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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들 풀.1 정민호 한 알의 씨앗으로 떨어지기 전에는 너는 한 알의 씨앗에 불과했다. 생명의 작은 호흡을 안으로 닫아걸고 긴 겨울 동안 뜨거운 꿈으로 살아 왔었다 인내의 흙 속에서 그려보는 푸른 하늘과 바람과 별빛을 꿈꾸며 조용한 시간의 기다림 속에서도 자연의 語法으로 구름을 노래하고 있었다. 작은 꼬리가 바람의 움직임 따라 날아라, 날아라, 날아 올라라 풀 씨의 까만 날개로 날아올라 천리를 떠도는 그 욕망의 바다를 건너 이 벌판 작은 길섶에 날아 앉아라 앉아서, 그리운 꿈을 익히는 벌판에 흙 냄새 맡으며 죽음처럼 기다리는 길고 긴 밤은 날개를 펴고 있다. 빛나는 목숨이 차가운 땅에 묻혀 위대한 철학도 없는 가난한 생명들이 삼동을 내리는 눈발로 덮여 오직 빛나는 사랑의 계절을 위해 너는 돌멩이처럼 놓여져야..
들풀 1 -순수 이지영 갇혔던 들풀 하나가 탈출을 시도한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가슴이 뛰고 날이 조금 밝아도 얼굴이 붉다 가랑비에도 따라 울고 달 밝은 밤에는 심장도 뛰고 마침내는 산으로 바다로 길을 떠나 돌을 만난다 돌에 안긴다 생각하는 갈대도 싫구나 어느 날 바람처럼 머언 여행을 시작하고 훨훨 나는 나는 자유다 무작정 뛰쳐나와 풀밭에 뒹군다 오랜 세월 흐른 후 들풀은 어쩔까 맥없이 하얗게 주저앉아 지금의 푸르름을 기억하겠지 가을,겨울 오지 않을 것 같은 이 푸르름을……. 들풀 2 -탈출 이지영 쳐다만 보던 하늘을 온통 가슴 안에 품어본다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들풀의 하늘 잠재워야만 했던 외로움의 탈출 어둡고 추운 통로를 지나 바람 부는 언덕 느티나무와 춤추다 보랏빛 들국화와 들길을 걷다가 쪽빛 하..
봄비 박금숙 토닥토닥 빗소리 낮은 음성이었구나 마음속 쌓인 먼지 털어주는 그대의 속삭임 같은 아롱아롱 빗방울 맺힌 사랑이었구나 마른 어깨 촉촉히 감싸주는 그대의 눈빛 같은 어느새 뚝, 짧은 미련이었구나 손놓고 가버린 그대의 희미한 발자국 같은 그랬구나. 그리움 걷어들이지 못하고 서성이..
봄비 내리면 . 심 의 표 <Ⅰ> 솔숲에 이는 바람 안산 구름 휘몰아 봄 비 내리면 헐벗은 푸나무들 영혼을 흔들어 온 몸에 자맥질하고 보석 줍는 나그네인양 유유히 환상의 노래 부른다 <Ⅱ> 해맑은 수정 알 잎 새 가득 구르면 못다 나눈 이야기꽃 모락모락 피우고 물보라 진한 피 한줄기 수액 쏟..
편지 안숙현 꽃은 나무에만 피지 않는다 그리움 있는 가슴에도 꽃은 피나니 향기 피나니 저마다 사랑하나씩 묻고 사는 세상 흔들려도 빛나는 것은 촛불뿐인데 하나의 촛불로 살아가며 촛농처럼 흐르는 그리움 네가 그리운 날은 촛불을 켜고 흔들리는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다
분홍 편지지 이승희 나 그대에게 하고픈 말 많지만 깊이 숨긴 채 꼭 한 마디만 적고 싶습니다. `사랑해요.` 그대 처음 보던 날부터 셀 수 없이 말했지만 혼잣말이었기에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고운 편지지에 `사랑해요.` 한 마디만 적고 싶습니다. 그대의 마음에 닿는 날 내 진실 알아 주셨음 합니다.
가을 편지 박후식 낙엽이게 하소서 태울 것 다 태워버린 줄 것 다 주어버린 가을에는 한 잎 낙엽이게 하소서. 동구 밖 서녘을 우는 한 마리 송아지 가을에는 그 눈 가득히 흐르는 구름이게 하소서. 아직 들에 있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 들게 하시고 이제 막 불을 댕기는 아낙에게는 당신의 은혜로 구들..
부치지 못한 편지 청산 / 강대환 문패 하나 없는 높다란 주소 창에 숨 죽이고 밤새 흔든 묵언을 보내면 수취 불명으로 허공속에 떠 다니다 허기진 그리움으로 텅 빈 가슴에 외로운 영혼 되어 어찌 빛만 남기고 오시는가 여린 가슴에 넘치는 사랑 다 주고 또 주고도 언제나 모자란 듯 그렇게 사시더니 심..
봄볕이 너무 좋아 오용수 스무 해 남짓 다닌 골목길이 봄볕에 문득 낯이 설어 여기가 어디더라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헛기침 두어 번 하고도 지금 어디를 가는 지 헷갈려서 어디, 그 어디쯤에 멈춰 섰노라면 내가 누구더라, 마치 타인 같은 생면부지 같은 기억상실증 그 참 회한한 일이여 다시 태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