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4월의 시 본문

현대시모음

4월의 시

연안 燕安 2013. 4. 16. 23:59

죽음이 참 깨끗했다 / 장옥관

죽은 매미를 주웠다
죽음이 참 깨끗했다 소리만 없을 뿐 그 모습 그대로 고스란했다 얼마나 머물다 간 걸까 내 귓바퀴 속

소리의 무덤을 만들고 사라진
찰나를 향한 여백뿐인 삶
그래서 그 가파른 울음소리, 짝퉁 비아그라 사서 박카스아줌마 만나는 노인들처럼 갈급했던 걸까 돌아보니
벚나무 둥치에 소복하게 달라붙은 허물들
벗어놓은 몸이 고스란하다

그 아래 배터리 다 된 시계처럼
초침 멎은 검은 시간들

우듬지엔 아직도 푸른 불길 치솟는 울음소리
저 울음 그치면 울던 그 자세 그대로 툭 굴러떨어질 것이다 플러그 뽑은 티브이처럼 깨끗한 죽음
무밭에 서리 내리듯 녀석의 성(性)은 사그라질 게다

여운도 없이 여음도 없이 칼로 벤 자리
나도 따라 바라본다
녀석이 마지막 눈길 던졌던 그곳을

시집「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2013. 문학동네


오래된 연인 / 최기순

저 유리창을 꽉 채운 나무 그림자가
하나의 현상이라면
서로 겹쳐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지나온 시간은 질량이다

그렇다면
처음 그대가 나를 채운 것을 현상이라고 해도 되나
그렇게 붙박여 지나온 시간을 질량이라 해도 되나

나무가 제 안에 현상되는 걸 유리창이 바라보듯
바라본 시간의 정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대와 나의 사랑이 시작된 곳

단지 허공에 불과했던 그대가
한 덩어리 에너지로 심장을 강타한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대가 우주 속을 한 점 기포로 떠돌았다면
나는 적도의 마른 모래
동시에 한 생의 장막을 움켜잡는 손가락

혹은 내가 그대 몫의 그릇을 다 비우고도
집요하게 긁어대는 빈 숟가락은 아니었을까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들과
무한궤도를 돌며 이렇게

시집『음표들의 집』2013년 푸른사상



바람에 잎사귀들이 / 최기순

연꽃 호수에 바람이 불자
일제히 잎사귀들을 뒤집는다
장비목 코끼리떼가 한꺼번에 귀를 펄럭인다
멀고 먼 사바나를 향해 대이동을 하나보다

수면 위에는 떨어진 꽃잎들 종이배처럼 떠있다
저들도 몸을 나룻배 삼아 어디든 멀리
흘러가버리고 싶은가보다
나도 커브를 한 번 휙 돌아서 몸을 기울여
이 생을 어제와 오늘을 뒤집어볼 수 있는 것일까
휘파람 노를 저어 떠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런데 저 연밥들
세상의 이런저런 소문 다 듣고도 입 다문 늙은이처럼
눈감은 얼굴 형상을 하고 물 위에 떠서 쭈글쭈글 말라간다

펄럭이던 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묵은 줄기들 덩치 큰 초식동물의 뼈처럼 얼기설기
컴컴한 물 위에 정박 중인 흰 배들 고요하고

둥글넓적한 연잎들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시집『음표들의 집』2013년 푸른사상



그 철길에 해바라기가 산다 / 서상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기차는 오갔다

철길 옆에 피었다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있었지만,
소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가는 길의 꽁무니를 붙잡을 수 있을까
사라진 길의 끝은 보이지 않고
세상이 궁금해
날마다 목을 뽑고 바라보았다
늘 정해진 풍경에
머리가 무거운 해바라기
생각을 쥐어짜면 한 사발의 기름이 나올 것도 같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늘 그 자리
왜 이곳을 떠날 수 없었을까
할머니 어머니도 다만 꽃이라는 이유로
소음에 그을리며
초라한 목불같이 서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무거운 모가지를 내어주고
어이없이 바닥에 누워야만 했다

