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반경환의 명시감상 4----이영식의 「休」에 대하여 본문
반경환의 명시감상 4
----이영식의 「休」에 대하여
대포항
방파제 위에 늘어선 즉석 회 센터
붐비던 시간 한풀 꺾이자
허리에 묵직하게 둘렀던 전대,
고무장갑 벗은 과수댁 담배 한 개비 꺼내 문다
생선함지박 비린내 밀쳐놓고
회 치던 손가락 사이로
휴
깊이 빨아들였다 내뿜는 구름계단
갯바위에 파랑친다
관광객 등살에 잔뜩 웅크렸던 조가비들
슬며시 문 열고 손 내민다
축축하고 짭조름한 삶, 서로 안부 확인한 뒤
팔을 거두는데
씨부럴 것들
요로콤 개좆같이 생겨 워쩌자는 겨
개불 허리 톡톡 쳐서 일으켜 세우는
과수댁의 굴 껍질 같은,
休--
----이영식, 「休」(?애지?, 2006년 겨울호) 전문
이영식 시인은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이후, ?공갈빵이 먹고 싶다?, ?희망온도?라는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지만, 그러나 그는 대쪽같은 장인정신으로 무장을 하고,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위하여 쾌속 진군 중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탁월한 도덕감각을 지녔고, 또, 그리고, 풍자와 해학의 시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休」에서처럼 서술자의 입장에서 그 대상을 사실적이고도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묘사력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제3자의 입장에서, 대상과의 ‘미학적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언어의 렌즈를 ‘동해의 대포항’에다가 그 초점을 맞춘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포항/ 방파제 위에 늘어선 즉석 회 센터”, 즉, “고무장갑을 벗은 과수댁”에 그 초점을 맞춘 것이며, 그리고 그때는 “붐비던 시간이 한풀 꺾이고” 마침내 “과수댁”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문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시간은 잠시 하던 일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는 ‘休’의 시간이며, “생선함지박 비린내 밀쳐놓고/ 회 치던 손가락 사이로/ 휴”하고 깊은 한숨을 내뿜는 시간이다. 휴식의 시간은 잠시 자기를 돌 볼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러나 그 시간은 과수댁의 한숨만이 저절로 새어나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과수댁은 존재론적 근거가 위태로운 위기의 여인이고, 이때의 담배 한 대는 어렵고 힘든 삶을 진정시켜주는 마취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담배 한 대는 그녀의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간절한 그 한숨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해주고 있는 데, 왜냐하면 그녀의 한숨이 어느새 “구름계단”이 되어서 “갯바위에 파랑”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과수댁의 한숨이 구름계단이 되어서 갯바위에 파랑을 칠 때, 바로 그때, 시인의 언어의 렌즈는 그 과수댁의 모습을 뒤로 밀쳐내고 그녀의 생선함지박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녀의 생선함지박에는 수많은 조가비들이 들어 있고, 그 조가비들 역시도 그 「休」의 시간을 이용하여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관광객 등살에 잔뜩 웅크렸던 조가비들/ 슬며시 문 열고 손 내민다”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주고, 또한 “축축하고 짭조름한 삶, 서로 안부 확인한 뒤/ 팔을 거두는데”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시인은 서술자로서, 오직 ‘미학적 거리’만을 유지할 뿐, 절대로 그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어느 누구의 편을 들지는 않는다. 시인은 오직 냉정하며 그 미학적 구조를 단 하나의 불협화음이나 튀는 말들을 배제한 채, 극적인 구조로 이끌어 나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관광객들의 등살에 잔뜩 웅크렸던 조가비들이 슬며시 문 열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는 데, 그러나 이제는 시인의 언어의 렌즈가 다시금 그 과수댁에다가 그 초점을 맞추게 된다. “씨부럴 것들/ 요로콤 개좆같이 생겨 워쩌자는 겨”는 과수댁의 천하 제일의 명언이며, 이 「休」의 공간을 아주 다의적인 공간으로 이끌어 올리는 명언이기도 한 것이다.
