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스크랩] 박이화의 시에 대하여 본문
사랑을 나눌 때 그토록 큰 소리가 나는 것도
강과 강이 만나는 합수처럼
물과 물이 만나기 때문이라 한술 뜬다
나일강의 범람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다면
내 배꼽 아래 이 비옥한 삼각주도
만강일폭의 범람 때문일 것이다
시시때때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
격렬한 당신 땀방울 때문일 터이다
----박이화, [범람]({흐드러지다}, 천년의 시작, 2013년) 부분
박이화(1959~) 시인은 그의 첫 번째 시집인 {그리운 연어}에 이어서, 그의 두 번째 시집인 {흐드러지다}에 이르기까지 ‘한국연애시의 진수’를 선보이고 있는 시인이며, 그는 이 땅의 여성해방론자들과는 정반대방향에서, 이 세상의 모든 남성들을 오직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노래한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성적 욕망은 작은 강이고, 큰 강이며, 수많은 강물들을 다 받아들이고도 언제, 어느 때나 변함이 없는 바다와도 같다. 황제의 성적 욕망도 작은 강이고, 왕비의 성적 욕망도 작은 강이다. 남자의 성적 욕망도 작은 강이고, 여자의 성적 욕망도 작은 강이다.
하지만, 그러나 이 선남선녀들의 작은 강이 모여서 큰 강물을 이루고, 이 큰 강물들이 모여서 그토록 크나큰 괴성과 함께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나일강의 범람”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게 되고, 또한, 나일강의 범람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며, 이 파라오의 무덤은 죽음과 재생을 의미하게 된다. 성교는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팜으로써 새로운 후손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하나의 생명이 죽으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되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또하나의 생명이 죽어가게 된다. 나일강변의 피라미드가 그 주민들의 번영과 행복을 약속해주고 있듯이, “내 배꼽 아래 이 비옥한 삼각주도” 우리 후손들의 영원불멸의 삶의 텃밭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마음 가는 길은 물길 가는 길이어서
칼로 벨 수도 막을 수도 없는데
설상가상 비만 오면
내 몸은 역류하듯 아프고 들쑤시기 시작한다
저 비린 비 냄새가 당신의 몸 냄새 같아
내 뼈와 살이 일거에 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범람한 그리움에 내 몸의 제방이
속수무책 무너지기 때문이다
----박이화, [범람]({흐드러지다}, 천년의 시작, 2013년) 부분
에로스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며, 모든 생명들의 아버지이다. 사랑의 한탄은 종족의 한탄이고, 종족의 한탄은 사랑의 한탄이다. 우리 인간들은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고, 사랑에 의해서 죽어간다.
사랑만이 고귀하고, 사랑만이 위대하다. 사랑만이 영생불사의 다이아몬드가 되고, 사랑만이 최고급의 후손인 2세를 생산해낼 수가 있다. 소위 최종심급은 경제가 아니라, 성교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적 욕망은 칼로 벨 수도 없고, 법으로 다스릴 수도 없다. 성적 욕망은 부르도자(불도저)로 막을 수도 없고, 도덕과 예의범절로도 다스릴 수가 없다. 어느 누가 당신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내 몸의 제방이 속수무책 무너”진 여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치료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몇 날 며칠 깎지 않은 수염처럼
거칠고 꺼끌꺼끌한 보리밭을 지날 때면
옛 남자를 본 듯 반갑고 가슴 뛴다
쓰다듬을 때마다 손바닥 따끔따끔 찌르는 수염은
그가 키운 억센 야성의 그리움 같아
와이셔츠 단추를 풀듯
개망초꽃 하나 둘 풀어헤치고
등에 풀물 배이도록 와락, 그를 안고 싶어진다
----박이화, [청보리밭]({흐드러지다}, 천년의 시작, 2013년) 부분
만일, 그렇다면 야수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야수란 말 그대로 들짐승을 뜻하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을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왜, 미녀와 미남이 아니고, 미녀와 야수가 그처럼 만인들의 심금을 사로잡고 있는 말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녀는 자기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는 만큼, 자기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남은 건강과 용기와 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지만, 야수는 건강과 용기와 힘의 상징이 될 수가 있다. 이 세상의 도덕군자들은 미남과 미녀의 결합을 최고로 칠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밝은 대낮의 논리이고, 이윽고 날이 저물고 방중술의 무대가 펼쳐지면 미녀와 야수의 결합이 최고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아주 깔끔하고 멋있게 단장한 남자보다는 몇 날 며칠 수염을 깎지 않은 남자가 더 좋다는 여자, “거칠고 꺼끌꺼끌한 보리밭을 지날 때면/ 옛 남자를 본 듯 반갑고 가슴이 뛴다”는 여자,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을 때마다 “손바닥 따끔따끔 찌르는 수염”이 더 좋다는 여자, 그리고 그 야성의 사내와 “와이셔츠 단추를 풀듯/ 개망초꽃 하나 둘 풀어헤치고/ 등에 풀물 배이도록” 정사를 벌이고 싶다는 여자는, 과연, 에로스의 향연을 주재하는 색신色神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녀노소 벌겋게 달아오른 체위로
제 각각 뒤엉켜 있거나 뒹굴고 있는 모습이란
고대 유황불 심판으로 사라져 간 소돔과 고모라 같기도 해서
약쑥, 백도라지, 당귀, 천궁
온갖 약초 향이 최음제처럼 스멀스멀 스며드는 한증 속에 있다 보면
어느새 내 몸은 수천 억 개의 감각을 거느린
거대한 비밀의 제국
---박이화, [나의 몽유도원]({흐드러지다}, 천년의 시작, 2013년) 부분
에로스의 여제는 제법 잘 생기고 귀공자타입의 사내에게도 관심이 없고, 에로스의 여제는머리가 좋고 똑똑한 사내에게도 관심이 없다. 돈 많고 호화저택에 사는 재벌에게도 관심이 없고,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세도가의 사내에게도 관심이 없다.
