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스크랩] 여승- 백석 본문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낮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시전집>에서
이데올로기가 뭐라고 과거의 우리에겐 늘 금기인 것들이 있었다. 솥뚜껑만으로도 놀라는 가슴에겐 지은 죄가 중해서라고 쳐도 좋은 시, 좋은 노래를 치졸한 까닭으로 향유할 수 없는 슬픈 시절이 있었다. 하기사 지금엔들 한껏이겠는가. 여전히 애먼 얼굴에 손가락질을 해대는 지은 죄가 중한 족속들이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백석. 금기의 와중에도 암암리에 읽혀지던 사람. 풀려난 지금에는 독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만큼의 사랑을 얻은 사람. 현대시인들이 흘끔거리는 보고. 거의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그의 시들은 어느 꿀종지를 지나온 떡이라서 이다지도 달콤한지.
<여승>은 중이 된 한 여인의 굴곡진 삶에 바쳐진 깔깔한 노래로 읽힌다. 집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며 "금덤판"을 쫓아 먹거리를 팔기도 하고 어린 딸을 돌무덤에 묻기도 하는 식민지시절의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역순으로 되짚어낸다. 언어는 깔깔하지만 여승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측은함이 가득 묻어난다. 이런 역설적인 낯설음은 견자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관자의 태도를 내보이는 그의 문체 때문에 비롯돤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쓸쓸" 하고" 서럽"고 "슬픈"데 "눈물"이 가득 어렸는데도 감정의 과잉이나 관념의 주조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쯤이면 가히 연금술 그 자체 아닐런지.
아마 그의 시는 오래도록 늙지 않을 것이다. 낯선 사투리들이 기득하지만, 그럼에도 현대적인 그의 어법에 몰골이 송연해진다. 시 쓰는 자로는 나 역시 한낱 '솥뚜껑만으로도 놀라는' 죄를 짓는 셈이다. 귀한 말들을 한데에 굴리며 세월이나 허송한다. 반성하라!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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