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매화 본문
매화
정 은 정 시조시
누가 울어 저리도 아프게 하였을까
오늘은 누가 웃어 터질 듯한 몸짓일까
차가운 겨울자락을 무엇으로 이겼을꼬
흰빛으로 단장하고 마음을 씻고 있는
향기마저 여물어 먼 곳까지 싱그럽다
내 맘에 묵은 망상도 한결 풋풋하여라
매화(梅花)
서정주
梅花에 봄사랑이 알큰하게 펴난다.
알큰한 그 숨결로 남은 눈을 녹이며
더 더는 못 견디어 하늘에 뺨을 부빈다.
시악씨야 하늘도 님도 네가 더 그립단다.
梅花보다 더 알큰히 한번 나와 보아라.
梅花향기에서는 가신 님 그린 내음새.
梅花향기에서는 오신 님 그린 내음새.
갔다가 오시는 님 더욱 그린 내음새.
시악씨야 하늘도 님도 네가 더 그립단다.
梅花보다 더 알큰히 한번 나와 보아라.
홍매화
도종환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자락 덮어도
매화 한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같은 그대 그리움
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
폭설은 퍼붓는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
매화
이병기
더딘 이 가을도 어느덧 다 지나고
울 밑에 시든 국화 캐어 다시 옮겨 두고
호올로 술을 대하다 두루 생각나외다.
뜨다 지는 달이 숲 속에 어른거리고
가는 별똥이 번개처럼 빗날리고
두어 집 외딴 마을에 밤은 고요하외다.
자주 된서리 치고 찬바람 닥쳐 오고
여윈 귀뚜리 점점 소리도 얼고
더져 둔 매화 한 등걸 저나 봄을 아외다.
매화가 필 무렵
복효근
매화가 핀다
내 첫사랑이 그러했지
온밤내 누군가
내 몸 가득 바늘을 박아넣고
문신을 뜨는 듯
꽃문신을 뜨는 듯
아직은
눈바람 속
여린 실핏줄마다
피멍울이 맺히던 것을
하염없는
열꽃만 피던 것을…
십수삼년 곰삭은 그리움 앞세우고
첫사랑이듯
첫사랑이듯 오늘은
매화가 핀다.
매화 앞에서
이해인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땅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하던
희디흰 봄햇살도
꽃잎 속에 접혀 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 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매화 피면
홍해리(洪海里)
매화 피면 찬 하늘에 피리소리
가슴 속에 절을 짓고 달빛을 맞네
달빛 젖어 흔들리는 빛나는 소멸
피리구멍마다 맨살의 무지개 피네.
매화梅花
홍해리(洪海里)
7.8월
매화는
임신중
입덧을 하느라
잎이
말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빛도 말려
언 눈 속
이른 봄
잔치는 잔치
삼복에
부른 배
기미가 피어
말린 잎
흔들다
잠이 든 고요.
홍매화 짙던 날
원 성
하늘 빛이 나무에 걸려 웃고 있는데
먼 길가에선 새싹들이 손짓하는데
하나하나 떨어지는 꽃잎은
서글픈 내 마음에 와 아련한 눈물 되네.
내 눈에는 봄이 깊어만 가는데
고운 님은 저만치 내달려가는데
흩날리는 꽃잎 땅 위에 피어
철없는 아지랑이 꽃길 따라 춤을 추네.
하루가 또 하루가 저물어 가는데
지워야 할 엄마 얼굴 떠오르는데
나뭇가지엔 붉은 홍매화
아련한 기억들이 망울져 울고 있네.
아무리 말을 건네보아도
아무리 얼굴을 들여다보아도
스님은 아무 말씀 없으시네.
에타는 내 마음을 아무도 모른다네.
홍매화빛 저리도 짗어 가는데...
홍매화가 피는 아침
주용일
내 그리움은 꿈길이 닳도록
깊고도 서럽구나
그대 그리움으로
밤새 뒤척인 아침에는
우물가에 어김없이
붉은 매화가 핀다
꿈속 먼 길을 돌아온
내 가슴의 고단한 동토에서
각혈의 꽃송이
수없이 밀고 밀어 올리는 매화나무야
밤새 고생 많았다
순식간에 활짝 피어서
세숫대야 가득 핏물 들이는
홍매화 나무의 꽃송이들아
그리움은 꽃처럼 붉은 것인가
눈물 몇 방울 잘 섞어
꽃물에 세수하고 바라보는
시린 하늘에도 꽃잎 흩날리는 구나
매화 연풍
문병란
병풍 속 매화가
바람이 났다.
고매한 화백이
몽당 붓 끝으로 꼭꼭 눌러
그 속기 고이 잠 재워 놓았는데
금년 봄 늙으막에
기어코 바람이 났다.
일부러 나비를 그리지 않는 노화백은
먹을 진하게 갈지 않는 것을 후회 하였다.
매화야 매화야
분홍빛 손톱 발톱 곱게 감추고
꿈 머금은 눈 아슴푸레히
이 봄에 병풍 속에서 살포시 엿보아
춘향이 걸음으로 아장아장 걸어 나오너라.
속곳도 깨끗이 빨아 다려 입고
머리 빗고 사뿐사뿐
분단장도 곱게 곱게 다스리고
열 두 폭 병풍 속 굽이굽이
봄바람 타고 꽃바람 타고
이 봄에 나와 어울려 한바탕
거시기 머시기 꽃놀이 안할래?
노화백은 화기가 돌아 빙그레
몽당 붓 다시 움켜 쥐고
매화의 예쁜 배꼽 밑에다
진한 먹물로 낙점을 꼭 찍었다
매화나무의 해산(解産)
김수미
늙수그레한 매화나무 한 그루
배꽃 같은 꽃 피어 나무가 환하다
늙고 고집 센 임부의 해산 같다
나무의 자궁은 늙어 쭈그렁한데
깊은 골에서 골물이 나와 꽃이 나와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
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