시집「적소適所」2013년 서정시학


후박나무 유서 / 서상만

초여름
후박나무 이파리 하얀 반면(反面)에
무얼 자꾸 받아 적는
후박한 바람의 손

저 기록은 필생의 기록
바람마저 피가 마르고 눈이 침침해지면

저 간절한 필체를 해독할 수 있으련만,

달달 떨며 쓰는, 혹
투, 투신投身이란 말

벌써 두렵다
머잖아 무연히 던져버릴

저 나뭇잎 유서들

시집「적소適所」2013년 서정시학



구름의 낚싯밥 / 김춘리

어디쯤 구름이 압축되고 있다
구름을 짜면 비가 나온다
가끔 빠져나온 번개가
땅에 떨어져 풀이 자라기도 한다

구름이 깻묵을 개고 있다
따끈함과 끈적거리는 것들을 뭉쳐
동글납작한 떡밥을 만들어
낚시 바늘에 끼운다
폐곡선이 그어진 하늘, 구름의 어깨 위로
고소한 무늬가 퐁당거리며 구겨진다

깻묵에도 씨가 있다. 굵고 실한 어종들이 입질 하는 떡밥, 미끼에 걸려 한쪽으로 치우친 구름떼, 도랑을 콸콸 적시는 비를 뿌리기도 하고 떡밥 떨어진 미늘은 햇살 한줌 걸고 있다

깻묵을 비비면 빗방울이 촉촉하다
시장입구 방앗간에서는 깨 볶는 냄새가 고소하다
이런 날 물고기들 튀고
비가 온다

시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2013. 고요아침



오늘의 표정 / 마경덕

오늘이 쏟아진다
거리에 전시된 감정은 대부분 무덤덤하다
흐림과 맑음이 겹친 감정은 무표정보다 난해하다
달리는 길은 어제의 기분을 계산해서 거리의 노트에 나열했다
첫줄에 기록된, 사망 5명 부상 78명
시작은 끝으로 마무리되고 정체된
깁스의 시간과 링거의 시간은 늘 같은 표정이다
전광판은 태연하게 숫자를 들고 서서
길의 속도와 취기가 섞인 졸음을 합산하고
내일의 기분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표정은 예측불허지만
답습한 통계로 날씨를 예감하듯, 불운은 그다지 변동이 없다
지난해부터 오늘로 이어진 구간은 커브가 심한 난코스
무차별 중앙선을 넘어 온 계절은 난폭해서
내일의 비탈길은 예고되었다 먼 곳에서,
유빙이 흘러오는 동안 폭설은 결빙으로 이어지고
수시로 현수막을 바꾸는 도시는 왜곡된 표정을 찍어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지금은 裸木의 시간, 대부분 표정은 직설적이다
쓸쓸하거나 냉담한 말투는 이 거리에서 자주 마주친다
24개로 이어진 하루라는 마디 어디쯤에서 저기압이 분리될까
어떤 바람이 흐린 내일을 견인해 갈까
신경질적인 하늘이 바람의 방향대로 눈빛을 수정한다


꽃과 밥 / 마경덕

뿌리 잘린 꽃들이 행복하다
대부분 꽃의 생각은 긍정적이다

양동이에 담긴
노랑은 철없는 色, 애송이 꽃집처녀도 봄바람처럼 가볍다
몸값을 깎는다고, 꽃들이 입을 놀리기 전
먼저 지갑을 연다 제철이 아닌 장미에게 나는 호의적이다

하루치 식단과 한 다발의 꽃
반찬과 꽃을 달아보는 저울의 눈금은 늘 한쪽을 편애한다
꽃이,
샴푸가 되고 양말이 되고 비누와 우유가 되고 커피 한잔이
설렁탕으로 바뀌었을 때, 이미
꽃의 나이를 지나 밥의 나이로 기울고 있었다

한껏 과장된 꽃들, 포장을 한 감성은 금세 시든다
안개꽃이 추임새를 넣고 프리지어가 샛노란 향기를 생산해도
결국, 꽃은 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꽃들은 모른다