“개불 허리 톡톡 쳐서 일으켜 세우는/ 과수댁의 굴 껍질 같은/ 休”는 사내의 품과 사내의 그것이 그리운 과수댁의 심술과 질투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씨부럴 것들/ 요로콤 개좆같이 생겨 워쩌자는 겨”는 입속말이면서도, 뜻밖의 말실수이기도 한 것이다. “씨부럴 것들/ 요로콤 개좆같이 생겨 워쩌자는 겨”는 절대로 더럽고 추한 것에 대한 비난이나 거부의 말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거꾸로, 사내의 그것이 그리운 과수댁의 간절한 그리움의 말이기도 한 것이다. 쾌락원칙은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고, 현실원칙은 욕망을 억압하여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짓을 삼가려고 한다. 전자는 ‘이드심리학’으로 설명되고 후자는 ‘에고심리학’으로 설명된다. 과수댁은 사내의 품이 그립지만, 그러나 그녀의 도덕감각은 그 욕망을 한사코 억압한다. “씨부럴 것들/ 요로콤 개좆같이 생겨 워쩌자는 겨”가 입속말일 때는 타인들이 전혀 들을 수가 없다는 점에서 혼자만의 은근한 말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이 시인의 언어의 렌즈에 포착되었을 때는, 바로 그때에는 입속말이 아닌 말실수인 것이다. 꿈이, 몽정이 억압된 욕망의 무의식적인 충족이라면, 말실수는 그 억압된 욕망이 표출된 기제인 것이다. 과수댁의 입속말도 무엇보다도 그리운 사내의 그것에 맞닿아 있고, 또한 그녀의 말실수도, 말실수만이 아닌 무엇보다도 그리운 사내의 그것에 맞닿아 있다. 무한 정진 중인 수도승에게 춘화의 주인공이 되어서 달라붙는 성모 마리아상, 또, 그리고, 순결을 맹세한 비구니에게 거대한 남근이 되어서 달라 붙는 부처님의 초상----.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 인간들의 성적 욕망에 비추어 얼마나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말인가? 하지만 과수댁의 비극은 더욱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순결을 맹세하지도 않았고, 또 그리고 사내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패륜적인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원론적인 말에 지나지 않으며, 일부일처제와 이 세상의 사회적 윤리 의식은 과수댁은 과수댁답게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정숙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수댁에게 남편이 없다는 것은 이중적인, 아니, 삼중적인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첫 번째는 성적욕망이 충족될 수 없는 고통이며, 두 번째는 생활현실의고통이며, 세 번째는 아이의 아버지로서, 또는 교육자로서의 남편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이다. 첫 번째의 성적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고통은 신경쇠약과 강박증과 히스테리로 이어지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신분열증의 그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성적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 때문에 신경쇠약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또,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착으로 강박증이나 히스테리로 이어질 수도 있다. 두 번째의 생활현실의 고통은 부부간의 협업과 분업의 관계가 파탄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남편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활비는 물론, 어렵고 힘든 일을 떠맡아야만 하고, 아내는 아이를 낳고 기르며, 집안의 살림을 떠맡아야만 한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대포항/ 방파제 위에 늘어선 즉석 회 센터”에서처럼,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또한 남편이 없다는 것은 “생선함지박 비린내 밀쳐놓고/ 회 치던 손가락 사이로/ 휴”하고, 한숨을 내뱉아야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休」의 전면이나 그 행간 속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休」의 이면과 그 한숨의 본질적 의미 속에는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또는 아이들의 교육자로서의 남편이 없다는 사실이 아주 깊이 있게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고,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다. 