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2월의 시모음 본문

현대시모음

2월의 시모음

연안 燕安 2013. 2. 12. 21:54

통뼈 / 정선

그의 말에는 관절이 달렸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리바리한 말이 비호감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중용의 법칙이다
조금 전까지 내 손을 들던 그도
우정까지 상해가며 상사의 눈에 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어머니 병원비도 모자라고
애들도 학원에 보내야 된다고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
변명의 법칙이다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면서 그는 웃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너도 진급에서 밀려나 봐
합리화의 법칙이다
이부장, 조금 손해 보더라도 굽히고 들어가 봐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박전무가 책상을 친다
그럼 맘대로 해! 대신 책임지도록
권위의 법칙이다
내가 믿는 건 나다
이것은 통뼈의 법칙이다
성질 좀 죽여요
아침에 아내는 말했다
나는 20년간 다닌 직장을 잃은 적이 있다
서류를 집어던지고 간부실을 나온다
내 안에서 통뼈가 부서진다
나도 아버지다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2011년 천년의시작


증오를 위한 변명 / 정선

내 내력의 무게는 48.9킬로그램
연민 29킬로그램과 눈물 11킬로그램, 희생 5.2킬로그램과 인내 3킬로그램
그리고 증오 0.7킬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거푸집이다
복숭아뼈 속에 연민이 웅크리고 늑골마다 슬픔이 가로눕고
광대뼈는 희생으로 볼록하고 엉치뼈에는 인내를 달고 다녔다
뼈들은 얼기설기 집을 만들었다
감기몸살로 누운 지 사흘째
요즘 들어 때 없이 웃었고
마음 없는 말들을 지껄였다
햇귤에도 군침이 돌지 않는다 실은
몸을 지탱하고 있던 거푸집은 증오의 등뼈들
아버지는 서랍 속 집문서를 챙겨 능소화 여인과 여행을 떠났다
친구는 서랍 속 파레트와 물감을 훔쳐갔다
열네 살 때 난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아버지 서랍은 남겨두세요 왜 매달리지 못했을까
내 꿈을 돌려줘 왜 말하지 못했을까
0.7킬로그램의 증오를 밀치고
29킬로그램의 연민이 들어앉을 때 나는 껍데기
몸은 아직 포용하기에는 무리다
더러운 놈, 등 돌린 친구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아버지라뇨? 어림없어요
애면글면 제 종족을 퍼뜨리겠다는 듯
방가지똥은 찬서리에도 씨앗 달고 블록 틈새 붙박았다
일어나야겠다
나를 먹여주고 길렀던 이 환장할 증오
번식하라 나의 착한 씨앗들!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2011년 천년의시작

느리게 가는 귀 / 정용화


영안실 옆 풀밭
달팽이가 느리게 기어가고 있다

사람이 죽어도 귀의 감각은 남아있어
운명하셨습니다, 라는 의사의 말을 듣는다는데

눈, 코, 입 그리고 손발까지
모두 열반에 들었는데
귀하나 달랑 남아, 아니 온몸이
귀가 되어 듣게 되는 마지막 소리,
슬피 우는 가족들 울음소리 아니면
유산을 놓고 싸움질하는 자식들 소리
혹은 물기 묻은 한숨소리
어떤 소리라도 둥글게 말아 들여
깊은 곳에 모아두지 않을까

귀는 호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위로가 되는지 묻고 싶다,
차라리 깊은 산사의 처마 끝에 울리는 풍경소리나
가득 담아가면 어떨까

달팽이가 여전히 풀밭을 기어가고 있다
누군가의 귓속에 살던 달팽이가 아닐까
세상의 마지막 소리를 무겁게 등에 짊어지고
열반을 향하여 천천히 천천히 가고 있다

시집 <바깥에 갇히다> 2008년 천년의시작

의태 계절 / 정와연

의태무늬들은 유실이 많은 쪽으로 색깔이 닮는다
빨리 도망가는 색깔
시행착오 끝 마지막으로 택한 문엔 파리가 달라붙는 통증이 있다
보호색이란 보호 받지 못한 쪽이다

교란채색,
몇 개의 모습으로 한 몸에 산다
위胃는 몸 밖에 있어 숲 한 채를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분주한 머리는 꼬리 쪽에 버리고 싶은 생을 둔다
제 스스로 제 몸의 생사를 옮길 수 있다는 것
그 자리에서 산등성이의 자락이 된다는 것
천적의 눈에 들어갔다 나온 적이 많다
아니, 천적의 눈으로 오래 살았다
날씨는 개의치 않지만 몇 개의 은폐로 단추를 만든다
수시로 기하학적 허방을 만든다는 것
의태의 계절엔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

무늬로 만든 허구의 독毒, 적을 피해 허기를 채우는 것이 내 생이 없다고 생각한 생을 산다

잎을 떨어뜨리고 죽은 척하는 겨울나무
동작을 멈춘 듯 겉장을 얼린 겨울강
변온의 표정으로 한겨울 주변이 된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내심을 갈아엎는 무리도 있다
의태의 계절에서는 그 무리를 이방인이라 한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탁란 / 김추인
-행성의 아이들· 11


