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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점, 하나 티끌과 티끌이 손잡고 부스러기 아래서 미친개처럼 일하며 바람 잡고 사는 세상 붉은 입술 너울대는 길거리를 들락날락 암내를 쫓아 킁킁거리는 수캐처럼 돌아다녔네 거짓말과 꼼수가 판치는 무대에서 주술 걸린 좀비처럼 춤추었네 젓갈처럼 삭은 티끌세상 어둠 짙게 내린 병동 속 환자처럼 지냈네 가을걷이 지나간 들판 지스러기에 오무작대는 벌레 한 마리 먼지 하나 물고 가쁜 숨결 토하네 끝없는 시공 속 보이지 않는 점 하나 찍어 놓고 어둠 속으로 날아가고 있네. --시에티카16호(2017년 봄)--
길잡이 오랫동안 연습문제를 풀었다 골대를 비껴가는 공처럼 늘 제대로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다가오는 사람은 적고 혼자 노는 시간이 눈처럼 쌓이는 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처럼 덧없는 세월이 내놓은 답안지를 펼쳐 들고 쓰디쓴 한숨을 내뱉는다 가보지 않고는 헤아릴 수 없는 안갯속 달리던 다리 휘청거려야 어렴풋이 보이는 듯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은데 숨이 트이는 것만 같은데, 느닷없이 창밖에 몰아치는 비바람 팔짝대는 고사리손 곁에서 팽팽한 손끝으로 종이배를 접는다 방울꽃처럼 투명한 순간이여 내 삶의 길잡이여. --시에티카16호(2017년 봄)--
경계인 일억 분지 일의 시간과 일조 분지 일의 공간은 의미를 부여하기엔 너무 작아 은하 속 보이지 않는 별처럼 운명 지어진 시공의 한 점이 사내에게 슬며시 소곤거린다 애간장 태우는 꽃바람, 귀엣말 속삭이는, 돌고래처럼 솟구치는, 광신도처럼 타오르는, 내려앉은 바람을 마시며 등나무처럼 키운 그늘을 버리고 앞으로 질주하는 경주로와 하늘을 우러르는 달구지길 사이 따가운 가을 햇살에 젖은 사내가 거친 땅바닥에 길을 내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절름절름 걷고 있다 허공 속 잉잉대는 벌레처럼 목쉰 소리로 날리는 어스름 타령 그어지는 한순간 환한 별똥의 꼬리 길면 어떻고 짧으면 어떠하냐. --시에 45호(2017년 봄)--
쪼그라든 밥통 이젠, 달릴 수 없어 줄어든 위가 다가앉아 건넨 귀엣말을 드러내지 않고 반백의 머리가 출입문을 나간다 가로수에서 울긋불긋 쏟아지는 햇살이 쓰디쓴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앙상궂게 드러난 어깨를 쓰다듬는다 후줄근한 옷자락을 붙잡는 망령의 손길 길거리에서 길거리로 휴지처럼 구겨져 끌려다니던 한낮 뒤틀어진 고목 아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밥통 뒤꿈치 개갠 자국이 엇섞인 눈물에 젖어 있다. --시에 45호(2017년 봄)--
날아가 버린 새 굴참나무 눈에 보이지 않는 욕망 엎치락뒤치락 몸부림치고 있다 푸른 혓바닥을 날름거려 햇빛을 먹어 치울 때 욕망이 욕망을 억누르며 무성하게 쌓아 온 시간 날아갈 듯 울긋불긋 타올랐던 젖버듬한 아름드리나무 이제 피가 식었다 나무가 새 떼처럼 흩어진다. --시와정신 57호(2016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