어머니는 그 자식이 어떠한 죄----그것이 비록, 살인, 강도, 강간 같은 범죄일지라도----를 지었을지라도 한결같이 그 자식을 감싸주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자식이 죄를 지으면 너무나도 가혹하게 벌을 주고, 그리고, 이와는 정반대방향에서, 그의 자식이 만인의 귀감이 된다면, 자기 자신의 상속자로서 더없이 후한 상----왕위의 승계같은----을 주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의 양육에 알맞는 사랑이고 아버지의 사랑은 자식의 교육에 알맞는 사랑이다. 「休」의 과수댁, 아니, 그 어머니의 어렵고 힘든 삶과 그 한숨을 생각해볼 때, 그녀의 자식들이 제대로 사랑을 받고 훌륭한 인물들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100%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자의 ‘休’는 “1 쉴휴(暇息也), 2 아름다울 휴(美也, 善也), 3 기쁠 휴(慶也), 4 겨를 휴(暇也), 5 물러갈 휴(退致仕), 6 넉넉할 휴(有容), 7, 죄를 놓을 휴(宥也), 8 검소할 휴(儉也), 9 그칠 휴(止也)”의 뜻이 담겨 있으며, 또한 그것을 국어사전적인 의미로 정리한다면, “1 쉬다, 2 그치다, 중지하다, 3 편안하다, 4 기뻐하다, 좋아하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영식의 「休」의 의미는 아름답고 넉넉하고, 편안하고 검소하며, 또한 그만큼의 즐거움과 기쁨의 의미가 없고, 오직 휴식과 한숨과 휴업의 의미만을 띠게 된다. 제2연의 ‘휴’는 휴식과 한숨의 ‘휴’이고, 제4연의 ‘休’는 휴식과 한숨과, 그리고, 그 사타구니(성적욕망)의 휴업을 뜻한다. 이처럼, 한글의 ‘휴’와 한자의 ‘休’를 동시에 다르게 사용한 것은 이러한 말의 미묘한 차이와 함께, 그것의 말놀이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한글의 ‘휴’는 한숨의 소리가 되지만, 한자의 ‘休’는 한숨의 소리가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제2연의 ‘휴’와 제4연의 ‘休’를 동시에 다르게 표기했으면서도, 시의 제목을 「休」로 정한 것은 제목의 「休」 속에는 휴식과 한숨과 휴업의 의미가 다같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영식 시인의 「休」는 어느 과수댁의 삶의 애환과 고통을 노래한 시이면서도, 그리고 그 작품은 시인의 대쪽같은 장인정신이 낳은 걸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일찍이 “作爲만 있고 行爲가 없으며”, 그리고 “신변잡기”( 「백치시인 1」)에 파묻힌 채, 대쪽같은 장인정신이 없는 대한민국의 현대시인들을 가장 날카롭고 예리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나는 이러한 이영식 시인의 대쪽같은 장인정신이 우리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으로 이어지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내 머리맡에 놓인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불알 두 쪽은 달렸는데 남자가 없다, 대쪽 같은 기개가 없다
한때는 사상이니 이념이니 더운피 개천에 풀어 저잣거리에 이름값이라도 한 모양인데, 요즈음은 신변잡기 파리채 놀음이나 다름아니다.
作爲만 있고 行爲가 없다, 활어(活語?)라면 살 저며 등뼈 내놓고 초고추장이라도 튀어야 할 게 아닌가
가끔 언어를 비틀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성찬을 베풀기도 하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개다리소반에 찬밥이다
시인의 모자를 쓰고 보니 어깨가 자꾸 움츠러든다, 걸음 걸음이 조심스럽고 그림자조차 더 낮은 곳으로 눕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되어간다, 목 비틀린 채 땅바닥에서 헛바퀴를 돌고 있는 외뿔풍뎅이다
세상의 저녁, 어느 한 불빛이 내 시를 읽고 있는가? 우리가 상한 날개 껴입고 헛춤을 추는 것은 아직도 추락할 꿈이 남아 있음이라.
----이영식, 「백치시인 1」(?희망온도?, 천년의 시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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