뻐꾹 꾹 뻐꾹
어미가 제 이름을 부르고 있다
눈도 안 뜬 제 새끼에게 이름을 가르치고 있다

꾸욱 꾹 뻐꾹
기억하거라 뻐꾹이다
작고 물색모를 뱁새 , 오목눈이가 아니다
그래도 오목눈이의 국어로 보채거라 뻐꾹

털도 안 난 것이
불룩한 눈두덩이로 무얼 짚어보기는 보는 건지
한사코 기를 쓴다
한 알 한 알 어깨밀이로 오목눈이의 알을 업어
둥지 아래로 밀쳐낸다

옳지 옳지 뻐꾹
그것이 세상이니라 뻐꾹
영 너머 나뭇가지에 앉아
애타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온산을 흔들고 있다

시집 <행성의 아이들> 2012년 서정시학


불통不通을 어루만지다 / 정지우

곱슬머리의 해석은 흘러내리는 방식, 양의 울음과 황소의 뿔로 저녁을 넘어가야한다
벽에서 태어난 이 독보獨步는 문이 없다

돌돌 말려나오는 모습이 꼭 웅크렸던 흔적이다
그렇다면 적당한 예열의 시간을 씌우면 우리도 곱슬거리는 고집을 얻을 수 있다
끌고 가는 힘과 버티는 간극에는 온도가 필요하니까

겨울을 뚫고 나온 봄은 고집이 세다
구불구불한 힘은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고 흘러내리지
고집이 옆에 없어서 외롭습니까
옆에 놓인 충고는 구길 필요가 없고 바람은 그 첫 번째 관용어로 속담이 되지
계단은 집안의 구름입니까
레일 위의 기차를 닮아가고 있는
옹고집에도 친교의 설화가 전해오고 흘러든 계약의 부족은 앉은 자리에 풀이 돋지 않았다지
불통不通을 어루만지는 오빠의 청춘에도
엉킨 증상이 몰려있지
아침마다 일직선으로 펴지만 길이는 똑같지

돌아보지 않고 넝쿨줄기는 올라간다
고집은 마주보는 구조, 흐르는 방향으로 완성되는 물의 파마 같은 물살
봄의 기온으로 물소리가 흘러간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어깨에서 잘려나간 양의 울음 혹은 황소의 뿔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납작한 모자 / 정지우

공터의 그늘을 꺼내며 천막이 들어선다
소년은 아코디언의 마지막 행렬
한 세기의 분위기는 코끼리 뒤에 숨겨서 올 때도 있고 마을에 남기고 갈 때도 있다지
헐기도 좋은 농담을 풀어내는 입구로
동네 아이들이 모여든다

지붕을 얹고 얼굴을 바라보는 구도에서
유랑의 주소는 웃음 혹은 여름의 박수로 되돌아온 곳이지

한 번쯤 빌려 쓰고 싶은 납작한 광대모자
길고양이의 울음이 눌려있다가
장미꽃으로 튀어나오는 건 기후의 주문일까
방목된 사자의 갈기는 삼백 년째 불타고 있는 중이라지
소녀의 곡예로 여백을 채우는 일
얼굴에서 웃음과 긴장을 벗겨내는 방식으로
구름에서 빗방울은 흩어진다

흙먼지는 바람의 먼 후일, 분장은 훼손된 뒤의 풍경
낮과 밤은 서로 흉내내기 좋은 계절을 두고
등불은 조금씩 사라져가는 그림자를 비추고
축제는 나무 속으로 허물어지는 바람이거나 햇살이겠지
마을의 소녀들이 중세를 닮아가는 곳
오후의 그늘조차 서커스를 따라가고 신발 한 짝이 지난밤을 걷는다

코끼리 등에 앉은 소녀가
아코디언 연주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낙과 / 정와연

낙과를 파는 코너에 길게 줄서 있는 사람들
낙과를 사기 위해 줄이라니
마치 과일나무 밑을 두리번거리듯
수풀을 헤치듯 서 있는 사람들
옛말에 낙식은 공식이라 했는데
어떤 마음이 저리 길어 파치 앞에 기다리고 있나
모두 한번쯤 낙과였던 기억이 있다는 듯
체온이 묻은 낙과를 손으로 받아보았다는 듯
줄을 서있는 태풍의 끝,
쓱쓱 닦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한 사람이 한 봉지씩 들고 얼굴이 환하다
낙과는 색이 변한 부위가 가장 물렁하다
물렁한 부분은 빠른 속도로 변한다
모두 자신의 물렁한 부분을 알고 있다는 듯
한 번 더 물렁한 부분을 만져보겠다는 듯
즐거운 배급,
한 사람이 열 개라면 열사람이면 백 개
위로하는 사람보다 위로 받는 사람이 그 배수倍數다
붉어지다만 낙과들이
그 어느 것보다 오늘은 상품上品이다
한낮의 위로의 줄이 길다
태풍의 긴 머리채가 휘감았던 나무 밑
굴러 떨어져 멍이 든 것들
아삭아삭 풋것 베어 무는 소리를 생각하면
그맛,
위로의 맛일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겠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샌들의 감정 / 정와연

