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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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

연안 燕安 2013. 5. 15. 21:50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그래도 명색이 시인데'라는 사람들에겐 난데없겠지만,  이 시의 저자에게 시는 결코 무겁거나 딱딱하지 않다.  '진중한 시'를  시의 참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이쯤에서 시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기표가 그렇더라도 김민정의 삶, 김민정의 문학, 이런 것마저도 가볍고 천한 것이라 뭉뚱그려선 안 된다. 김민정이 정말 찌르고 싶어하는 것은 진중함으로 덧칠된 가면 속의 세계일지도 모르니까.

   위의 시는 김민정의 시들 중에서는 그래도 우리가 아는 '시'에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비교적 시적이며 비교적 정상적이고 나름 시다워 보이는 것이다. 그의 시들은 하루살이처럼 가볍다. 거창해질 것 없이 하루살이의 생이 하루살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다면, 하루살이처럼 가볍다라는 말의 무게 또한 그쯤 되리라. 우리가 견디는 오늘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다. 상투를 튼 선비가 세기 전의 삶을 방식을 고집하기도 하고, 굴레가 싫어 기꺼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산다. 앞의 두 극단적 삶 사이에 우리가 깃들어 산다면, 인간의 삶의 양상을 반영하는 시 또한 그쯤의 넓이와 깊이를 가질 게 틀림없을 텐데, 불행히 우리는 시의 일면만을 본다. 시를 향한 정신의 고매함이 형식이나 언어마저 고매한 것으로 묶어버린다면 그 또한 끔찍할 터.

   김민정은 이미 시단의 주류가 되어있다. 적어도 그는 이 세계의 딱딱한 껍질과 맞부딪으며 싸웠고 자신의 지분을 성취했다는 이야기다. 그가 저 시의 가벼움을 우연히 성취한 날개 쯤으로 치부하지 마시라. 몸을 내던지며 만신창이가 되어 얻은 세계임을 그의 시집을 읽으면 금세 알 수 있다. 다만, 저게 시로구나, 무릎을 치진 말아야 한다. 시의 일면이지 전면은 아니라는 것. 꿍쳐놓은 당신의 세계가 오늘을 일으켜세운 시의 일면이 될 때까지 가보시라 권한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방식이 가장 옳다는 것을 끄덕인 다음에. 꼭!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물크러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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