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반경환의 명시감상 3----최금녀의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에 대하여 본문
반경환의 명시감상 3
----최금녀의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에 대하여
나무마을로 간다
키가 큰 잣, 리키타, 상수리, 느릅
그 아래 작은 집 한 채씩 짓고 사는
산뽕, 갈메, 산죽, 다릅
이 겨울 나무마을은
하나같이 독한 마음으로
머리털 깎고 선방禪房에 들어갔다
눈도 그 동네 눈은 참선을 한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땅으로 내려와 가부좌를 튼다
깎지 못하는 머리털을 이고
나는 나무마을로 간다
비탈진 쪽으로 뿌리 버팅겨 섰던
뿌리의 등허리, 흙 밖으로 불거졌던
등 시린 나무
이 추위 어떻게 지내는지,
중심은 아직도 탄탄한지
작년 봄, 옆구리 여기저기에
링거 줄 매달고 중환자였던 고로쇠나무,
입춘은 가까워오는데 또 어쩐다?
오늘 눈이나 마음 푸근하게 쏟아져
여린 싹들도 눈이불 다 덮어주고
관자놀이에 심줄 돋은 뿌리와
못자국이 험한 고로쇠도
푹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선방 나무들도 동안거 해제解制하고
숲으로 뛰어나와 두 팔 벌리고
하늘이 내려주는 복을 받으며 기뻐하리라.
----최금녀,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저 분홍빛 손들?, 문학아카데미, 2006년) 전문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언어 예술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언어는 우리 인간들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수단이며, 언어가 없다면 우리 인간들의 역사(문명과 문화)는 가능하지가 않게 된다. 시인은 언어의 예술가이며, 예술가 중의 예술가이다. 낙천주의란 무엇인가? 낙천주의란 이 세상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향유할 수 있는 사상을 말한다. 우리는 시가 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삶을 극복하고, 또,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시의 사회적 기능에는 종교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그리고 축제적 기능이 있다. 시의 효과에는 진정제 효과와 강장제 효과, 그리고 흥분제 효과와 영생불사의 효과가 있다. 시의 사회적 기능과 시의 네 가지 효과에 대하여는 나의 ?행복의 깊이? 1, 2, 3권을 참고하여 주기를 바란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며, 그 질문에 대한 단 하나의 모범답안이 마련된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도 부재하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도 부재한다. 랭보의 말대로, ‘이 세상에 험 없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듯이, 형이상학이란 그 결핍을 극복하려고 생겨난 학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형이상학이란 초월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며, 그 형이상학을 토대로 하여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그리고 모든 신화와 종교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신은 전지전능하고 영원불멸의 존재이며, 우리 인간들은 무능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천국은 신성한 장소이며, 대지는 더럽고 누추한 장소이다. 따라서 우리인간들은 존재의 결핍과 그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제물을 올리고,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천국을 상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는 행복에의 약속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행복한 삶은 가능하지도 않고, 이 세상의 삶을 즐겁고 기쁘게 향유할 수 있기는 커녕,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삶만이 계속 진행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대부분의 형이상학자들이나 사제 계급은 물론, 반형이상학적 기치를 내걸었던 하이데거마저도 ‘존재의 결핍’과 ‘무’를 ‘악’으로 단정해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존재의 결핍’과 ‘존재의 유한성’을 ‘악’으로 단정해온 것이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한계였다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꾸로 ‘존재의 결핍’이 삶의 이유가 되어주고, 또한 ‘존재의 유한성’이 삶의 이유가 되어주었던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존재의 결핍과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꿈과 희망을 부여해주고, 그 주체자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결핍을 모르며, 언제, 어느 때나 영원불멸의 삶만을 살아가는 신은 불행하고 또 불행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최금녀 시인의 시적 경향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전적인 세계이며, 나머지 하나는 현대적인 세계이다. 고전적인 세계에서는 우리 인간들의 아름다운 삶을 옹호하고, 현대적인 세계에서는 문명의 利器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우리 인간들의 존재의 기원을 찾아나선다. 「감꼭지에 마우스를 대고」, 「사이버 속의 그를 만나러 간다」, 「맛보기 강의」, 「내 몸에도 바코드가 있다」는 현대적인 세계이며, 「저 분홍빛 손들」, 「야생차를 마시며」, 「물드무」,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는 고전적인 세계이다. 