 주저앉아 있던 나를 애기파 한 포기가 가만히 일으켜 세운다. 시는 늘 그렇게 내게로 온다. 시를 쓰기에 앞서 언제나 정직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신 이영진 선생님, 내게 온 모든 인연들과 하나 되어 서로를 가꾸어 나가는 것이 시 쓰는 노릇임을 마지막까지 잊지 않으려 한다.

  

정신희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수상

 

 

심사평

깔끔한 표현으로 서정적 구체성·투명성 살려


  이번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많은 분이 응모해주셨다.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부쳐진 작품들을 함께 읽어가면서, 일부 작품이 만만찮은 시간을 축적한 결과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의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쏟은 사례도 많았음을 깊이 기억한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함께 주목한 이들은 모두 세 분이었다. 이혜리, 최혜성, 정신희씨가 그분들인데, 오랜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정신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혜리씨의 작품들은 감각적 장면들을 상상적으로 모자이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충격과 반응으로 연쇄해 가는 감각 운동이 진정성과 독자성과 연관성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최혜성씨의 시편은 특별히 ‘미동’이 끝까지 경합하였는데, 매우 밀도 높은 관찰과 표현이 특장으로 거론되었다.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소묘의 집중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결국 정신희씨의 ‘가족’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전언의 구체성과 깔끔한 표현, 그리고 착상과 비유의 과정이 안정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 시편은 규칙적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맹목과 위험을 동시에 지닌 관계로 ‘가족’을 파악한다. 물론 이러한 파악이 정신희씨만의 개성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당선작은 그러한 파악을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표현에서 보이는 긴장과 예각적 균열을 통해 보여주고, 나아가 ‘길’의 뒤섞임, 팽창, 멈출 줄 모르는 질주의 형상과 그것을 어울리게 하면서 서정적 구체성과 투명성을 동시에 살려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점 여러모로 신뢰를 주기에 족했다.

 

 심사위원 정호승(왼쪽) 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 
 

                                    
2016 경향 신춘문예시 부문 당선작 / 의자가 있는 골목 / 변희수                                                                                  

2016.01.01. 16:08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2016 경향 신춘문예시 부문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 李箱에게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 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당선소감

의자는 시를 낳는 성소…궁합 잘 맞는 난 행운아

 

  이 세상에는 의자가 참 많다.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지하철에도 의자는 넘쳐난다. 아니다. 의자보다는 엉덩이가 훨씬 더 많다. 내게도 늘 의자를 그리워하는 엉덩이가 있다. 가끔 시를 쓰는 대신 차라리 나무를 심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결국 나는 그 나무로 또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이제 의자와 나무가 같은 혈족이라는 걸 안다.


  오늘은 잠시 의자와 떨어져 있었고 황송하게도 누워서 당선소식을 받았다. 몽중일까. 눈을 뜨고 있어도 꾸는 꿈처럼 더듬더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본다. 여전히 내 머리맡을 지키는 의자, 이 기회에 의자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의자여! 정말 미안하다, 아니 참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더 미안하겠다.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의자를 믿고 까분다.

 

  나는 행운아다. 의자와 궁합이 잘 맞는 엉덩이를 갖고 있으니. 시를 빌미로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즐겁다. 언젠가 삐거덕거리던 시들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주는 날들이 올까. 대화는 계속될 것이고 의자는 나의 모든 시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성소다. 어떤 자세로 의자에 앉아야 할까 늘 함께 고민하는 ‘구밀’과 ‘13시’ 나의 시동지들과 행운을 나눈다. 의자에 항상 따뜻한 방석을 놓아주는 나의 가족 연, 동 그리고 남편 너무 고맙다. 심사를 해주신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그리고 손택수, 김행숙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경향신문사에도 깊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광은, 의자에게 바친다. 