그것은 엉키는 방식에 따라
수십 가지의 무늬로 바뀐다
여름엔 숨고 겨울엔 나타나는 맨살의 감정이 있다
부푼 발등과 바람의 방향, 그리고 햇살의 끈
강풍의 힘으로 멀리 갔다 오는 여행이 있다
끈을 엮어 장식을 만드는 것은
매듭을 지나온 것들이지만
한철 풀리지 않고 감기는 줄기는 고집이 질기다
풀어지지 않는 매듭을 얻고
끊어지는 부분을 허락했다
작두콩들이 줄기를 신고 보폭을 재며 걷는다
잘려진 전파와 달팽이무늬
흩어지기 직전의 비행선을 풀어
가시와 소음을 골라내는 방식
코사지가 있는 것들은 나팔꽃줄기를 애용하고
거미줄은 몇 끼 식사를 보관해 둔다
옥수수껍질로 밑창을 깔고 그 수염을 꼬아서
발목을 두르면 하모니카 소리가 난다
매미는 갈라진 뒤꿈치를
날개로 감싸고 여름 한철을 운다

겨울의 장식인 맨발을 여름에 신는다
가장 앙상한 미학,
여름에 끊어지지 않던 줄기들
겨울바람은 툭툭 끊어지기 일쑤다
겨울은 샌들이 쉬어가는 계절
샌들은 나무에서 내려와 줄기가 된
진화론을 가지고 있다
겨울이면 샌들은 다 운동화 끈으로 바뀐다
원피스 감정 밑엔 샌들의 감정이 있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부러짐에 대하여 / 윤의섭

죽은 나무는 저항 없이 부러진다
물기가 사라질수록 견고해지고 가벼워지고
아마 죽음이란 초경량을 향한 꼿꼿한 질주일 것이다
무생물의 절단 이후는 대개 극단적이다
잘려나간 컵 손잡이는 웬만하면 혼자 버려지지 않는다
강철보다 무른 쇠가 오래 버티었다면 순전히 운 때문이며
용접 그 최후의 방편은 가장 강제적인 재생 쉽게 주어지지 않는 안락사
수평선 너머 부러진 바다와 구름 사이 조각난 낮달
나는 네게서 얼마나 멀리 부러져 나온 기억일까
갈대는 부러지지 않는다지만 대신 바람이 갈라지고 마는 걸
편린의 날들은 사막으로 치닫는 중이다
이쯤 되면 버려졌다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부러질 때가 있었던 것이고
서로의 단면은 상처이기 전에 폐쇄된 통로일 뿐이라고
둘로 나뉘었으므로 생과 사의 길을 각자 나누어 가졌다고
조금 더 고독해지고 조금 더 지독해진 거라고
부러지고 부러져
더는 부러질 일 없을 때까지 부러진 거라고

<애지> 2012년 겨울호



바다를 작업하다 / 김남수

그 남자의 작업실에 바다가 산다 섬들을 벽마다 정착시키고 가끔 물새 소리로 파도를 가른다 섬들 열고 닫는다

어제는 풍도를 열었는지 바람소리 갯고동 소리가 계단에 흥건하다 벽돌담을 기웃거리던 풍선초 손목이 한 마디 굵어진 것을 보면 저 작업실엔 밤새 떠돌이 섬들이 모여들어 자정의 바다를 손질했나보다 뻘 묻은 발자국 수북한 네 평 바다,

지난겨울 삐걱이는 달세에 셔터를 내리자 수평선을 앞세우고 달려온 새벽 안부가 빙판에 엎질러졌다지 언젠가 물길 따라 흘러든 맨발의 여자 한 다라이 쏟아놓고 간 갈매기 울음도 파도 한 척 몰고 들이닥친 사내 달빛 묻은 하소연도 제 몸에 저밀 뿐, 바다는 파문 한 줄 기록하지 않았다

출렁이는 세파에도 젖지 않고 몽돌처럼 둥글어진 그 남자의 낡은 바다, 어둠이 내리는 비릿한 골목에 등대로 떠 있다

시집<장미가 고요하다> 2012년 시안


나침반 / 강영은

복사꽃 진다 볕뉘에 피었던 복사꽃 진다 바람 한 점에 겹겹 허공, 천길 벼랑 너머 천랑성 뜬다

사나운 별빛에 물어뜯긴
복사꽃 되는 일도 복사꽃을 바라봄도 저무는 봄밤의
명주바람 탓, 실낱같은 바람은 꼬리를 숨기는데

돛을 단 별자리가 몸을 트는 저녁은 남쪽이 멀다
복사꽃 지는 마음은 삿대가 짧다

꽃이 진다는 건 지나간 별의 방향을 묻는 일

별의 방향만 읽어내는 꽃인 것처럼
당신에게 가는 길이 그러했으니
몸속에 별자리를 묻은 나는 자석이어서

안개 낀 밤에는 뱃속에서 새가 울었다
가수알바람 부는 흐린 밤에는
쇠가 된 가슴에서 거북이가 기어 나왔다

꽃 지는 남쪽이 그리운 건 무슨 까닭인가.

