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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센티멘탈 쟈니 박인환 주말 여행 엽서......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원정(園丁)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 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세월은 관념 ..
나 살다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
둘이 합쳐지는 곳엔 언제나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늦은 밤 쿵쿵 발자국 소리와 새댁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 마음 섞는 일이 전쟁이다 우루루 우루루 가슴 밑바닥으로 바위 구르는 소리..
멜론 이현채 멜론을 먹은 사람이 멜론을 먹고 싶은 사람을 찾아 <이상의 집>으로 간다 멜론을 전혀 닮지 않은 여자들이 멜론 콤플렉스에 빠져 마음의 오감도를 보여 주자 멜론을 먹은 사람이 멜론을 먹고 싶은 사람을 찾는다며 멜론 모양을 해 보이니 멜론 콤플렉스에 빠진 여자들이 ..
ⓒ 박정원_ 주목나무 열매 안장鞍裝 (外 4편) 이돈형 엄마는 불을 지피고 불은 타다 남은 무늬를 여 닫으며 내 눈망울을 양 갈래로 땋아 주었다 아궁이는 엄마의 불만 피우다 아궁이를 태우고 쉬는 시간 종소리를 베껴왔다 한동안 나는 종소리를 외우다 종소리의 종鐘이 되어 달리면서 수..
사랑이 나가다 - 손 이야기 1 이문재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의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
첫사랑 문성해 마당에서 비눗물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애의 퉁퉁 불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점심 전이었고 삼촌 방에선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담장 밖 돼지우리에선 산달을 앞둔 커다란 몸이 뒤척이는 소리 아무래도 흘러나오는 것들이 유독 많았던 그 날 내 몸에..
극장에서 고경숙 비가 억수로 퍼붓던 주말 빗속에서 자연스레 묶여지는 짝짓기 놀이 협립, 신광, 닥스... 상표별로 색깔별로 끼리끼리 길게 늘어선 우산 속 여기저기서 땅콩처럼 사소한 대화들 우산 끝에 뚝뚝 떨어졌다 검표원에게 걸러지자마자 빨려들듯 도망치듯 빠르게 흩어져 더듬더..
반경환의 명시감상 1 ----유홍준의 「문맹」에 대하여 펄프를 물에 풀어,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하느님같다 흰 눈을 내려 세상을 문자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조물주같다 티 없는, 죄 없는 순백 無化의 길...... 더욱 완전한 백지에 이르고자 없애고 없애고 또 없애는 것이 제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