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현대시모음 (217)
벌레의 숨결
반경환의 명시감상 2 ----이재무의 「테니스 치는 여자」에 대하여 테니스 치는 여자는 물 속 유영하는 물고기 같다 그녀의 동작은 단순하지만 매우 율동적이다 물 오른 그녀의 종아리는 자작나무의 허리처럼 매끄럽다 땀 밴 등허리에 낙지발처럼 와서 안기는 햇발 통통, 바람 많..
열매를 닮은 꽃은 없다 꽃 필 때 목련은 눈이 없다. 하얀 플라스틱 같은 잎사귀에 저 목련의 향기 나는 울음 꽃은 해에게 눈을 다 빼주고 나서야 열매를 닮을 수 없다는 것을, 지난 해의 울음을 기억해 내지. 흔든 것에 흔들리는 울음이 있다면 계절을 우두둑 꺾어 불탔던 기억이 있는 꽃들..
201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이미화 -허氏의 구둣방/이미화- 발 끝에 달을 달고 저녁 강을 건너고 있는 허氏 구름처럼 떠돌았으므로 그의 생은 한쪽만 유난히 닳은 구두처럼 삐뚜름하다 그의 구두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옥봉동 산 1번지 아파트에 조등처럼 별이 걸릴 때 저녁하늘..
2010 경남신문, 영남일보,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허氏의 구둣방 - 경남신문 이미화 발 끝에 달을 달고 저녁 강을 건너고 있는 허氏 구름처럼 떠돌았으므로 그의 생은 한쪽만 유난히 닳은 구두처럼 삐뚜름하다 그의 구두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옥봉동 산 1번지 아파트에 조등처럼 별이 걸..
신춘문예 그 허(虛)와 실(實) 폐(廢)타이어(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물북 김선태 저수지 속에는 아무래도 저수지 속에는 손가락으로 가만 건드리기만 해도 바람의 입술이 살짝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입을 점점 크게 벌리는 그런 예민한 여자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여자가 커다란 물북을 끼고 앉아 한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세게 ..
물때를 읽다 신덕룡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이제는 노을이 낸 길을 따라 돌아가야 한다. 양손에 하루치의 품삯을 들고 발목을 잡아끄는 뻘과 뻘을 떨쳐버리려는 굽은 등의 싸움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노란 비옷과 물신과 고무줄로 단단히 여미고 조였던 무장이 천천히 해제되는 저 ..
악어를 위하여 진은영 자 덤빌 테면 덤벼봐 악어는 정글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다 복병처럼 숨어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세상이여 나의 납작해진 뒤통수를 보아라 질척질척한 늪, 진흙 속을 뒹굴며 헤엄치다 가끔 열려 있는 하늘 위로 홀로 비상하는 것들을 보면 악..
지하철에서 만난 여자 -물결의 안팎 장승리 역삼동을 가려면 이리로 가는 것이 맞나요 그렇다는 대답을 서너 차례 듣고서도 또다시 묻는 여자 역삼동을 가려면 이리로 가는 것이 맞나요 검은 뒤통수들이 뱉어 놓은 가래침이 여자 얼굴 위로 흥건하다 물결이 될 수 없어 아픈 여자 바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