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스크랩] 늙은 마라토너의 기록 외4 / 박일만 본문
늙은 마라토너의 기록 외 4편 / 박일만
출발도 도착도 아닌
지금은 철저히 혼자다
늘어가는 나잇살로 가능성을 점쳐 보지만
신기록은 요원하다
재기를 위해 목숨을 건 몸만들기
모자 눌러쓰고, 운동화 끈 동여매고
새벽에 출발, 이슥하여 돌아온다
온몸에 어둠을 칠하고 귀가하는 나이
막판까지 뛰어야 한다는 다짐만 늘어간다
한때의 영광은 묻혀진지 오래
팬들의 갈채도 이제는 기억조차 하얗다
어떻게든 맞바람을 깨고 기록갱신 해야 하는
몸은 점점 늘어지고
아득한 기록이 앞서가며 나를 따돌린다
달려본 사람만이 아는 저승같은 골인지점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좌우명에 땀 절은 짧은 팬츠로 왔다
단 몇 초의 기록 단축도 억겁과의 싸움이다
반환점을 돌아도 한참을 지나 온
저무는 길은 또 가파르고
아침부터 뛰어 여기에 당도했으나
변변한 기록하나 건진 게 없는 나이
생을 바쳐 달려온 두 다리만 기진할 뿐,
초행길
잘 못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잘 죽고 싶다고 했다
- 살아 가 본 길도 길이거니와
죽어 가는 길도 초행길이다 -
불현듯 몸속으로 날아 든 최후의 통첩
정말 반듯하게 죽고 싶다고 했다
생의 보따리를 싸라는 신의 호명, 의사의 전언
이승의 외출을 마치고 가는 외통수 길에
홀로 마음 밝혀 앞세우셨다
육신은 무너지는데, 정신은 외려 날이 서는데
완곡한 덩어리만 커져갔으니
이내 다가올 긴 여정을 준비하셨다
서둘러 하던 일을 파하고
이승의 그리운 끈을 거둬들이고
허깨비처럼 꺼져가는 숨결에 근근이 불지펴가며
인연의 꼬리를 모두 잘라 작별을 만드셨다
되돌아보면 산다는 건 한 편의 곡절을 낳는 일
저어함 없이 스스로를 수습해 떠나는 일
그래도 참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백부께서는
쭉정이만 남아가는 왜소한 몸으로
삶의 무거운 끝을 온전히 끌어안고
아름다운 기억들도 함께 묻어 달라,
고 하셨다
* 초행길 : 살아서 혹은 죽어서 처음 가는 길
경전
낚시꾼이 수면을 읽는다
물속을 종일 해독하는 중이다
페이지를 수 없이 넘겨도
바닥에 깔린 진리는 좀처럼 깨달을 수 없어
번번이 물고기만 오리무중이다
물빛이 눈부신 건 그 아래에
무수히 많은 표리가 있기 때문일 것인데
무엇 하나 세상에 능통할 혜안도 없고
숨겨져 있는 문장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다
얼마나 읽어내야 할 삶인지
이 나이 먹도록 한 줄도 깨달은 게 없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잡고기마저 놓치는
낭패감만 안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응시하는 세상의 물빛 눈부셔! 눈부셔!
그 마저도 제대로 섭렵하지 못하고
온 생을
겉표지만 해독하고 있을 뿐인
나는,
투잡
가세가 기울자 아내가 떠났다
쫓겨 다니기 일쑤인 노점상
공치는 날 많아 억장이 무너져갔다
일용직, 트럭운전까지 거쳤는데
빚으로 시작한 장사마저 넘어갔다
공사판에서 얻은 고질병, 쌓여가는 약봉지
공과금 독촉장 수북한 우편함
집주인의 잦은 호출에 철렁인다
쪼그라드는 심장,
잡초처럼 자라나는 아이들
등 떠밀어 학교로 보내고
밤낮없이 뛰어도 구멍만 커져가는 형편
거친 일로 손과 팔에 흉터만 늘어갔다
틈틈이 야근을 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적빈한 몸 추스려 나선 대리운전
낭떠러지에서 붙잡은 운전대마저 비틀댔다
소속도 없이 단신으로 발품팔고 나섰으나
허탕만 치는 저 사내, 중년 가장
헐렁한 거리에서 허름하게 호객을,
봄꽃
만나자마자 몸부터 섞자는 꽃이 있었다
계절도 풀리지 않아 좀 이른 것 아니냐는
성급한 것 아니냐는
나의 항거에도 무차별 향기로 파고드는
바야흐로
여몄던 옷 단추 풀리고 물 차오르는 때
여기저기 새들을 호명하며 피는 꽃들이
대지를 녹이고, 사지를 한껏 벌려
한번 앉아 보라고
누워서 가슴에 귀를 대보라고 재촉하는
봄꽃 이었다
나는 좀 망설였으나 이내 익숙해졌다
서로에게 전염돼가는 계절은 속사포 같아서
몸에 깃들 겨를 없이 꽃 지고 잎 돋고 하였다
세상 모든 사람의 애인인 꽃
지상의 젖꼭지를 살짝 깨물며 터지는
꽃은 늘 첫 마음으로 피었다
몸피 말랑말랑한 봄꽃
[ 시인의 에스프리 ] -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것도 생의 장르다
나의 시 속에는 사람들의 비웃음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해서 다 우수한 작품은 아니라는 힐난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온몸으로 품고, 쥐어짜고, 난도질을 해봅니다만 타고난 재능은 남의 얘기 일 뿐입니다. 시작은 창대하나 결말은 대개가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속이 타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럴수록 시는 나에게 튼튼한 멍에를 씌웠습니다. 꼼짝없이 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시는 나에게 절대적인 우위의 지배자이기도 합니다. 언어의 빈곤, 상상력의 한계, 소재 포착 능력의 한계성 등등이 스크럼을 짜고 나를 옭아맸습니다. 한동안 허우적거리기도 했습니다. 그 속에서 불행 중 다행으로 언어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운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가는 계단이 되었습니다. “그래 사랑해야지! 어쩔 수 없다면”, 어둡고 긴 운명의 터널 속에서 드디어 나는 시와 교합했습니다. 팍팍한 삶에 찌든 어두운 터널 속에서 찾아 낸 환희의 불씨였습니다.
