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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시조새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이상의 ⌜날개⌟ 중에서 나는 믿는다 날개가 생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대구일보 기사등록 2012.10.15 01:00 핑크 펄 23호 김영애 동기의 승진 축하 모임에 참석하고 만취상태로 집이라고 찾아든 만년 과장 남편의 양복저고리를 벗기자 와이셔츠에 때 아닌 진달래꽃이 피었다 핑크 펄 23호, 이번엔 완벽한 증거물 확보다! 화르르 곧추선 손..
바다 속에 잠든 고래가 된다 외 1편 이현채 악세레이터를 밟으며 서해로 간다 언제 들어도 좋은 칸소네, 라디오에서는 밀바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영(無影)으로 떠도는 바람을 따라 악세레이터를 밟는다 장롱 속에서 반지잠을 자다가 멀뚱한 눈으로 방부제 가득한 생..
오르간 함기석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 누구의 익사체일까 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 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 파도가 모래해변으로 나와 하얀 혓바닥으로 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게들이 하늘을 본다 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원을 그리..
통뼈 / 정선 그의 말에는 관절이 달렸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리바리한 말이 비호감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중용의 법칙이다 조금 전까지 내 손을 들던 그도 우정까지 상해가며 상사의 눈에 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어머니 병원비도 모자라고..
늙은 마라토너의 기록 외 4편 / 박일만 출발도 도착도 아닌 지금은 철저히 혼자다 늘어가는 나잇살로 가능성을 점쳐 보지만 신기록은 요원하다 재기를 위해 목숨을 건 몸만들기 모자 눌러쓰고, 운동화 끈 동여매고 새벽에 출발, 이슥하여 돌아온다 온몸에 어둠을 칠하고 귀가하는 나이 막..
적독(積讀) 양문규 시루떡 같은 책이 큰방 책장 가득 쌓이고 윗방 이불장 위에 책상 위에 켜켜 쌓이고 주방 식탁 위에 그릇처럼 쌓이고 사랑방 내려앉은 툇마루 위에 햇살과 손잡고 쌓이고 세탁기 골골 돌아가는 소리 위에 화장실 좌변기 물통 위에 똥내를 풍기며 쌓이고 현관 신발장 위..
잘 죽은 나무/마경덕 나무의 소원은 잘 죽는 것.천수를 누리고 고사목이 되느니 잘 죽어 다시 태어나는 것, 부활은 모든 나무의 꿈이다. 다발 다발 책으로 묶인 뒷산 산닥나무, 고집 센 산딸나무 도마는 온몸에 칼자국이다. 비염을 앓던 오동나무주유소 오동나무는 소원대로 거문고가 되..
우수한 조작 양해열 수퇘지는 새끼 때 불알을 떼버린다지. 그래야 고린내가 사라진다고. (나도 가끔 당신 몰래 토란 두 알의 안부를 주무르곤 해.) 아예 묵은 김치 맛과 녹차향이 나는 삼겹살을 잔뜩 매단 퓨전돼지를 사육하면 되겠네 뭐. 유전자 섞기 놀음으로 떼돈을 벌어봐? 밀과 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