시집<풀등, 바다의 등> 2012 문학 아카데미
계간 <다층>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 BEST 10

<다층> 2012년 겨울호

민무늬 시간 / 이상협

극장에서 태어나 극장에서 죽은 자의 일생은
영화일까 여의도 일그러진 전파 속으로 새는
반 토막 질문을 물고 지났다

나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눈은 켜두었다
섬은 뜬소문을 모았다 강 너머에는 메아리로 떠돌았다

광장이 사라진 후 새는 새로서 내게 오지 않는다
하루에 깃털 하나 한 달에 부리 한 개
새의 조립법을 나는 모른다 울음을 끼우고 날갯짓을 이을 뿐
새는 새에게로 멈춰 있지 않다

가을이 가파르다 버려진 어항에 물줄들 눈금을 센다
라디오엔 여러 개의 주파수가 다녀간다
아버지로부터 시간이 흘러들고 어머니로부터 문을 겪고
나에게로 멈춰 있지 않은 나는 누구일까

어떤 나라에서 새에 관한 뉴스는 금기다
해는 바람의 입김대로 밝다 어둡다 했다

동쪽 하늘은 방패연처럼 당겨진다
날짜변경선이 부푼 하늘을 가라앉히고
새떼는 서쪽으로 떠나며 밤을 켠다

평생 눈을 감고 산 사람은 장님일까
어둠이 어두운 순서대로 몰려왔다

<시와 사상> 2012년 겨울호


오후의 지퍼들 / 배옥주

지퍼를 열자 여자들이 쏟아진다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수다들
아이들이 쏟아지고 남편들이 쏟아지고
루비똥이 쏟아지고 포르쉐가 쏟아지고

엘콘도파사 속으로 빨려가 회오리치는
수다들의 향연
왼쪽으로 저었다가 오른쪽으로 저었다가
도덕이 쏟아지고 애인이 쏟아지고
주상복합단지가 쏟아지고 콘도가 쏟아지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 '오후 3시'
나른한 평화가 쏟아진다
저마다 속내 하나씩 지퍼 안에 감추고
벌어진 지퍼를 닫을 줄 모르는 지퍼들
에스프레소를 삼키며 재개발이 쏟아지고
마키아토를 저으며 주식이 쏟아지고

창밖엔 지퍼를 열어
오늘의 갈매기들을 날려 보내는 수평선
원피스 속, 어제보다 뚱뚱해진 다리를 감춘 채
오후 3시의 지퍼를 열고
우아하게 걸어 나가는 지퍼들의 뒷굽

시집 <오후의 지퍼들> 2012년 서정시학



소 / 최창균

우황 든 소는 캄캄한 밤
하얗게 지새며 우엉우엉 운다.
이 세상을 아픈 생으로 살아
어둠조차 가눌 힘이 없는 밤
그 울음소리의 소 곁으로 다가가
우황주머니처럼 매달리어 있는 아버지
죽음에게 들킬 것 훤히 알고도
골수까지 사무친 막 부림 당한 삶
되새김질하며 우엉우엉 우는 소
저처럼 절벽울음 우는 사람 있다
우황 들게 가슴 치는 사람 있다
코뚜레 꿰고 멍에 씌워 채찍 들고서
막무가내 뜻을 이루려는 자가 많을수록
우황덩어리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 많다
우황주머니 가슴에 없는 사람
우엉우엉 우는 소리 귀담지 못한다.
이 세상 소리 내어 우엉우엉 울지 못한다.


민물 / 고영민

민물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약간 미지근한
물살이 세지 않은
입이 둥근 물고기가 모여사는

어탕집 평상 위에할머니 넷이 나앉아 소리 나게 웃는다
어디서 오는 걸까, 저 민물의 웃음은
꼬박 육칠십 년,
합치면 이백년을 족히 넘게
이 강 여울에 살았을 법한

강 건너 호두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인다
긴 지느러미의
물풀처럼

어탕이 끓는 동안
깜박 잠이 든 세 살 딸애가
자면서 웃는다
오후의 볕이 기우는 사이,
어디를 갔다 오느냐
이제 막 민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아가미의 아이야

<시인동네> 2012년 겨울호


우주인 2 / 김기택

몸무게 없는 몸으로 그는 검푸른 창공에 홀로 떠있습니다. 깊디깊은 허공에 익사하여 온통 부력만 남은 무중력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벌어진 입과 귓구멍 콧구멍에 무한을 가득 채운 채 끝없이 투명한 공기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막힘없이 펼쳐진 하늘에게 목 졸리고 숨구멍 막히고 팔다리 결박되어 우주 쓰레기들과 함께 떠돌고 있습니다. 놀란 입을 벌리고 눈을 허옇게 뒤집고 있는 공포는 아직도 우주선에서 조난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영혼과 천연 방부제가 배합된 우주 공기는 오래 묵은 미라를 칭칭 감아 하늘 높이 별처럼 띄워놓고 있습니다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 2012년 문학과지성사


