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스크랩] 열매를 닮은 꽃은 없다 /이미화 시인 본문
열매를 닮은 꽃은 없다
꽃 필 때 목련은 눈이 없다.
하얀 플라스틱 같은 잎사귀에 저 목련의 향기 나는 울음
꽃은 해에게 눈을 다 빼주고 나서야 열매를 닮을 수 없다는 것을, 지난
해의 울음을 기억해 내지.
흔든 것에 흔들리는 울음이 있다면
계절을 우두둑 꺾어 불탔던 기억이 있는 꽃들은 눅눅한 재가 되고나서
도 바람을 재연하듯 날리지.
색色이 들춰지는 바람의 순간이 있다.
검은 꽃잎은 없지만 검은 열매는 있다
눈을 먹은 꽃잎과 얼음을 먹은 열매가 있다
흔드는 것들은 흔들린 색만 얻을 수 있듯 꽃들은 단단한 허공에 귀를 대
고 유언비어의 화기花期를 살지
바람은 서 있는 일이 없어 한 방향의 그늘로 얼굴을 삼거나 비린 맛으
로 입에 들거나 흰 이빨처럼 그악하거나.
울퉁불퉁한 이빨자국이 선명한 꽃의 목덜미가 다 떨어지고
목련은 옷 벗은 일로 울고 이것을 열매 맺는 일이라고 하지만 꽃은 눈이
모자라서,
모자라서 그 울음을 다 울 수 없다.
시인의 말
비가 그치고, 웅덩이에 비친 그림자에 가만히 마주 앉아본다. 바람이 지나가고 찰랑 움직이는 것은 유리그림자. 어쩌면 시와 마주하는 것은 이런 예민함일 것이다. 수없이 흔드는 것을 흔들리며 바라보다. 언어는 도살되고 미래는 넓게 텅 비어 있다. 오지 않아도 오는 것들을 기다리다.
풍경은 자신의 본성을 알고, 그 본성의 본성을 알기에 언제나 쉼 없이 흔들리고 있다. 모든 불안은 이 흔들림을 먹고 살듯이 그것이 나일지도 몰라 흔들려 본다.
이런 흔들림 안에 방 하나 갖기 위해 시를 쓴다.
이미화 2011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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