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스크랩] 안장鞍裝 外 4편/ 이돈형- 해설 황정산 본문
ⓒ 박정원_ 주목나무 열매
안장鞍裝 (外 4편)
이돈형
엄마는 불을 지피고
불은 타다 남은 무늬를 여 닫으며
내 눈망울을 양 갈래로 땋아 주었다
아궁이는 엄마의 불만 피우다
아궁이를 태우고
쉬는 시간 종소리를 베껴왔다
한동안 나는 종소리를 외우다
종소리의 종鐘이 되어
달리면서 수화놀이에 끼어들었다
달리기는
숨을 밀어낼 때마다 제자리에 멈췄고
엄마는 기울어가는 젖꼭지에서
연신 새로운 모양의 풍선을 날렸다
그때
문득, 그러니까 말言처럼
나는 엄마를 잃어 버렸다
지나가는 엄마들의 젖꼭지에서는
쉬는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엄마는 어느 해변에서 불을 지피는지
물어볼 때마다
쉬운 짝짜꿍만 알려주었다
짝짜꿍, 짝짜꿍
나는 달려가다
젖지 않는 엄마를 그려볼까
엄마의 아궁이에서 까만 눈썹을 꺼내오자
땡 땡 땡
쉬는 시간 종소리가 울리고
일일연속극은 채널마다 방영되고 있었다
물의 중심
떨어지는 물의 중심은 전면에 있다
흐르기 위하여 온 중심을 전면으로 밀고 있는
물의 안간힘
물들은 중심을 전면에 두고 흐른다
멈출 수 없는 화두를 지닌 물의 숙명
저 폭포를 지나온 물은
능청스럽게 뼈들을 감추고 있다
뼈마디 마다 길들의 속성을 저장해놓고
밟히고 구겨져도 흩어지지 않기 위하여
중심을 전면에 두고 낙하하고 있다
어느 날 물의 광대뼈에 새겨진
가부좌를 튼 물의 눈을 본적이 있었다
탯줄자국처럼 움푹 패인 곳에 박혀있던 물의 눈
나는 스스로 떠나온 유배지에서
물의 눈을 맞이하듯
폭포 속으로 달려들었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밀려오는 파도의 전면처럼
떨어지는 폭포의 전면처럼
물은 그렇게 제 몸을 밀고 나갈 때 비로소 흐름이 되고
물이 되어 흐른다는 것은
내어 준 길을 무리 없이 따라 나서는 것
쉼 없이 응하는 것
투척처럼 떨어지고 있는 폭포 아래에서
흐름을 멈추고 와해된 나의 위태로움이
하얗게 질린 몸으로
다시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오직 손사래만 칠 줄 아는 흔들리던 중심을
내가 밀고 온 길의 목차들을
장대비처럼 물에게 따라주고 있다
나의 물관은 아직 상투적이지 않았으므로
막창, 막장
빈 호주머니도
큰 우주라고 휘저으며
아무렴 배고픈 사랑도 사랑이겠지
휘휘 젓다보면 웃음보 하나쯤 터져주겠지
허허虛虛
재래시장을 찾아간다
긴골목은다채울수없는내장이었고나는골목의막창쯤에서걸어들어갔다
덤은 심심찮게
거진거진 산 노파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살아있는 것들은 죽을 수 없어서
죽어있는 것들은 죽음의 흔적마저 없애려고
알뜰하게 삶과 죽음을 사고파는 재래시장 통
요행의 덤으로 살아온 나는
죄송하게, 죄송하게
격렬하게 살다 간 고등어, 물오징어, 돼지머리의
부릅뜬 두 눈들을 알현謁見하고 있다
저 강인한 눈들 앞에
방석 깔고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어진 나는
이생의 장터 막장쯤에 서있었다
멀뚱멀뚱한 내가 가려워지고 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참 어려운 일과다
사과나무가 붉어지는 시간까지
새가 날아갈 때 새똥은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떨어진다
새똥이
사과의 얼굴로 떨어질 때
사과나무는
열매의 뿌리이며
사과의 주인행세를 하여도 된다
사과의 꿈이
붉음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늘 망설이다 개꿈만 꾸고 있는 구름을
진압하는 동안
사과는
새의 무리 속에서
새파랗게 똥을 싸고 있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스승의 마지막 말씀처럼
꿈을 챙기는 일이란
주문이 밀린 피자가게를 서성이다
맨 끝에서
긴 행렬의 눈치를 보는 일과 같았다
한동안
사과는 새파랗게 익어 갈 것이고
사과나무는 붉을 대로 붉어질 것이다
다음에
꼬리는
마지막 감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난간의 웃음들을 떼어 내가며
스마일한 스타일을
변기통속에 집어넣고 물을 내렸다
방문객들은 일렬로 세워
달의 리본으로 쓰기로 하였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앉아
귀뚜라미 울음소리로 맥주를 마셨다
리본이 마음에 들 때까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귀를 자르기도 하였다
우리가 내는 화음은
아무도 들어본 적 없어
누구의 귀도 의심하지 않기로 하였다
서로가 서로를 마실수록 우리는 흘러내렸고
가끔씩은 몸을 포개가며
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나의 결혼식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줄을 서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의 비누처럼
우리의 꼬리는 흘러내리는 예언에만 흔들기로 하였다
우리가 늘 ‘다음에’ 있듯이
- 『애지』2013년 봄호
* 이돈형 : 충남 보령 출생. 2012년『애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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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힐링
- 이돈형의 시세게
황정산