상급학교에 진학 할 형편이 못되던 나는 청소년기 대부분을 공장노동자 생활로 보냈습니다. 철야를 하면서 금성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시낭송을 들으며 비로소 가슴 속이 더워짐을 느꼈고, 날마다 밤이 깊어지길 기다려서 온몸을 기울여 듣던 감정, 그 묘한 울림들이 내 유일한 놀이의 결과였습니다.
우연히 손에 들어 온 괴테의 시집이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등에 기대면서 내 사춘기는 우울 속에서 막연한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굳이 운명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운명은 한번 매달려 보라고 종용 합니다. 바짓가랑이라도 잡아 보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뒷걸음에 쥐라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주야장천 붙들고 있습니다. 변변한 유전자 하나 지니지도 못했으면서 애걸복걸 하는 형국입니다. 시는 잘 토라지는 여자 같아서 비위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나의 시 쓰기 습관은 상당히 태만합니다. 치열함도 없습니다. 순간적인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한참을 끙끙거려야 합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품어야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첫 시집을 출산한 후 사람들의 생활을 면밀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누구는 좋은 현상이라 하고 누구는 경계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술은 감동만을 추구한다’ 라고 배웠습니다. 그 배움이 틀리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예술은 장르에 관계없이 결국 향유자들에 대한 감동 전달이 목적이라는 말이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그립습니다. 감정이 먼저 악수를 청합니다. 그 속에서 늘 갈증을 느끼며 산다는 게 나에게는 행복이자 불행이기도 하고,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 운명을 나는 사랑합니다.
<늙은 마라토너의 기록> 이 시대의 가장들은 외롭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혼자서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가족과 가정을 지키려는 가장들의 분투, 조기 명퇴자들의 양산, 과거에 화려했던 기록은 평가절하 되어 기록은 남으나 사람은 남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골인을 해야 하는 책무에 가장들은 잠을 설칩니다.
<초행길> 살아서나 죽어서나 처음 가는 길은 낯설고 두려울 것 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 경건해 질 수 있는 힘은 아마도 자신의 삶에 대해 초탈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운명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정리해 나가는 자세는 존경스러운 면모 입니다.
<경전> 세상은 복합적 입니다. 그리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시행착오적 삶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내면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러므로 뒤늦은 깨달음도 아름답습니다. 곧 인생일 것입니다.
<투잡> 현대화 될수록 사회적 모순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함께 가는 것이 아닌 각자의 노력만을 강요합니다. 양극화가 심합니다. 인간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이 갈수록 피폐해 집니다. 곤궁한 생활로 인해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모순이 만연된 사회, 혼돈의 시대, 사회적 기초 구성단위인 가정의 파탄, 금전만능 의식이 판을 쳐 보편타당한 삶이 위협받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봄꽃> 삶이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탄생하자마자 곧 죽음을 향해 돌진합니다. 그렇다고 염세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때 우리는 짧은 삶속에서 진정성 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시도 이 처럼 온 마음을 기울여서 운명처럼 피워내야 하겠습니다.
<시와소금, 2012.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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