  

변희수(본명 변정숙) 1963년 경남 밀양 출생. 대구 거주 | 영남대 국문과 졸업

 

 

 

심사평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아,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 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만.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과 ‘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시인 이시영·황인숙>

  

                                    
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생일 축하해 / 안지은 시창고

2016.01.0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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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일 축하해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시 당선소감] 안지은


불면에 시달린 날들 이제 푹 자고 싶어요

 

  극심한 불면증이었다. 열대야를 기르는 나날. 지옥에는 다 자란 내가 있다고 믿으며 매일을 버텼다. 내게 죄를 부여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하루에 삼켜야 할 알약이 늘어나는 만큼 내가 소화해야 할 내일이 쌓였다. 하루 열두 시간 노동을 해야 서울살이가 가능했다. 퇴근길 버스는 늘 기분 나쁠 정도로 따뜻하고, 나는 언제나 잠깐의 사람. 버스에서 내리면 가야 할 집은 있지만 정착할 수 있는 집은 없는 사람. 나는 꿈에서조차 잠이 든 척을 했다.

  이런 제게 깊은 잠을 잘 수 있도록 손을 뻗어주신 정호승, 문정희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려요. 명지대학교 김석환·이재명 교수님, 품에 넘치도록 저를 꼬옥 안아주시는 신수정 교수님, 다정한 편혜영 교수님, 감사합니다. 늘 저를 예뻐해 주시는 남진우 선생님, 부족한 제 언어에 힘을 실어 주시고 다듬어 주셨어요. 영원한 나의 캡틴, 이영주 선생님께는 언어라는 틀에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할 마음뿐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 마음 써주신 천수호, 박상수 선생님께도 감사 인사 올립니다.

  빛나는 순간에 항상 함께해준 윤수, 지윤, 주혜, 은혜, 예솔. 나의 꽃들. 앞으로도 함께하자. 나의 안식처 희정 언니, 애틋한 선화. 계속 글 쓰자. 오래오래 축하해준 태우 오빠, 고마워. 보고 싶은 민용 오빠, 인영, 보배 언니. 지원, 유경, 지애, 양정. 너희를 떠올리면 내 마음은 이미 대구야. 나보다 더 기뻐해준 지향, 보람 언니 고마워요. 건강하자, 지수. 내 대학생활의 즐거움, 흑풍. 제 시의 처음을 읽어준 선희, 혜민, 은희 언니. 용준 오빠. 명지대 시모임, 이미 나에겐 최고의 시인들. 그리고 내 영혼의 쌍둥이 우선. 내가 심해로 가라앉을 때 넌 내 산소통이었어.

  엄마, 기철. 당신들은 나의 원동력. 내가 시를 쓰는 이유. 나의 수호천사 이모, 고마워. 이모부도. 할머니, 고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당신들의 기도 덕분에 제가 숨을 쉽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제야 답합니다. 사랑해요.


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시 부문 심사평] 정호승 시인·  문정희 시인  
소통의 詩… 삶· 죽음에 대한 역설적 인식 돋보여
  

 

정호승 시인. 문정희 시인

 

  최종심까지 올라온 16명의 시 50여 편을 읽고 느낀 공통점은 '소통로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두루뭉수리여서 쓴 사람 혼자만 읽고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시를 읽게 되는 고통은 무척 컸다.

  "이전의 이후의 반물질과/ 무기체의 감각/ 물렁뼈에 속하는 밤/ 귀, 귀(鬼), 현실/ 가느다랗게 흐트러져가는 형상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대단한가."(이현정 '벽에 걸어놓은 외투는 살아 있다' 부분)

  한 예에 불과하지만 최종심에 오른 시는 대부분 시 스스로 독자의 이해를 거부한다. 현란한 기교가 난무하고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산문성이 두드러진다. 시의 심장이 은유라면 그 은유의 심장이 피를 흘리다 멈춘 듯하다. 다양성이 미덕인 시대에 그 다양성을 긍정한다 해도 지나칠 정도로 관념적이다. 마치 관념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는 서정과 구체에 뿌리를 내린 비관념적 소통의 시는 이미 낡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는 낡았든 새롭든 소통의 통로를 통해 써야 한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흐르지 않는 꽉 막힌 수도관을 통해서는 물 단 한 잔도 받아 마실 수 없다. 그동안 한국 시단은 뒤틀린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 구축된 불통의 시를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지나치게 관용하거나 방치해왔다. 행과 연 구분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필연성이 결여된 산문 형태의 시와 관념적 불통의 시가 한국 현대시의 미래라고 여기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오늘의 현상은 한국 현대시가 어떤 한계에 다다른 부정적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구어체로 이루어진 당선작 안지은의 〈생일 축하해〉는 당선작이 될 만큼 작품으로서 우수성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소통 가능한 시가 그래도 이 시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일 축하해〉는 삶과 죽음을 동질 관계로 인식한 바탕에서 쓴 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의 순간에 만나 깊은 애증의 대화를 나눈다. 죽음이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이라는, 기일이 생일이고 생일이 바로 기일이라는 이 역설적 인식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종심에서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 박은지의 〈공유지〉, 박진경의 〈다이빙〉, 이종호의 〈작은 방〉, 이현정의 〈북극점 한 바퀴〉 등이다.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며 그 언어가 지닌 구체의 본질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2016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타크나 흰 구름 / 이윤정                                                                                    