아침 / 문태준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하였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 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서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픽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시집 <전쟁광 보호구역> 2012년 지혜사랑


가위 / 최태랑


두 개의 쇠붙이 엇눕혀 한 쌍인 가위
갈라놓는 본성에 두 쪽이 난다
늘 무엇인가 자르려고 입을 벌리는 가위
상반된 두 날이 서로 등을 비비는 순간
양편으로 나뉜 빛과 어둠,
양변의 길이만큼 상처를 남긴다

자르지 못해 녹이 슨 습관
도박과 담배를 가위로 잘라볼까
숱한 맹세와 다짐만
예리한 가윗날에 잘려나갔다

가위가 선택한 어느 수반에는
푸른 피를 토하고 죽은 꽃들이 서있고
가위가 다녀간 사과나무는 상처위에 꽃을 피웠다

남겨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에
길들여진 차갑고 냉정한 가위

때로는
태반을 잘라 새로운 생명을 얻기도 한다

<리토피아> 2012년 겨울호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년 창비


아궁이의 취향 / 김현희

불을 살리고 죽이는 힘은
장작이 아닌 아궁이의 힘

차곡차곡 나무를 쌓아올려 엉성한
피라미드를 만든 후
신문지 반 쪽으로 불의 출발을 알린다
불꽃을 왕성하게 하거나 사그라지게 하는 건
오로지 아궁이의 마음
숨쉬기 좋은 햇빛 맑은 날이면
유순한 불길 순한 불씨도
바람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덩달아 여기저기
사나운 꽃을 피워 올린다
장작이 숨긴 작은 습기에도
숨통을 닫아버리는 아궁이의 생각은 건조하다
굴뚝으로 역류된 바람에 왈칵
삼키지 못한 울분을 뱉어버리는 불구멍
볏짚 아카시 소나무 잔가지들 한 아름 밀어넣어도
불같은 뚝심을 뚫어야만
불 맛을 볼 수 있는 가마솥과 아랫목
아궁이가 좋아하는 바싹 마른 소나무
입맛에 맞으면 탁, 탁, 탁, 즐거운 소리로 답하다

아궁이의 취향을 통과한
꽃불의 열렬함과 뒷불의 은근함에 지친 허리를 편다

<시에> 2012년 겨울호


수선집 근처 / 전다형

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
주일만 빼고 수선 일을 했네
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
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
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
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
맞은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
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
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
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
나는 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
의수족 아저씨가
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
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
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
땅으로 기우는 어깨 위에서 강물소리가 들렸네
아저씨가 자꾸만 되돌아보았네
신발 밑창에 친 못처럼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네
수선집 근처 굵은 주름살 떨어져
뒹굴고 있었네

시집<수선집 근처>2012년 푸른사상



생명보험 / 김기택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밥 먹을 때마다 씹히고
이빨 사이에 고집스럽게 끼어 양치질해도 빠지지 않는 죽음이
오늘 밤은 형광등에 다투어 몰려들더니
바닥에 새카맣게 흩어져 있다.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넙죽 받을 것이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움켜쥐고 볼 일이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그렇잖아도 죽음에 투자하라고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익성도 확실하다고
투자만 해놓으면 다리 쭉 펴고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보험설계사가 수상한 제안을 해왔다.
죽자마자 억!만금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이 카탈로그에 가득하였다.

죽음에는 다리들이 다닥다닥 참 많이도 달려 있다.
이젠 길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리들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다.
저렇게 많은 다리들을 갖고 이제 어쩌자는 것인가.
세상 모든 죽음을 낱낱이 겪어 알고 있으면서도
허공은 아무 대책이 없다.

죽음은 공짜인데 언제부터 선불이 되었느냐 따지는 나에게
보험설계사는 확신에 찬 웃음으로 대답했다.
생명보험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할수록 사랑도 진실해진다고
견적이 나오지 않는 사랑을 무엇에 쓸 거냐고.

죽음에다 돈과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를 하고 나면
어서 죽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해질 거라고.



지문을 수배하다 / 조재형

글구멍이 막혀 살아온 농투성이, 말년에 인감을 내러 면사무소를 찾았다. 직장에서 말소된 자식의 생계를 복원해 주려 남은 천수답을 내놓은 것,

맨몸으로 황무지를 개간하랴 중노동이 열손가락을 갉아먹었다. 십지문이 실종되었다고 민원은 반려되었다. 고추 먹은 소리로 삿대질 해본들 소용이 없다.

몰락한 가문의 정본으로 태어난 노인, 가난을 대대로 복사한 탓에 사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이면지처럼 남의 집 헛간을 전전하며

노인을 진본으로 탁본한 곳은 땅이다. 논배미 밭고랑 갈피마다 삽과 괭이로 밑줄을 그었다. 땀방울로 간인한 흔적들이 그를 소명한다.

