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스크랩] 海溢(해일) -서정주 본문
海溢(해일)
서정주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만,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 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아직
미처 몰랐습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漁夫)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 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 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겠지요.
<미당 시선집>. 민음사.
사람마다 조금씩은 삶을 견디는 격과 식이 다르다. 이 다름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 같지 않은데 결국엔 '인간'이라는 속성으로 귀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주. 이 애달픈 이름엔 꿀도 찐득하지만 그만큼 독 또한 묻은 음식쯤이리라. 말을 다루는 재주로, 서사를 구부려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법으로 서정주를 넘는 이를 아직 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내 견문이 비좁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라의 옛이야기를 바구니로 엮은 "신라초", 그밖의 설화에 기대어 유년의 고향을 녹여낸 "질마재 신화" 등으로 대변되는 그의 시들은 원초적인 향수와 원시적인 본능에 기댄 한국적 토속미를 두루 포함하고 있다. 특히 사투리를 자유자재 녹여 거기에 리듬과 감정을 이입하는 필치는 가히 신의 경지라 할 만 하다.
그뿐이라면 정말 우리의 소중한 시성으로 남았을 텐데.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를 들쑤시고 간 꼬챙이들을 위해 복무한 슬픈 이력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군부 독재 시절에 걸쳐 그는 권력을 향해 서 있었고 다수의 고통을 외면하는 죄를 짓는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죄가 밉지 인간 서정주가 통으로 몹쓸 것이기야 할까. 그 덕분에 서정주는 이 공간에서 이쯤으로 멀찍이 순서를 밀려서 오늘 자리를 얻는다. 질설적으로 말하자. 한국에서 시를 쓰고 시를 산다는 것은 서정주의 시세계에 얼마간 세들어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 그가 우리의 고대사에서 자양분을 얻어 쓴 것처럼.
그래서 세상이 울록볼록한 것이다. 우리는 알고있다. 인간의 양면성이 그중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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