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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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모음

[스크랩] 핑크 펄 23호—김영애/권순진

연안 燕安 2013. 2. 15. 00:50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대구일보 기사등록 2012.10.15 01:00

 

 

핑크 펄 23호 

 

                     김영애

 

 

 

동기의 승진 축하 모임에 참석하고

만취상태로 집이라고 찾아든 만년 과장

남편의 양복저고리를 벗기자

와이셔츠에 때 아닌 진달래꽃이 피었다

핑크 펄 23호, 이번엔 완벽한 증거물 확보다!

화르르 곧추선 손가락 총으로 타당 탕!

그는 그대로 침대에 꼬꾸라지고

화염에 싸인 방안은 술 냄새만 가득하다

 

은행나무숲에서 나눴던 입맞춤의 언약들 

사진 속 청춘남녀는 정지된 시간으로 서 있고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꾹꾹 참고 다물어 온 그 입과 입술들

멸문지화를 면한 화석의 나무에서 쏟아진

샛노란 약속과 추억들로 바닥이 소란스럽다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아내 입술은 시퍼렇고

거울 속 남자가 푸석푸석 눈을 뜬다

부러 펼쳐둔 증거물을 발견한 저, 사내

일순간 거울 속에서 튕겨져 나간다

욕실 안에서 뭐라 뭐라고 했지만

개숫물소리와 함께 흘러가버렸다

찌개는 저 혼자 부글부글 끓고 있다

                —월간 『우리시』 201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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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와이셔츠를 물에 담그려다 말고 아내는 일부러 보란 듯이 찍어놓은 것 같은 젊은 여자의 립스틱자국을 발견하고서 화가 치밀었다. 어떤 ‘년’의 것일까? 예감이 빠르게 스치면서 온갖 추측과 상상으로 머리를 꽉 채웠다. 그러나 마음은 바늘구멍처럼 좁아들었다. 소파에 길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남편에게 대밀었다. 남편은 쓰윽 한번 보더니 그게 뭐냐고 되묻는다. “뭐긴 입술자국이잖아, 누구 꺼야?” “그게 왜 거기 묻었지, 오늘 전철이 유난히 복잡하더라니, 밀려서 살짝 묻었나보지 뭐”


이럴 때 아내들은 어떻게 대처하나. 드라마에서 보면 하늘을 찌를 듯 화를 내며 남편을 쥐 잡듯 족쳐서 살살 빌고 설설 기도록 굴복을 시키던데 모든 아내가 그만한 기가 살아있고 그런 역량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일부러 화를 내자니 열 적고 그냥 넘기자니 배알도 없는 여자 같아 “흥, 내가 알 게 뭐람” 한마디 쏘아 붙이고 마는 아내도 있고, 화는커녕 셔츠에 묻은 립스틱자국이 안 지워지면 어쩌나 걱정을 앞세우는 아내도 있다.


시에서 ‘핑크 펄 23호, 완벽한 증거물’을 첨부해온 남편의 경우는 정황상 여자가 시중을 드는 술집에서 묻혀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처하는 아내는 “여보, 다음부터는 옷에 립스틱 안 묻도록 주의해서 노세요. 이거 빨래해도 잘 안 지워지거든요” 나긋나긋한 애교가 살아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라 해도 내 보기엔 그에 버금가는 너그러운 대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겨우 ‘손가락 총으로 타당 탕!’ 격발한 게 고작이고 ‘은행나무 숲에서 나눴던 입맞춤의 언약들’을 떠올리며 잠시 입술이 시퍼렇게 변한 것이 전부이다.


민망해서 욕실로 잠시 도피한 남편의 중얼거림은 ‘개숫물 소리와 함께 흘러가버렸’고, 아내의 속은 찌개가 ‘저 혼자 부글부글 끓고 있’듯 그렇게 끓었다가 마는 것이다. 크게 싸워봤자 내 손해고 자칫 가정의 평화만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 정도에서 끝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참거나 져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게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 도리 때문에 그만한 것쯤은 인내하고 연민하며 용서하고 이해하며 산다.(권순진 시인)

출처 : 시에/시에문학회
글쓴이 : 황구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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