팔순 고개 완등하고 유효기한이 다해가는 상노인. 올봄도 황소가 끄는 쟁기에 첨부되어 논두렁으로 출석했다. 부록으로 어깨에 멘 삽날이 지문처럼 문드러져 있다.

시집<지문을 수배하다>2012년 지혜사랑



봄의 은행 / 조영민

나는 어디론가 날마다 인출되었지요
몇 해 전 햇빛과 나비를 꾸어간 친구는
맑은 가을을 송금해 준다더니 감감무소식,
도시에선 도무지 자산이 붙지 않아요
사람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제 몸의 살구꽃 향기나
하루하루 반딧불이 빛을 탕진하며 살아요
변두리로 이사한 나는 소주병보다 먼저 쓰러져
모서리를 껴안고 잠들 때가 많았어요
이제는 깨진 적막을 치우고 꽃잎 넣어 도배하고
낡은 의자에 노루표 페인트를 칠하고 싶어요
마당 입구는 까치 부부에게 세놓고
지난날 집의 심장 소리 같은 냉장고 플러그를 뽑아
텃밭 냉장고를 가동하고 싶어요
누구도 받지 않던 매미 전화벨을 받아 들 때는
창으로 부침개 냄새를 흘리고 싶어요
날이 어두우면 밝은 별 하나만 켜고, 그 빛으로
대처로 인출된 아이에게 가고 싶어요
길은 나를 부르지 않겠지만 내가 가면 길이 된다는 걸
바람조차 보증인 이 계절이 서명해요
나는 반만 잃었지만 늘 전부를 잃어온 당신,
당신의 여름도 찾아주고 싶어 퇴직금 같은 봄을 지나요
그럴 때 당신의 상처도 나에게 조금씩 입금되겠지요
젊은 날 내가 당신에게 저축한 것으로
봄은 언제나 한도를 갱신하고 있어요

<시로 여는 세상> 2012. 가을호



금전수金錢樹 / 이시경


나는 여러 생의 몸을 비틀어 이승으로 퍼 올린 이야기다
푸른 골수와 피가 푹 녹아있는 고전 醫書다
이야기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구절마다 여러 길들이 있으나

나는 첫 페이지 첫 마디에 목숨을 걸었다
새순은 흙속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한마디를 던진다
어둠속에서 마디가 채워지고 한줄기 푸른빛 불꽃이 인다

백내장으로 두껍게 덮인 눈을 거쳐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들의 팍팍한 가슴에 박히기 전까지는
그들은 그것이 어둠의 두 세계를 이어주는 첫 마디라는 것을 몰랐다
풋풋한 한 구절을 놓고는 들여다보기만 했다
망각 속의 옛 문장들을 한동안 더듬은 후에야 그들은 흐느껴 울었다

나는 티브이 인터넷 스마트폰의 디지털소음 속에서 신음하던
그들의 초록 파동의 탈출기이다

세상은 나를 금전수라고 부른다는데, 혹자는 나를
폐 서점의 창고에 묻혀 한숨짓는 아날로그 고전 철학서라고 한다는데
나의 문장과 사상과 철학을 흔들지 마라

나는 연둣빛 손을 감아올려 그대의 상처 어루만지는 손흙에
호흡을 불어넣는 말이다

시집 <쥐라기 평원으로 날아가기> 2012년 지혜



목련 / 손진은

구름을 낳는 나무가 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태반인 양 묻어놓은 땅속 곳간에서
구름을 낳아 허공에 매다는 나무
불끈 솟은 힘줄 송글송글한 땀으로
동그랗게 혹은 잘게 부순 추위와 어둠 햇살을 뭉쳐
튼 살 틈으로 밀어내는 구름의 자식을
혀와 목젖 근처 심지어는 팔다리에까지
입성으로 꿰찬 나무의 기쁨!
햇귀와 흙냄새로 술렁이는
하늘 아래 가장 설레는
어치와 때까치와 아지랑이의 시간
대궁을 타고 터지는 저 구름 씨앗 소리 좀 보아
펼친 구름의 옆구리 사이에서
새 흉내를 내며 햇살이 소리치며 날아갈 때
저 불구의 나무도
불굴의 나무가 되어
누렇게 익어가는 상아 궁전의 봉오릴 타고
지상을 뜨고 싶단
맑고 뜨거운 생각 부풀리는 것을
그러나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듯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애써 낳은 구름 땅바닥에 엎질러버리곤
새끼를 잃은 어미소가 되어
허전을 간식처럼 되새김질하는
저 자글자글한 잔주름



손톱 바다 / 이장욱

손톱이 끝까지 자라는 세계를
나의 가장 먼 곳에서 기다렸다.
규칙적인 생활과 함께.
캄캄한 하수도라든가 또
먼 바다에서.

나는 자주 신념을 잃어버렸다.
열 개의 사례들 가운데 꼭
모자라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다 가리킬 수 없는 것이
이 세계라는 듯이.

