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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낮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
海溢(해일) 서정주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갯벌에서 흑두루미, 검은머리갈매기, 민물도요 철새 떼가 겨울을 나는 남쪽 바닷가 구렛들과 푸른 갈대숲 사이 두루마리 펼친 듯한 둑길을 걷는다 뻘밭에 매대기질 치는 짱뚱어들 비어져 나온 아랫눈시울에 어른거리는 유년의 그림자 뙤약볕 쨍쨍한 어느 여름날 여린 손이 낚싯대를 잡..
동물의 왕국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동물을 인간 세상에서 만났다 꼬리 흔드는 애완견 약삭빠른 생쥐 욕심 많고 미련한 돼지, 재주꾼 원숭이 기회를 엿보는 여우, 늑대들로 득실거렸다 양처럼 자라서 소 같은 일꾼이 되라던 부모님 말씀 아직 귓가에 맴도는데, 사자 호랑이 같은 사나운..
수음을 사주(使嗾)하다 외 1편 강태규 들켰다 아니 정직하자면 태생적 관음을 토로해야겠지만 주워들었던 사주(四柱)가 그러하지 못하다 할 일 없다라지만 그것도 아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수음밖에 없다라고 하기에는 상상력의 수액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사주단자(四柱單子) ..
사랑을 나눌 때 그토록 큰 소리가 나는 것도 강과 강이 만나는 합수처럼 물과 물이 만나기 때문이라 한술 뜬다 나일강의 범람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다면 내 배꼽 아래 이 비옥한 삼각주도 만강일폭의 범람 때문일 것이다 시시때때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 격렬한 당신 땀방울 때문일 ..
세상을 껴안다 나태주 생각하면 너무 크다 생각하면 너무 작다 너무 멀고도 아득하다 그래도 나는 세상을 껴안을 수밖에는 없다 사랑하기만 한다면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님을 아는 까닭으로 세상아, 안녕! 아침에 일어나 세상과 인사하고 세상아, 안녕히! 저녁에 세상과 작별을 나눈다 날..
공중 장옥관 공중은 어디서부터 공중인가. 경계는 목을 최대치로 젖히는 순간 그어진다 실은 어둠이다 캄캄한 곳이다 나 없었고 나 없을 가없는 시간 빛이여, 기쁨이여 태양이 공중을 채우는 순간만이 생이 아니다 짧음이여, 빛의 빛이여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