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스크랩] 적독(積讀) 외 3편/양문규 본문
적독(積讀)
양문규
시루떡 같은 책이
큰방 책장 가득 쌓이고
윗방 이불장 위에
책상 위에 켜켜 쌓이고
주방 식탁 위에 그릇처럼 쌓이고
사랑방 내려앉은 툇마루 위에
햇살과 손잡고 쌓이고
세탁기 골골 돌아가는 소리 위에
화장실 좌변기 물통 위에
똥내를 풍기며 쌓이고
현관 신발장 위에
마루 한켠 쓰레기통 위에
흙먼지 뒤집어쓰고 쌓이고
쌓이고 쌓인 책을
잠을 자다가 읽고
밥을 먹다가 읽고
똥을 누다가 읽고
신발을 신다 읽고
읽고, 읽다가 또 책을 쌓고
또 하루가 쌓이고
몸의 중심에 쌓인
또 다른 책이
또 나를 불러 또박또박 읽고
참 유식한 중생
밤새 천년 은행나무가 노오랗다
툭, 툭, 툭 흔들리는 바람을 타고 은행이 떨어진다
삼신바위 날다람쥐 삼단폭포를 기어올라 은행나무로 가는 길
쇠말뚝 타고 흐르다 그만 미끄러져 가시 철망에 피 흘린다
망탑봉 박새 한숨에 다랑이논 지나 은행나무에 닿으려 하지만
장대 그물망에 걸려 퍼득거린다
어느 구멍으로 들어왔는지 검은 차광막에 걸려 넘어진 남고개 고라니
누가 천년 은행나무 옥살이를 시키나 주절주절하는 사이
은행(銀杏)이 은행(銀行)인 것도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라며
소유경(所有經) 썰(說)하는 천태산 부리부리(不二不二) 너구리
낼 모레면 상강 지나 벼랑길인데
은행똥보다 더 독한 구린내 풍기는 참 유식한 중생
—『시와사람』 2012년 겨울호
구절초
환한 하늘이 꽃을 내리는가
천둥 번개 울다 간
천태산 여여산방
소담하게
꽃이 열린다
햇살, 햇살이
가장 환장하게 빛날 때
저 스스로 꽃을 던져
몸을 내려놓는
그 꽃무늬를
핥고 빠는 벌과 나비
툇마루에 웅크리고 앉아
가만 들여다보는데
미루나무 이파리 우수수
허공을 날며
돌아갈 곳이 어딘가 묻는다
월유봉 간다
안갯속을 한 아이가 미끄러지듯 걸어간다
귀가 없다
눈이 없다
손과 발이 없다
몸속에 하얀 달빛이 들어 차 있는 것인가
가느다란 갈비뼈가 물결을 이룬다
귀가 맑다
눈이 밝다
손발이 부시다
깊다랗게 생을 이룰 수 있다는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둥근 숨소리 들으러
늦은 가을밤 월유봉 간다
—『리토피아』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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