나는 손톱을 기르고 또
길렀다.
나를 중지하고
적이 완성될 때까지

너무 환한 곳에서 드디어
툭,
까마득한 어둠을 향해 떨어지는 것이 그의 운명.
할퀴고 싶은,
핥고 싶은.
그것은 먼 바다의 해일이 시작되는 순간.

그가 막 외로운 밤바다에 도착하였다.
잘 손질된 생선과
음료수의 가까운 곳에
그곳에서 태어나 영원히 출렁이는
검은 수평선으로서.

<시와반시> 2012년 가을호



산벚나무가 있던 자리 / 양현근

산벚나무 주변은 종종 추억이 분실되는 곳, 연못 주변 이제 막 움이 트기 시작한 산벚나무 몇 그루와 꽃잎을 받아낼 나무의자, 그리고 출입금지를 알리는 게으른 목책이 서 있었다 내 청춘의 금지목록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봄꽃들이 팝콘처럼 터지는 날이면 심야극장의 포스터가 가방 속에서 안절부절 디스코텍의 현란한 조명이 방과 후를 서성거리고 열일곱은 담뱃불처럼 은밀하게 발화되었다 나무의자가 꽃을 지우고 낡아가던 오후 쯤 뜨거운 언어들이 앞다투어 피어났다 내 키는 산벚나무 아래에서 다 자랐다

가끔 길을 잃고 넘어지고 그럴 때마다 헛디딘 자리에는 물별이 뜨곤 했다 애기손바닥만한 어리연꽃은 푸른 등을 하나씩 내걸었다 염문이 만발한 연못에는 닿지 못한 간절한 사연이 둥둥 떠다니고 나무그늘도 무성하게 목을 늘렸다

오래된 산벚나무 그늘, 화려한 만개의 시간도 그저 한때의 일
바닥의 노래를 알고 싶어
순백의 혓바닥으로 발바닥까지 핥고 싶던

흔적은 풍경의 서편을 물고 사라진다 시간의 경계는 그늘을 따라 이저리 옮겨 다니고 꽃잎들도 하르르 바람을 따라다니다 어디론가 철거되었다 산벚나무 그늘이 누웠던 자리에는 허리가 뭉툭 잘린 변명과 허연 잔뿌리를 드러낸 치사량의 이별과 녹슨 길바닥을 끌고 다니던 타이어의 바깥이 있었을 뿐,

이 모두가 푸른 날의 일
흐드러지게 꽃이 피던 시절의 산벚나무 아래에서의 일

시집 <기다림 근처> 2013년 문학의전당




자작리 사생활 / 김남수

마을 한 채 짓고 싶네, 자작리

입구에 간이우체국 팻말을 바람개비로 매달고 담장 없는 앞마당에 자작나무 우편함을 외발로 세우는 거야 시간마다 열어보는 거야

앞산 가을걷이 소식 뜨락 채마밭 저녁상 차린다는 소식 한 묶음씩 들어앉아 있을 거야 뒤꼍 어미고양이 몸 푸는 시각도 달려와 있을 거야 쉬엄쉬엄 읽으며 밑줄을 긋는 거야 아침이 오는 소리로 답장을 쓰는 거야

편지를 부치러 읍내리로 나갈 일 있겠나 지천으로 배달된 이슬 한 장 솎아다 반짝 우표 붙이고 여치 울음 척척 문질러 봉하는 거야

수취인 : 자작나무 우편함 귀하 발송인 : 자작나무 우편함 드림

자작리 사생활 들통 나겠네 나, 바빠지겠네

간이우체국네자작나무우편함네앞산네채마밭네이슬네여치네어미고양이네

더불어 자작자작 살아가는 속사정,

시집<장미가 고요하다> 2012년 시안




바람의 전입신고 / 전영관

가구들은 나보다 판단이 빠르다
체념을 발판삼아 한 걸음 먼저 적재함에 오른 표정을
악천후라고 기록해 둔다

나의 부탁대로 마지막까지 견뎠을 책상 나사못이
참을성을 뚫고 튀어나왔다 새벽의 관절이
나와 함께 삐걱거릴 때에도 자신의 자세를 지탱했을 것이다
기타는 끊어진 줄을 기다리느라 목이 더 길어졌지만
처음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비가 오면 함께 노래를 불렀었다
음표들은 방을 맴돌다 가라앉을 뿐 간벽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옆방과 등을 맞대고 사는 TV에게 배운 처세술이다
어깨를 좁혀 선반에 나란히 서 있을 수 있었던 책들을
마구잡이로 라면 박스에 포개 넣어버린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장르로 퀴퀴한 이론을 섞을 것이다
함지 몇 개와 냄비는 공복의 습성까지 가져가려는 듯 덜걱거린다
그 위로 노숙자 안색의 재떨이도 던져 넣는다
옷가지 몇을 챙기다가 습관적으로 무릎 구부리던
바지를 가방에 구겨버린다 구두는
오랜 눈치로 발을 감싸며 떨어지지 않는다
기사가 복부비만형 가방을 들어 준다
시동을 거는 순간 두 번을 함께 보낸 겨울이 부르릉,
진저리로 인사를 대신한다

구름은 나보다 사태파악에 둔하다
희멀건 얼굴로 하늘만 긁는다 전입신고서에 이번 주소지를
봄의 변방이라고 기록하겠다 전출지를 묻는다면
악천후의 중심이었다고 추가하겠다


두부 / 김영미

1.