최근 힐링이라는 말이 대세가 되고 있다. 그만큼 치료할 일이 많은 세상이라는 뜻일 게다. 삶이 복잡해지고 인간관계가 다양해지면서 거기에서 상처받을 일도 많이 생기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렇게 받은 대부분의 상처는 쉽게 치료된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온 상처는 그 자극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면 서서히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쉽게 치료되지 않는 근원적인 상처가 있다. 그것은 상실감에서 오는 마음의 상처이다. 자신의 가치나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렸을 때 또는 의지했던 신념을 포기해야 할 때 느끼는 상실감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근원적인 상처가 된다.
이돈형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 상실감에서 연유한다.
요행의 덤으로 살아온 나는
죄송하게, 죄송하게
격렬하게 살다 간 고등어, 물오징어, 돼지머리의
부릅뜬 두 눈들을 알현謁見하고 있다
저 강인한 눈들 앞에
방석 깔고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어진 나는
이생의 장터 막장쯤에 서있었다
멀뚱멀뚱한 내가 가려워지고 있다
- 「막창, 막장」 부분
시장통 막창집 골목을 들어서면서 느끼는 심정을 재미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시인이 느끼는 삶의 무목적성이 바로 막창 또는 막장에 서있다는 느낌으로 표현되고 있다. ‘고등어’나 ‘물어징어’만큼도 격렬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돼지머리에 있는 두 눈보다도 더 세상을 부릅뜨고 바라보지 못했다는 회한이 거기에 서려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 회한마저 격렬하게 토로하지 않는다. 마지막 구절의 ‘멀뚱멀뚱한’이라는 표현이 시인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 세상의 의미 없음이 세상을 멀뚱하게 바라보게 할 뿐이다. 그리고 단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픔도 고통도 아닌 가려움을 통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냉랭한 상실감은 사실 그 어떤 상처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다음 시의 상실감은 좀 더 근원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귀를 자르기도 하였다
우리가 내는 화음은
아무도 들어본 적 없어
누구의 귀도 의심하지 않기로 하였다
서로가 서로를 마실수록 우리는 흘러내렸고
가끔씩은 몸을 포개가며
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나의 결혼식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줄을 서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화장실의 비누처럼
우리의 꼬리는 흘러내리는 예언에만 흔들기로 하였다
우리가 늘 ‘다음에’ 있듯이
- 「다음에」 부분
우리의 삶은 연기됨의 계속이다. 우리의 존재도 의미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목적도 사실은 모두 지금 여기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다음에’ 연기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이 ‘다음에’라는 말로 평생을 견디고 ‘다음에’라는 말로 자신을 위안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음에 있기에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고 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줄을 서서 화장실을 기다리는 것처럼 결혼식마저 줄을 서서 내 결혼식이 아닌 남의 결혼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줄을 서서 다음에 있는 행복을 기다리지만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이러한 상실감에서 온 마음의 깊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가치를 항상 생각하고 내 주위의 삶에 항상 따뜻한 눈길을 주는 것으로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얻게 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혜민스님이나 김난도 교수의 말들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하지만 이 근원적인 상실감은 이런 힐링의 언어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따뜻한 언어들이 삶의 근원적인 상실감을 더 깊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뜻함만으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돈형 시인은 전혀 다른 방식의 힐링을 모색하고 있다.