향기가 마른 식탁
모처럼 메뉴는 꽃밥이다
장미의 입술을 하찮게 여긴 내 나이에게 먹이려고
자반고등어 한 손을 포기한다

<현대시학> 2013. 4월호


시간의 입자 / 전길자

소나기 쏟아지는 날
종일 빗속을 거닐면
빗소리의 허리가 만져지네

쏟아져 내게 안겨오는
저 빗소리의 가녀린 등뼈

만지면 으스러질 것 같은
형체없이 스며들기만 하는
어쩌면
벗을 것 없는 시간의 입자

뼈만 앙상히 남아 있는 것인지
가여워라
내일 없는 내일의 소리들

빗소리에
다시 젖고 있네

시집「사다리의 시간과 아버지」2012년 문학의전당



유리창들 / 문순영

여닫기를 반복하던 얼룩들
들여다보이는 게 더러는 싫은 듯이
덜컹대다 더러는 깨지는 습성이다
해가 지는 방향에선 선량한 근원의 빛인 양 물들다가
안쪽의 내력이 궁금해지다가
배경에 따라서 안팎이 바뀌면서
통로에 놓이는 투명한 이 현실들
서로 자주 스치면서
때론 무늬 있는 커튼을 펄럭거려보지만
어쩜, 상처를 주고받는 자본의 관계이다
현대건축구조에선 다각형의 모습으로
색깔과 무늬들이 다양하게 새겨지고
불투명한, 강화된 길목을 끼고 회전문 돌아갈 때
겨를 없이 갇혔다가
겨를 없이 깨진 각도에 베이기도
속수무책 닦을 것이
보이다 또 보이지 않게 되다
한 여자가 내부에선 보이는데
외부에선 안 보이는 거울 유리창에 대고
지나가는 제 방향을 비춰보다 낯섦에 흠칫
흠칫 놀라다가

얼룩을 닦다 닳아진 지문 위로
또 하나의 얼룩들이 쓰라리게 각인 될 때

시집「사려 깊은 얼룩」2013. 문학의전당



꽃의 웃음에 대한 비밀 / 김충규

참을 수 없이 웃는 꽃이 가장 진한 빛깔을 낸다

나비가 속삭일 때 그 속삭임마저 참을 수 없는 꽃이
나비가 발가락에 묻혀온 초록물을 살결에 살짝 적실 때
화들짝 놀라 웃음 터진 꽃이

우리가 꺾어온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의 웃음이다
웃을 때 도드라졌던 꽃의 실핏줄이다

꽃이 웃을 때
나비는 쿡 주삿바늘을 찔러넣어
뇌를 뽑아간다
뇌 없이 웃는 꽃
훅- 실성한 꽃!


나비 요리 / 김충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는 나비들
저것들을 다 잡아 요리한다면
어떤 재료를 섞어야 할까
허공의 살점 일부를 필히 첨가해야 할 테고
나비의 휴게소인 꽃은 기본 재료
가능하다면 땅에 살면서 나비라는 이름을 얻은
고양이의 눈물을 식용유로 사용하면 좋을 듯

나비의 심장과 나비의 목덜미와 나비의 눈이 섞인 요리
그걸 먹고 나비처럼 펄렁펄렁 날아 오른다면
또 어떤 미친 인간이 나를 붙잡아
요리할 상상을 하게 될까

유작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2013. 문학동네


중독 / 김박은경

처음이라는
진짜라는 영원이라는
거짓이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9회 말이라는 마지막이라는
역전이라는 희망이라는
중독, 이건 스도쿠 게임
한 칸에 하나씩의 수(數)만 쓸 수 있으니
물구나무 자세로 차가운 고요를 내쉬었다면
끓어오르는 치욕을 들이마실 순서
천국과 지옥을 함께 준대도 좋아,
좋아서 8자 춤을 춘 거라면
준비된 파국을 짓씹는 순서
하루 같은 일생을 살아왔다면
일생 같은 하루를 견딜 순서

이 완벽한 결함은 사랑할 수밖에 없어 이토록 기이하게 허튼 짐승, 내가 알고 있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귀 기울여 들을수록 퇴화해가니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금 울고 조금 웃는다

시집「중독」2013년 문예중앙



얼마나 더한 / 김박은경

칠흑이 올 때까지 어둠은 어둠을 얼마나 파고드나
죽음이 올 때까지 아픔은 아픔을 얼마나 파고드나

강이 마를 때까지 햇볕을 파고드는 햇볕
강이 넘칠 때까지 빗방울을 파고드는 빗방울

집이 사라질 때까지 넝쿨은 넝쿨을 파고들고
돌을 삼킬 때까지 이끼는 이끼를 파고들고
모래더미 사라질 때까지 바람을 바람을 파고들고

심은 적 없는 꽃이 필 때까지 마음은
믿을 수 없는 끝장까지 미움은
꿈이 분노가 되도록 희망은
끝도 없이 제 속을 더 파고드니

직전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때까지
더한 것들은 얼마나 더하는지 더 오는지

또 누가 눈멀어 없는 문을 두드린다
또 누가 열린 문에 갇혀 있다

시집「중독」2013년 문예중앙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심부름센터 / 류인서
—비둘기 명함

