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모음

들풀

연안 燕安 2011. 3. 27. 21:30

들 풀.1

 

 

          정민호

 

 

 

한 알의 씨앗으로 떨어지기 전에는

너는 한 알의 씨앗에 불과했다.

생명의 작은 호흡을 안으로 닫아걸고

긴 겨울 동안 뜨거운 꿈으로 살아 왔었다

인내의 흙 속에서 그려보는

푸른 하늘과 바람과 별빛을 꿈꾸며

조용한 시간의 기다림 속에서도

자연의 語法으로 구름을 노래하고 있었다.

작은 꼬리가 바람의 움직임 따라

날아라, 날아라, 날아 올라라

풀 씨의 까만 날개로 날아올라 천리를 떠도는

그 욕망의 바다를 건너

이 벌판 작은 길섶에 날아 앉아라

앉아서, 그리운 꿈을 익히는 벌판에

흙 냄새 맡으며 죽음처럼 기다리는

길고 긴 밤은 날개를 펴고 있다.

빛나는 목숨이 차가운 땅에 묻혀

위대한 철학도 없는 가난한 생명들이

삼동을 내리는 눈발로 덮여

오직 빛나는 사랑의 계절을 위해

너는 돌멩이처럼 놓여져야 한다

이 질기고 가난한 생명을 위하여.

 

 

 

 

 

들 풀.2

 

 

                정민호

 

 

 

햇볕이 깔리는 양지쪽에서

태동의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얼었던 강물이 풀려 내리듯이

너는 어둠을 뚫고 나와

대낮처럼 피어오르는 미소를 머금고

빛을 찾아 가냘픈 잎을 열었다.

아, 그러나 이 위대한 사랑의 생명을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버려진 축복이

하늘의 비호를 받아 고이고이 자란다.

그러나, 들판을 나는 한 마리 시와

봄을 실어 나르는 들 나비의 향연이

버려진 자연의 理法을 다스리고 있었다.

끝없이 흐르는 시간 따라

이 땅의 왕자로 점지 받은 푸른 생명은

가지 위로 날아가는 실바람 속으로

한 잎 한 잎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면

봄의 꽃향기처럼 기억 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들 풀.3

 

 

                 정민호

 

 

 

사랑이여 어디로 가느냐

짓밟히는 사랑이여 어디로 가느냐

비바람에 쓰러지는 풀잎 위로 내리는

그 번득이는 우레 소리를 듣느냐

움직일 수도 없는 잔혹한 나날을

그렇게 밖에는 받을 수 없었던 業報를

운명처럼 견디며 살아가는 들풀,

길길이 뻗어 나온 길섶에서

밟히고 뭉개져도 다시 줄기와 잎으로 이어지는

이 기막힌 생명을 넘어

너는 죽어서 웃는 거룩한 聖者다.

바람이여, 이 기막힌 바람이여

너를 쓸어 눕힌 非情의 바람 앞에

질기고 질긴 생명을 이어 가는 萬丈한 역사와

한 때 즐거웠던 벌레들의 합창과

구름 몇 송이 떠도는 평화로운 한낮에도

내리는 비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린

사랑의 노래는 어디로 갔느냐

따스한 태양을 몸에 받으며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놀던

즐거운 사랑은 지금

어디로 갔느냐, 어디로 갔느냐.

 

 

들 풀.4

 

 

                    정민호

 

 

 

들풀의 思惟가 묻혀 가는 순수의 뿌리로부터

깊고 깊은 밤은 시작되었다.

흔들리는 의식의 그림자 속으로 어둠이 내리고

끝없는 밤의 골짜기에서는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밤을 애타게 기다리는 황홀한 아침은

지금 어디쯤 잠들고 있는가

바람이 불어와서 잠을 깨우는

가냘픈 꽃잎도 零落으로 죽어가고

내리는 밤 별들의 환호 속에서

들리지 않는 밀어로 숨쉬고 있다.

꿈이 있는 것의 그 허무를 위하여

허무가 있는 곳의 그 꿈을 위하여

우리들의 밤은 어두운 날개로 내려오고

움직일 수 없는 자유의 깃발처럼

어디론가 끝없이 가고 있구나.

