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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묘수 바둑을 잘 둔다는 것은 바둑돌을 놓아야 할 꼭 알맞은 자리를 찾는 것 상대와 자신이 둘 자리를 내다보고 날렵하게 무희의 발처럼 수순을 밟는 것 수십 수를 내다보는 뛰어난 바둑의 고수 이세돌 세계의 눈길을 끌며 오로지 한 수만을 바라보는 인공지능 알파고 앞에 어린애처럼 무릎을 꿇었다 한때 나도 여러 사람의 발자국을 깔보며 흐릿한 앞날을 내다보려고 몸부림치다가 돌쟁이처럼 거꾸러진 적이 있었다 늘 외곬만 바라보다가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에야 빈 잔을 들고 축축이 젖으면, 숨은 발자국이 푸른 들판에 노란 민들레꽃처럼 환하게 피어올랐다. --불교문예 77호(2017년 여름)--
카이스트 2회, 충남대학 공과대학 교직에서 정년퇴임 후, 색소폰을 즐기는 박동철박사, 이용희박사 초대로 지인 몇 사람을 위해 세미래공원 특설 무대에서 연주하다. 소수의 관중은 시원한 정자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시청, 초여름 한낮은 그림 속 여백이었다. 공원에 살고 있었던,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하게 부상 당했던 고양이, 착한 어린아이들이 돌보아 주어 회복했다. 그 후 어른들은 두려워하며 피하지만, 아이들 만나면 함께 즐겁게 논다고 한다.
무더운 5월, 오늘만은 산도 푸르고 바람도 시원하다. 연화봉 정자에서 막걸리 4통을 비우고 비틀거리는 산길, 삶이 아름답다.
초등학교 동창과 대학 동창으로 부터 각각 받은 낡은 사진 두 장, 초등학교 시절 내 모습 찾을 수 없네.~ 교련복, 뿔테 안경, 낯익네.~
법성암 샘터에서 마른 목을 축이는 마로와 마롱이, 잡초 사이에 핀, 꽃 한송이가 외롭다.
고교 동창생으로 방황을 거쳐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에 입학, 젊은날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5월 무더운 날, 초록빛에 물든 대학 교정에서 담소를 나누며 젊은날의 추억을 더듬어 보았다. 옛날엔 촌놈들이 득실거렸는데, 지금 지극히 세련된 차림의 멋쟁이들이 건물 사이 길을 누비고 다닌다. 이공대학을 거쳐 제기동 골목에서 막걸리를 한잔하고 본교의 멋진 석조건물 사이 길을 걸었다. 옛 친구의 멋은 젊은날처럼 푸르더라 가슴에 열정을 일렁이게 했던 교기는 여전히 펄럭이고 있었다. 교내 명품 고양이도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초여름 서울에서 대학동창들이 푸르름 짙게 물든 계룔산을 찾아왔다. 하얀 억새들이 산속 숲길에서 푸른 웃음을 꽃잎처럼 흩날리던날, 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간 밖에서 젊은날 날아가 버린 새를 다시 붙잡았다. 좌로부터 김인묵, 이용현, 김용일, 정창경, 이종헌, 박인균, 최유진
중학시절 한동네에 살았던 친구들, 각자 생존과 번식의 임무에 충실하다 보니, 세월이 거침없이 흘러 버렸다. 모든 임무를 마친, 갈 날이 멀지 않은 나이, 이제 눈에 뵈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두려울 것 없다. 오랜만에 만나보니 곱고 앳된 옛 모습은 날아가 버리고, 하얀 억새만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