삐라 대신 오늘도 나를 뿌린다
광장 육교에 뿌리고 오피스빌딩 복도에 뿌린다
미분양의 우편함 속에 몰래 뿌린다
아내들의 지갑에도 부적 대신 꽂혔을 터, 즐겨 사용하시라 나를
악담과 농담 사이에 끼워 두고 비와 음악 사이에 끼워 둔다
마네킹 양 가터벨트 검은 레이스에 끼워 둔다
방음이 잘된 이 도시 소음 속에 서둘러 끼워 둔다
눈 오는 공중화장실 얼룩 밑에 끼워 둔다 녹아내린 오후의 나무 그늘에 끼워 두고
막간의 그림자극에도 보란 듯 끼워 둔다
집시 노래를 부르는 접시 바닥에 끼워 둔다

쉰 개의 전번과 마흔아홉 개 선글라스로 악천 악후 사이를 흘러 다니는 나의 사업은
자루 가득 지루한 캐릭터의 피규어를 배달하는 일과는 달라서,
희망상영관의 원격조정 리모컨을 훔쳐 내는 일과는 달라서,
책궤마다 빼곡한 방풍 방부의 약병을 정돈하는 일과는 달라서,
방문마다 내걸린 수렴청정의 주렴을 바꿔 다는 일과는 달라서,
승승장구 미래 보급형 나의 사업은

시집「신호대기」2013. 문학과지성사



빗발꽃에 대한 각주 / 정숙자

달포 전 무명의 자연현상에 이름을 부여했다. 이런 일은 계획이나 포부와 무관하다. 언어 또한 생명체로서 환경에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자연은 결코 게으르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개벽 이래 묵묵히 기다려 온 빗발꽃. (빗방울 +빗발)×비=물 등등 하 많은 무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현의식의 접점에서 명사들은 문득 부화하지 않았던가. 연재 글을 쓰던(「내가 염색하지 않는 이유」,「법률저널」554호,2009. 10. 30)중 우연히, 그러나 심사숙고 저울질했다. ‘빗방울꽃’이 더 낫지 않을까? 아니야, 빗줄기가 땅에 내려서는 순간의 개화인 걸. 발(足)의 이미지를 수렴할 필요가 있어 이러구러 언어와 사물의 한 코가 푸드득 이어졌다.

시집 「뿌리 깊은 달」2013년 천년의시작


소소소 / 정숙자

이슬은 가장 짧은 생애를 살고 가지만 또 끊임없이 살아서 돌아온다. 몸을 섞어 낳지 않고 피를 풀어 다투지 않으며 억만년을 넘기면서도 얼룩을 남기지 않는다. 동글게) 맑게) 따뜻하게) 이 셋이면 능히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다 - 믿는다. 작은 체격일망정 충만하며 누군가 스치기만 해도 툭 떨어져 깨어지지만 그 인연 서운해 하지 않는다. 밤새 귀담아 들었던 푸나무의 애환을 창공에 수납하고 애별샛별 방창한 새벽녘이면 다시 내려와 제 목숨의 전부를 풀잎에 선사한다. 이슬은 호수가 되거나 강물로 흘러흘러 바다에 닿으려는 일말의 포부도 없다. 다만 한자리 한순간 맺혔다 지는 것으로 대지를 예찬한다.