오직 에로스의 여제가 에로스의 여제인 것은 그녀의 사랑이 근친상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야성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근친상간적인 사랑도 사랑을 질식시키고, 티없이 맑고 깨끗한 사랑도 사랑을 질식시킨다. 사랑은 동물적(야성적)이어야만 하고, 어떤 꾸밈이나 가식도 없는 사랑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사랑은 때와 장소의 구분도 없어져야만 하고, 마치, 꽃의 향기를 찾아가는 벌과 나비와도 같은 사랑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에로스의 여제는 몇 날 며칠 수염도 깎지 않은 야성의 사내와도 정사를 벌이고, 에로스의 여제는 “남녀노소 벌겋게 달아오른 체위”로 소돔성에서도 정사를 벌인다. 에로스의 여제는 삼류극장에서 친구의 애인과도 정사를 벌이고, 밤낮 없이 성업 중인 모텔에서 한 패거리 말벌떼와도 정사를 벌인다.
성교는 거룩한 행위이며, 영생불사의 다이아몬드이다.
이 성교에는 국경선도 없고, 더,더군다나 인종차별이나 도덕과 법률 따위조차도 없다.
뜨락의 화초가
자신의 꽃보다 서너 배나 크고 붉은 헛꽃을 피워 놓고
태연자약, 온갖 벌 나비를 유인하고 있다
사월 초파일 그것도 대웅전 앞에서 버젓이
들은 바에 의하면
딱정벌레 성기 모양 꽃을 피워 놓고
짝짓기하러 찾아온 놈들과
희희낙락 제 볼일 다 보는
그런 얌체 난(蘭)도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성과 속 해탈과 일탈이 따로 없는
저 징-한 꽃들의 세계에서
간혹 노란 음핵에 코를 박고
몽정하듯 파르르 날개 떠는 호박벌
그 환한 등 뒤로
꽃잎 질끈 조이는 줄 모른 채
바로 사랑의 절정에 빠져
죽음마저 황홀하게 잉잉대는 한때라면
사람이 꽃이고
꽃이 내 몸인 한통속의 순간이다
-------박이화, [색계色界] ({흐드러지다}, 천년의 시작, 2013년) 전문
박이화 시인은 언어로 시를 쓰지 않고, 온몸으로, 온몸으로 시를 쓴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 쉼표 하나, 물음표 하나 등, 그 모든 것이 그의 성감대이며, 에로스의 향연을 위한 소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
성교는 부부(남녀)간의 사랑의 척도이며, 이 성교에 따라서 그 부부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교는 사랑의 불꽃이며, 새로운 자손의 씨앗이다.
당신은, 당신은 나의 “노란 음핵에 코를 박고/ 몽정하듯 파르르 날개 떠는 호박벌([색계])”이 될 수 있는가라고 에로스의 여제는 묻고 있는 것이며, 또한, 당신은, 당신은, 그 거대한 생식기로 “내 배꼽 아래의 이 비옥한 삼각주([범람])”를 언제, 어느 때나 범람시켜 줄 수 있는가라고, 에로스의 여제는 묻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나의 “노란 음핵에 코를 박고/ 몽정하듯 파르르 날개 떠는 호박벌”이 되어줄 수 있다면, 만일, 또한, 당신이, “내 배꼽 아래의 이 비옥한 삼각주”를 범람시켜 줄 수만 있다면, 나 역시도 그 야수의 힘에 “속수무책 무너져”서 “그대 앞에 만판 흐드러진([흐드러지다])” 이화꽃이 되어줄 수 있다고 그 에로스의 여제는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절정이다. 환희이다.
무인지경이다. 무아지경이다.
색은 세계의 열림이고, 세계로의 초대이다.
시는 색이고, 색은 황홀이다.
에로스의 향연----.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이 향연을 위해, 오직 이 향연을 위해 단 하나뿐인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된다. 모든 아버지의 아버지와 모든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당신을, 모든 독자들을, 박이화 시인의 ‘에로스의 향연’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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