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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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음을 사주(使嗾)하다 외 1편
강태규
들켰다 아니
정직하자면 태생적 관음을 토로해야겠지만
주워들었던 사주(四柱)가 그러하지 못하다
할 일 없다라지만 그것도 아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수음밖에 없다라고 하기에는
상상력의 수액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사주단자(四柱單子) 신부집에 보낼 적
좋은 날과 밤을 누려보자 했다지만
꾸려온 사주가 그러하지 못했다
잉그리드 버그만을 흑백화면에서 불러내어
4D 화면으로 끌어들여온 험프리 보가트가 되기로 한다
그녀의 두 다리와 내 두 다리가 사주(四柱)가 되다가도
그녀는 사라지고
남근을 담은 손끝에서 사주(射注)로 눈을 뜬다
수음이라는 것도
어쩌다 주워온 사주가 아니라
생명의 기원이 자웅동체의 사주임을 알아차리고선
아주, 또는 제법 근엄하게
나의 원시를 구체적으로 관음한 날,
가끔, 있었다
사이에
사구에 갇힌 부레없는 넙치를 보다가 우주의 호기심은 왼쪽이라는 생각 하나와,
동굴호수에 갇힌 망둥어를 보다가 우주의 암전 속에서 살아남는 생각은 오른쪽일 거라는 생각 둘,
사이에,
내가 지구에 처음 왔을 때는 물속을 유영하다가 대기권으로 던져졌다는 것 하나와, 개미나 새떼들의 교신법이 퇴화된 직립보행의 존재라는 둘,
사이에,
호기심과 호기심은 서로 투명망또를 두른 채 왼과 오른
사이에,
내 생이 민물에 갇힌 넙치와 동굴에 갇힌 망둥어
사이에,
그 사이 사이를 질주하는 사이에
나는 자꾸만 왼과 오른 사이에 던져진 실종들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왼의 끝마디와 오른의 끝마디가 띠로 연결되는지 매듭으로 이어지는지 광년의 거리인지 모르겠다
그 사이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사이에
눈을 잃은 망둥어라는 생각과
폭풍과 해일 속으로 되돌아갈 짠물을 두려워하는 넙치라는 생각
사이에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3년 · 상반기 제8호
강태규
서울 출생. 2003년 산문집 『평창이야기』, 2009년 시집 『늙은 대추나무를 위하여』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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