시집 「뿌리 깊은 달」2013년 천년의시작



식물의 사생활 5 / 이성렬

그 꽃이 어찌하여 땅 속에 피어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지상에서 살 수 없어 흙에 묻힌 삶이, 대지의 어스름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으리라 추정되었다

보름달이 뜰 무렵 기진한 봉오리를 여는 꽃은 씨앗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 이유 또한 미루어 짐작할 뿐

그 어느 풀벌레나 벌 나비도 사귀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기다렸다, 꽃술에 와 닿는 진동을 가는 잎맥으로 감지하여 지상의 소식을 듣곤 하였다

오랜 후 눈 멀고 귀 먹은 아이가 들판을 헤맨 끝에 찾아온 겨울 저녁, 얼음조각들은 아이의 발자국을 찾아와 투명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발걸음을 알아챈 꽃이 결사적으로 흙벽을 할퀴며 하룻밤 동안 지샌 뒤, 아이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윽고 꽃은 한 점 온기가 되어 죽고, 아이는 그 곁에 창백한 꽃으로 피어나, 다시 지하에서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 땅 속에서 피는 꽃이 제주에서 발견됨

시집『밀회』2013. 황금알




엘리베이터 / 유종인

이 단순한 기다림을 나는 기다린다
지하 3층 혹은 4층에서 붉은 신호가 올라온다
그 어느 무덤 속보다 깊은 데서 올라오는
이건 무덤보다 아래 묻힌 약속을 끌어올리는 거다
주검보다 아래 놀러 내려갔다가
부르듯 누르면 올라오는 이 삼엄한 기척에
나는 오래 무심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고래로 작금에 이르는 갈래길을
이 웅숭깊은 사각의 우물 속에 던지면
이 가만한 면벽은 순간 벽이 깨지며
사람의 미소를 엎지르는 두레박이 닿는다
무덤보다 깊은 망각, 주검과 같은 평안, 무덤이 부풀려 놓은
묏등의 관능, 그러나 천사가 내려오면
딱 멈추었을 허공의 어디까지
이 문을 단 두레박은
무심한 듯 허공과 땅속을 한 우물로 판다
그러니 모든 만남의 수평에 열리고 닫히는 수직(垂直)들,
모르는 인사라도 해야겠다 가을엔
노란 국화분(盆)을 안고 무덤에 내려갔다 겨울엔
호빵을 한 봉지 안고 십자가 첨탑 허공에서 배가 부르다
그럴 때 봄은 같이 타자며 뒤늦게 달려오고
악인은 천사를 삼킨 듯 반쯤 환해진다
소시민은 얼마나 큰 부유세를 낸 기분일까
야박과 천민이 등 떠밀려 타고 올랐다가
귀족과 연민을 슬쩍 겨드랑이에 끼고 내려온다면
천상천하 두레박에 갇힌 우리들은
새로운 출가와 세속을 맛보다 나올 게다
늘 그 땅에 새로운 땅이 밟히는 게다

계간『시와 사람』 2012년 겨울호



풀밭에서 읽히다 / 박수현

집과 반대쪽으로 난 둑방길을 한참 걸었다 둑방 풀들의 키가 한결 낮아졌다 바람의 발바닥이 둑방을 꾹꾹 눌러 밟으며 강을 가로지른다 여름 한철, 여자의 치마 끝을 부풀리던 초록은 허리를 접고 무릎을 꿇고 발목을 꺾어 나지막이 몸을 눕힌다 도꼬마리의 가시도 물러진다 지난여름, 숱한 길을 골몰하던 풀들의 그림자가 더 어두워진다 풀벌레의 날갯짓이 가늘게 풀잎을 흔든다 잎사귀 뒤에서 퍼들대며 바글거리는 것들, 까닭 없이 나를 벌세우던 젊은 날들은 이제 어떤 속임수도 걸어오지 않는다 한결 가벼워진 풀밭에는 헛뿌리가 무성하다 모서리가 바스라진 초록의 한 페이지가 둑방의 으스름한 잔등 뒤로 넘어가고 있다.

시집『복사뼈를 만지다』 2013. 시안



돋보기안경 / 김기택

벗어서 책 위에 올려놓은 후에도
안경은 여전히 무엇엔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뭇거뭇한 것이 렌즈 안에서 꾸물꾸물 형체를 갖추더니
곧 선명한 글자들이 된다.

책 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렌즈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 머뭇거리고 있다.
렌즈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파리는 검은 덩어리에서 나와
잔털이 촘촘하게 돋은 몸통과 다리가 된다.
헬멧처럼 커다란 눈으로 덮인 얼굴이 된다.
기하학적인 무늬로 짠 날개가 된다.

너무 오래 껴온 탓에
안경에 붙박인 눈알이 빠지지 않는다.
눈이 자는 동안에도 안경은 눈을 감지 않는다.
잠시도 깜박거리거나 한눈파는 일이 없다.
어둠 속에서도 계속 눈을 뜨고 있다.
잔글씨들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힘찬 부동자세로 서 있다.