투척처럼 떨어지고 있는 폭포 아래에서
흐름을 멈추고 와해된 나의 위태로움이
하얗게 질린 몸으로
다시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오직 손사래만 칠 줄 아는 흔들리던 중심을
내가 밀고 온 길의 목차들을
장대비처럼 물에게 따라주고 있다
나의 물관은 아직 상투적이지 않았으므로
- 「물의 중심」 부분
이 시에서처럼 이돈형 시인은 자신을 투척하는 폭포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다. 상처를 어루만지고 다스리고 그것을 없는 것처럼 만드는 힐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목차들을 ‘장대비처럼 물에게 따라주’는 방식으로 치유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던지는 방식이다. 자신을 던져 흐르는 물처럼 다른 것이 되게 하는 방식이다. ‘위태로움이/ 하얗게 질린 몸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상처와 상실감을 안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는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어쩌면 오래 전에 김수영이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쓰기 방식이기도 하고 니체가 원하던 초인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나의 물관은 아직 상투적이지 않았으므로’라는 마지막 구절이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모든 이념이나 가르침이나 규범들은 그것이 세상을 규정하는 한 항상 상투성을 피할 수 없다. 그 상투성으로 사람들은 안심하고 또 위안을 받는다. 대부분의 힐링은 이 상투성을 내면화하여 상투성을 받아들임으로써 특별한 마음의 상처를 무화시키려 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 상투성을 거부하고 상처와 그 근원을 형성하고 있는 상실감을 자신의 삶의 동력으로 밀고 나간다. 그것이 이돈형 시인의 힐링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만이 할 수 있는 강인한 방식이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스승의 마지막 말씀처럼
꿈을 챙기는 일이란
주문이 밀린 피자가게를 서성이다
맨 끝에서
긴 행렬의 눈치를 보는 일과 같았다
한동안
사과는 새파랗게 익어 갈 것이고
사과나무는 붉을 대로 붉어질 것이다
- 「어느 측면에서 보면」부문
우리들의 꿈이란 사실 ‘긴 행렬의 눈치를 보는 일’과 같이 상투성의 연속이다. 세상이 쳐놓은 그물에 갇혀 세상이 원하는 삶을 기획하고 세상이 마련한 이러저러한 방책으로 힘겹게 겨우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 꿈마저 빼앗아 요즘 젊은 세대들을 ‘삼포세대’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을 뒤집어 보고 싶어한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사과는 새파랗게 익어’ 간다. 대신 사과나무가 붉어진다는 것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라는 꿈을 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과라는 꿈을 우리가 다시 싱싱한 푸른 색으로 되돌릴 때 사과나무라는 세상이 익어가는 꿈을 시인은 꾸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을 힐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힐링한다.
* 황정산 :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발표.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시발표, 저서로는 『주변에서 글쓰기』가 있다.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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