최금녀 시인의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는 그의 ‘자연주의’가 가장 아름답고 빼어나게 승화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때의 자연주의는 에밀 졸라류의 더러운 자연주의도 아니고, 장 자크 루소류의 자연주의도 아니다. 그의 자연주의는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인간화시킨다는 점에서는 인문주의에 가깝고, 그러나 그 인간중심주의의 사악함을 버리고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지워버린다는 점에서는 자연주의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자연주의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과 우리 인간들의 삶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낙천주의 사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모든 사상도 행복에의 약속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우선 최금녀 시인은 ‘산’이나 ‘숲’으로 간다고 하지 않고 “나무마을로 간다”라고 시적으로 노래하며 첫 연을 시작한다. ‘키가 큰 잣, 리키다, 상수리, 느릅, 산뽕, 갈메, 산죽, 다릅’은 그 나무마을의 구성원들이며, 그 나무들은 그들 나름대로 크고 작은 집을 짓고 살아간다. 첫연이 “나무마을로 간다”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해 있다면, 제2연은 시인의 사유의 깊이에 치중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사유의 깊이는 “이 겨울 나무마을은/ 하나 같이 독한 마음으로/ 머리털 깎고 선방禪房에 들어갔다”라는 시구에서 알 수가 있듯이, 입산속리(入山俗離)하여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는 수도승들의 정신 세계에 맞닿아 있다. “이 겨울 나무마을은/ 하나같이 독한 마음으로/ 머리털 깎고 선방禪房에 들어갔다”라는 시구는 제일급의 시인만이 쓸 수 있는 비수와도 같은 표현이며, 그 內攻의 깊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3연은 그 비수와도 같은 시적 표현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마치 옛날 이야기하듯이, “눈도 그 동네 눈은 참선을 한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땅으로 내려와 가부좌를 튼다”라고 노래를 한다. 한겨울 나무마을은 모든 죄악이 말갛게 씻어지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행복한 마을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죄 많은 속세에 파묻혀서, 또는 그 죄 많은 속세에 미련이 남아서 “깎지 못한 머리털을 이고”, “나무마을로” 가게 된다. “깎지 못하는 머리털”은 선방에 들어간 나무들이나 참선을 하는 “눈”에 대비되어 시적 화자의 자기 반성과 부끄러움이 묻어나는 시구이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무마을로 간다”라는 시적인 표현은 비록, 잠시 잠깐이지만 속세의 때를 씻고 티없이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겠다는 보살님의 마음에 맞닿아 있다. 따라서 최금녀 시인은 어느 새 대자대비한 보살님이 되어서 제5연과 제6연에서는 “비탈진 쪽으로 뿌리 버팅겨 섰던” “등 시린 나무들”과 “작년 봄, 옆구리 여기저기에/ 링거 줄 매달고 중환자였던 고로쇠나무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 궁금증은 대자대비의 측은지심과 시인의 이타적인 사랑을 뜻한다. 독한 마음으로 선방에 들어간 나무들이나 참선을 하는 눈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등 시린 나무와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서 중병을 앓고 있는 고로쇠나무에게도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보살이 되고, 보살이 부처가 된다. 따라서 그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제7연과 제8연에서는,
오늘 눈이나 마음 푸근하게 쏟아져
여린 싹들도 눈이불 다 덮어주고
관자놀이에 심줄 돋은 뿌리와
못자국이 험한 고로쇠도
푹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선방 나무들도 동안거 해제解制하고
숲으로 뛰어나와 두 팔 벌리고
하늘이 내려주는 복을 받으며 기뻐하리라.
라고, 만물의 축복을 기원하게 된다.
최금녀 시인의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라는 시를 읽으면서, 나는 존재의 결핍과 존재의 유한성은 모든 사물들과 우리 인간들의 축복 자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존재의 결핍과 존재의 유한성이 없다면 어느 누가 독한 마음으로 선방에 들어가겠으며, 그리고 또한 어느 누가 출가수행을 결심할 수가 있겠는가? 그 존재의 결핍과 존재의 유한성이 得道의 욕망을 불러 일으켜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아껴주고 사랑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꿈, 희망, 사랑, 기도, 축복, 소원, 추억, 슬픔, 기쁨, 우울, 쓸쓸함, 유쾌함, 불쾌, 불안, 공포, 연민, 초조 등은 존재의 결핍과 존재의 유한성과 관련이 있는 말들이며, 그 말들은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는 말들인 것이다. 존재의 결핍과 존재의 유한성은 ‘악’이 아니라 ‘선’이며, ‘하나님의 은총’ 그 자체인 것이다.
존재의 결핍과 존재의 유한성의 토대 위에서 모든 종교와 신화가 탄생하고, 또,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만이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이 가능해진다. 최금녀 시인의 「한겨울 나무마을에 간다」라는 시는 대자대비한 시인의 천성과 함께,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형이상학적인 삶을 선사해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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