잠자는 동안에도 내 얼굴은 여전히 안경을 쓰고 있다.
꿈이 안경테 안으로 모인다.
꿈 틀이 열심히 꿈틀거리더니 곧 또렷해진다.
안경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꿈들은 안절부절못한다.

결코 감을 수 없는 크고 두꺼운 눈에
파리는 여전히 붙잡혀 있다.
안경이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도망가지 못한다.
파리가 렌즈에 박힌다. 양각된다.
알몸이 다 드러난 채 종이에 붙박여 움직이지 못한다.

계간 시 전문지<POSITION> 2013년 봄호



내 이미지에 대하여 1 / 김나영

내 본명은 점숙이다
누가 점숙아! 하고 부르면
쥐에게도 새에게도 들켜버릴까 봐
얼굴 확! 달아오르는 이름이다
초가집 부뚜막에 뒤집어놓은 간장종지 같은 이름이다
지금은 나영이란 필명 주로 쓰고 살지만
어쩌다 내 본명을 알게 된 사람들은
나영이란 이름과 점숙이란 이름
그 간극에서 봉숭아 씨방 터지듯 팟! 웃는다
어떤 사람은 내 이름이 전설의 고향이나
예전에 방영하던 TV문학관에 등장하던 그런 이름이라고
그것도 주인공도 아닌 하녀나 몸종에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나를 부를 때 점숙도 아닌 점순이라고 그리 대충 부르면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오른다
기역과 니은 그 받침 하나의 뉘앙스가 얼마나 다른데
점례, 쌍자, 순덕, 말순, 봉자, 언년,…
세련된 이름들 다 놔두고 어찌 그리 민망하게들 지어놨는지
임신한, 김봉지, 김벌레, 이사철, 오백원, 이성기,…
이름 하나 바뀐다고 본질이 뭐 크게 달라지겠나 싶겠냐만
말의 결과 이미지가 나를 사육하고 있다
나는 이미지의 포로다
거울 속의 내가 때때로 낯설게 보이는 것은
점숙과 나영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굴절하기 때문이다

시집<수작>2010. 애지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 / 나희덕

질주하는 차들은 그녀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도로변에 누워 있는 것은
식당의 환풍구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 때문이다
그 식당은 가장 늦게 문을 닫는 편이다
음식 냄새가 시장기를 자극하지만
무디어져가는 감각과 의지를
그렇게라도 일깨울 필요가 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냄새에 따라 접시 위의 음식을 상상해보면
식탁을 가졌던 시절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한다
필요 없는 것들로 불룩한 아이의 주머니처럼
상상의 식탁은 음식으로 가득 찬다
음식에서는 이내 죽음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하나밖에 없는 담요는 개를 감싸주고
담요에 싸인 개가 살아 있는 담요가 되어주는 저녁,
온기와 냄새를 좀더 비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다
따뜻한 커피를 건네준 사람이 있었으니까
커피가 식기 전까지 세상은 마실 만했다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
여우의 눈동자를 지닌 밤이 오고 있다
물론 그녀는 밤에 움직이는 것들을 잘 알고 있다
길 잃은 개들과 고양이들, 또는
쓰레기통을 뒤지다 달아나는 여우들,
술 취한 남자들이 갈기고 간 오줌 냄새와
변태성욕자들, 또 다른 노숙의 달인들에 관해
동물적인 감각으로 익혀온 바가 있다
그러나 어젯밤이 지나갔듯이 오늘밤도 지나갈 것이다
갈라진 시멘트의 혈관에서 냉기가 흘러나온다
그녀는 자벌레처럼 몸을 굽혔다 뻗는다
벌거벗은 한뼘의 땅 위에
약간의 빛과
굴광성의 영혼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듯
환풍구를 향해 길게 숨을 들이쉰다
잠든 개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견딜 만하다고 중얼거리면서

《창작과비평》2013년 봄호

둥지 위의 것들 / 이영광

언 강에 나간 아이들이 돌을 던지면 두루미들은
달리는 듯 나는 듯 푸드득거리다가
저만치, 얼음 위에 또 내려앉는다
도약 직전의 종종걸음, 모든 날것들의 비상에는
어딘가 펭귄 같은 순간이 들어 있다