짓밟히는 사랑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랑은 이처럼 죽어 간다.

 

 

 

들 풀.5

 

 

                      정민호

 

 

 

이럴 바에야 죽게 해 주세요 하느님

문질러 밟히고 비틀어져 뒤틀려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끝없는 투쟁을 위하여

悽絶을 넘어 선 피나는 웃음이다

이럴 바에야 죽게 해 주세요 하느님,

죽어서 흙 속에 묻혀 새로운 생명의 윤회를 말하기 전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내리는 불볕과 번쩍이는 칼날과

밟히고 짓눌려 연옥의 아궁이에 놓인다 해도

그것은 오직 삶이요 기다림이다.

메마른 땅에 발 뿌리를 묻고

목말라도 소리치지 않는 풀잎의 뜻은

바로 하늘의 계시요 충만 이다.

봄철 따뜻한 햇볕과 나비와

노래하는 새들과 함께 살아오다가

내리는 폭풍과 소나기와 비바람과

뜨거운 불볕과 번쩍이는 칼날과

가을이 오기 전의 피나는 괴로움을 지나

까만 한 점의 열매를 맺기 전까지

너는 기다려라, 기다려야 한다

이럴 바에야 죽게 해 주세요 하느님,

아니다, 그것은 결코 그럴 수는 없단다.

 

 

 

 

 

들 풀.6

 

 

                        정민호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 쪽으로 눕는다

질기디 질긴 목숨의 그 지당한 哲理,

얽히고 설키어 바람에 흔들리며

손잡고 노래하는 세월의 골짜기를 지나

기다리는 때가 오면 꽃은 피리라.

비가 거쳐간 들판에서 무성히 자라나도

꽃피기 전에는 아직 잡초에 불과하다

잎과 줄기의 서걱이는 달빛 따라

원시의 여인처럼 긴 밤을 앓아 보라

성숙한 밤을 앓는 달빛 속의 풀벌레 소리,

아픔을 깨닫는 순수의 달빛 속으로

그 일렁이는 감성의 숲 속으로 찾아가 보아라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 쪽으로 눕는다.

바람 따라 살아가는 至純한 본능 그대로

기다리는 때가 오면 꽃을 피우리라

한밤에도 꽃잎으로 불을 밝히리라.

 

 

 

 

 

 

 

 

 

들 풀.7

 

 

                     정민호

 

 

 

자운영 줄기 기어 나가는 언덕 아래

연못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위로 비추는 별빛 따라

고운 밤이 내리고 있었다.

밤은 들풀의 꿈을 앗아가는 별들의 꿈,

꿈속에서도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있었다.

서서히 가고 있는 여름의 돌 틈 사이로

밤새도록 우는 귀뚜라미가

다장조의 엘레지처럼 조용히 멎는다.

여름날 지겹던 시간의 강물 따라

들끓는 경험의 뜨거운 햇살 속으로

살과 뼈를 갉아내던 회상을 묻어 놓고

고운 물 무늬를 전설처럼 풀어내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허옇게 게워놓은 달빛 속에 내리는

저 비탈 밭의 메밀꽃, 메밀꽃,

마지막 남은 가지 끝의 가을이

뻗어나간 잎과 줄기 위에 내려앉는다

잔디에 내리는 이슬방울들의

그 하늘과 땅의 호흡을 나누며

조금씩, 조금씩 흩어진 땅거미를 주워 모은다

 

 

 

 

 

 

 

 

 

 

 

 

 

 

 

 

 

들 풀.8

 

 

              정민호

 

 

 

무성히 자라버린 잡초가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든다.

가을 속에 내리는 보람들이

젖꼭지처럼 까맣게 달린다

그 인내의 쓰디쓴 열매 한 알.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꿈같은 계절을 지나

여름날의 태풍과 비바람과

뜨거운 불볕 속의 하늘을 건너 와서

오늘 아침에야 다소곳 열매를 달았다

지긋이 입을 깨물어 웃음 번지면

野女처럼 꿈틀거리는 숨가쁜 소리,

"나를 보아주세요

나를 보아주세요"

아득히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 속으로

서쪽 하늘에는 낮 달이 걸리고

달맞이꽃 하나가 조금씩 기울여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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