그러니까 상고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총인구수를 알고 싶다면 두부를 먹어본 사람의 수를 세면 되리라

2.

여기에 두부가 있다 무색무취에다 자의식이 없는 두부는 돼지비계에 붙고 김치에 붙고 쓸개와도 어울린다 어떤 맛도 주장하지 않는 두부는 모든 맛과 거리를 두고 있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두부는 그냥 두부일 뿐, 아마도 중용이란 낱말에 혀를 대어보면 십중팔구 두부맛이 나리라 네모였다가 네모가 아니다가 형이 으깨져 동그랑땡이 되어도 그대로 무아무상이다 반야심경을 푹 우려낸 물에 간수를 넣어 굳힌다면 아마 두부가 되리라

3.

두부쯤이야 단숨에 짓뭉개버릴 수도, 심장 깊숙이 칼을 꽂을 수도, 나는 두부 앞에서 당당하다 젓가락으로 모서리 한 점을 건드려 본다 기다렸다는 듯 두부는 스스로 제 살점을 뭉툭 떼어 젓가락 쪽으로 옮겨 앉는다 칼로 잘라본다 칼이 닿자마자 두부는 온몸으로 칼을 받아들여 칼의 길이 되어버린다 큰 육모, 작은 육모, 조각이 난 두부 어디에서도 칼의 흔적, 칼의 상처를 느낄 수 없다 어느 칼잡이가 칼을 받아내는 솜씨가 이러할까 고수 중에 상고수다

4.

온두부에다 연두부 연두부에다 순두부 두부는 연하고 순하다 따뜻하고 착하다 그래, 두부야, 그래서 두부야 그러니까 두부여 무엇이라고 이 두부놈아 아이구 두부님 어이구 두부시여 이제, 나의 화두는 두부이다

믹서 / 김영미

원산지에 따라 생육사가 다른각양각색의
과일들믹서에 넣는다

스위치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격동의 한 세기가 몰려온다굉음을 울리며
칼날의 검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든다꿈결처럼
빨강과 초록,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고주황과 연두,
중도와 보수가 섞인다과육 속 붉게 영근 따가운 햇살이 섞이고지중해의 염분과
아열대를 적시는 오후의 소낙비 몬순의 당도가 섞인다기적처럼
껍질과 알맹이의 근원적 대립이 몸을 풀고열 번의 만남과
스무 번의 헤어짐 마침내 모든 입자가 하나로 어우러진다꿈결같은
탁자 위, 한 잔의 코스모 폴리탄!

원심분리 되지 않는그대와 나
믹서에 넣는다
뼈와 몸뚱이비극처럼 회오리처럼
ON OFF on OFF



하얀 접시에 올라온 하얀 가자미 한 마리 / 김승희


나는
‘나는’ 이라든가
‘내가’ 라든가 하는말을 잊어야만 한다고
또한 ‘나의’라든가 ‘내’라든가 하는 말도 다 버려야만 한다고
바다처럼 푸른 식탁보가 깔린
작은 나무식탁 앞에서
하얀 접시에 올라온 하얀 가자미 토막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다

이 은은하고 도도한 광채 어린, 이 접시는 속삭인다
흰 살 가자미의 토막, 껍질, 지느러미, 빼낸 창자,
형제자매, 부모, 고향…… 그런 것을 다 복원해낼 수 있는가,
유언도 없이 잡혀 와 토막 난 가자미 한 마리,
내가 주어가 될 수 없다는 것

나의 소유격도 결국은 다 파도 거품처럼 무의미하다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는 접시가 주어란 말인가?
실향의 접시가, 도마, 푸른 칼자루가 주어란 말인가?
오른쪽으로 두 눈이 쏠려 있는 가자미
껍질을 다 벗기우고 하얀 살만 토막으로 접시 위에 올라와 있다
희망의 현실적 근거가 한도 없지 않은가?
희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갈 데까지 다 간 마음……
접시에 대한 좌절, 몸부림, 굴종이 오고
이 시대에 누가 장편소설, 대하소설을 쓰는가?
있는 것은 몽타주, 토막토막 단상밖에는,
이 은은하고도 도도한 광채
접시 하나가 세계 전체와 맞먹는 것일 수도
그런데 살짝 이가 빠진, 저도 막 금 간 접시 위의 토막,
외부는 언제나 파괴적인 힘으로
개개에게 관여한다
이 하얀 보이지 않게 막 금 간 접시 앞에 놓인 나이프와 포크
앞의 신경증
그런 식으로 그날 별이 칼집 난 내 가슴에 소록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