조류는 정말로 저 공룡시대에 네발짐승에서
두발짐승으로, 새들로 진화했을까
포식자의 이빨에 쫓기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무 위로
공중으로 날아올랐을까

공중엔 길이 없다 모든 절체절명이 앞발을
날개로 바꿔놓지는 않는다 수만년, 수십만년의 발버둥 가운데
수백만년의 살육 가운데
어떤 한줌의 비명이 공중으로 구사일생했을 뿐
새들은 발을 잃은 불구가 아닌가

디딜 땅이 없었던 것, 땅에선 안 된다는 것,
하지만 새가 아닌 것들에게 공중이란 무엇인가
새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없는 것들에게
공중이란 대체 무엇인가
포식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저 쇠로 얽은 둥지 위의 것들은 왜 날지 않는 거지?

돌이 날아오면 뛰는 듯 나는 듯 퍼덕거리다가
다시 언 땅에 언 날개를 끄는
저것들은 실패한 진화이다
참혹한 퇴화이다
먹을 것은 죄다 땅에 있지 않은가

디딜 땅이 없었다는 것, 하지만 하늘은 땅의 마지막
살이라는 것
차곡차곡 두 발로 공중을 걸어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는 인간 새들을 보며
피 묻은 깃털을 입에 물고 포식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저 둥지 위의 것들은 왜 날개를 만들어 붙이지 않는 거지?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봄 외출 / 장옥관

고삐를 풀어놓았다

몸집 작은 까만 개가 살여울처럼 뛰쳐나간다 치켜든 꼬리 아래 아, 항문이 복사꽃 같다 영문 모르는 벚꽃이 놀라 몸을 움츠린다 노란 민들레꽃 지린내 아른아른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오줌을 갈긴다 앞서 달려나가던 개가 찔끔 오줌을 갈기니 따라가던 다른 놈이 그 자리에 다시 갈긴다 나무가 움찔 진저리친다 지린내 노랗게 뿌리로 스며들어 숨 가쁘겠다 가쁜 숨결, 소용돌이치는 하늘 팽팽하게 괄약근이 조여든다

씨방 속 씨알 둥그스름 굵어지겠다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2006년 랜덤하우스



나도 가끔 유리에 손자국을 남긴다 / 신용목

우럭이 棺 속에 누워 있다
몇 마리 우럭들, 우럭의 영혼처럼 헤엄친다―산 것들이 죽은 것의 영혼인 물속
연기의 문장으로 맴을 돈다

한 생이 무덤 속이었던 우럭
물속에서 타죽은 우럭

나도 가끔 창밖을 본다 철지난 부음처럼 낙엽은 날아와 부딪치고 흘러내리는
손자국, 한 칸씩 허공은 투명하게 질러놓은 관짝들이다
가을은 눈부시게 출렁이는 공동묘지,

물살이 씻고 가는 비문처럼
나도 가끔 방안을 맴돈다 문 없는 집을 세워놓고 무섭게 달려 나가는 추억들이
몸 여기저기를 찢어놓을 때

문이 없어 그 자리 뒤집히고 마는 마지막, 죽음은 육신만을 거두어가므로
나는 아무도 읽지 못할 문장
당신의 영혼으로 눕는다

활활 타는 장작의 머리카락,
어떤 죽음은 쏟아져야 한다 몸에서 풀려나는 연기처럼 삶이 딛지 못한 곳으로,
인근 재개발 문 없는 노장에서

나는 벽돌 하나를 집어들었다

시집<아무 날의 도시> 2012. 문지



수양버들의 연애법 / 서상만

저런, 저런,
휘늘어진 머리, 다 풀어헤치고

바람을 붙잡고
무슨 음계로 저리 물색없이 놀아나는지

커다란 물거울에 제 얼굴 들여다보고
연둣빛 물오른 낭창한 허리를
이리저리 꼬면서

저수지의 고요를 흔들다가
긴 머리로 물의 옆구리 꾹꾹 찔러대네

저편까지 수양버들의 마음은
둥글게 퍼져 가는데,

짐짓 모른 채 눈을 감은
저 고요한 저수지,

소금쟁이만 마음 한 자락 읽다가 가네

시집「적소適所」2013년 서정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