2016.01.01. 15:04

                                                         

 

[2016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타크나 흰 구름

 

이윤정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이윤정 

▲1961년 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행정자치대학원 수료 ▲커리어 컨설턴트

당선 소감

 

  몇 번의 겨울을 애벌레로 동면했습니다. 날개 달지 못한 채 셀 수 없는 밤을 어둠에서 보냈습니다. 어느 날 태양이 눈부시게 다가왔습니다. 푸른 하늘이 보이고 겨드랑이가 가볍습니다. 길었던 겨울 동안 날개를 키우며 오늘을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내 짝사랑은 이제 긴 어둠을 걷어내고 새로운 곳으로 나를 초대합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지탱하고 나를 세우는 힘을 익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늘 새로움으로 나를 채워주는 호기심과 변하지 않는 날개를 달고 푸른 하늘을 날아오를 것입니다.

 

  늦은 밤 역사에서 갈 곳 없어 서성이는 사람들을 봅니다. 종착역도 출발역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종이박스로 방을 만들어 추운 잠을 청하는 사람들. 저들도 한때는 푸른 하늘을 날았었지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쓸쓸한 풍경에 가슴이 시려 옵니다. 타크나에서 떠돌던 구름처럼 잠들지 못하고 우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닐까요. 오늘 밤 흰 구름 속에서 떠도는 사람들 모두에게 따뜻한 온기가 감싸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이 영광은 심사위원 최동호 선생님, 이시영 선생님 두 분께서 날개를 달아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세계일보사에도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든든한 반석이 되어준 용정씨, 가장 냉정한 평론가 민희, 지중해 하늘을 날면서 뜨거운 용기를 보내준 서윤, 눈빛만 봐도 마음 읽어주는 준호, 그리고 친구들. 두 눈으로 마주친 세상 모든 인연들과 오늘의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늦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마음을 다독이는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오랜 시적 연마 느껴지고 서정적 언어 돋보여

  1200여명의 응모자들 가운데 예선을 거쳐 넘어 온 30여분의 작품을 꼼꼼히 읽었다.

 

  많은 응모작 때문인지 응모자들의 수준은 향상되어 있었으며 어느 작품을 선정해야 할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일반적인 신춘문예의 수준을 넘어서는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소감이다.

 

  그럼에도 심사를 위해 다음 네 분의 작품으로 좁혀서 논의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은지의 ‘구름의 공회전’외 3편,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 외 4편, 노운미의 ‘일요일의 연대기’ 외 3편 그리고 이윤정의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 외 4편 등이었다. 
 

  이 네 분의 작품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하나를 우선적으로 선정하기가 어려웠다.

 

  각각의 장단점을 다시 살펴보고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김은지와 이윤정의 작품이 최종 심사 대상이 되었다.

 

  김은지의 작품은 시행을 밀어나가는 힘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시선이 세밀하고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시행의 압축보다는 다변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어서 시적 언어의 절제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윤정의 작품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면서 적절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 장점이었다. 우리 시단에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새로운 시인으로서의 자격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면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과 같은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어 주저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윤정의 작품을 놓고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느냐를 정하기 위해 좀 더 논의했다.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의 경우는 새롭기는 하지만 접속어가 많아 시행의 흐름이 일부 어색했고, ‘흔적의 이해’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조금 관념적이어서 구체성이 약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타크나 흰 구름’이 당선작으로 적정하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오랜 시적 연마가 느껴지는 다른 시편들의 안정감도 이런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쉽게 탈락한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시인 이시영                  문학평론가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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