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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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불어 좋은날

연안 燕安 2011. 4. 1. 23:15

바람불어 좋은날

 

 

서 지 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색동저고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어느땐들 우리가 한식구 한솥에 밥 아니 먹고 북채 장구채 골라잡지 않았으리요만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꽃 떨어지기 전에 부는 바람 임 보는 바람 꽃 떨어지고 부는 바람 열매 맺는 바람 백두산의 진달래꽃 피어서 꽃구경 가는 날 으스러진 강물이 땅을 울리고 으깨어진 어깨가 춤을 춘다 이 강산 햇빛 나고 구름 좋은 날 구름 위의 새소리 맑게 뚫리는 날 쓰린 발 쓰리지 않고 저린 손 저리지 않고 목마름도 피맺힘도 한풀꺾인 목숨이라 샘물 퍼내어서 버들잎 띄워 마시고 숨막히는 산고개도 넘어보면 훤한 이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지 찍고 분바르고 귀밑머리 날리는 바람이 분다, 소나무 가지 위에.

 

 

 

 

 

바람불어 좋은 날

 

詩/ 최홍윤

 

 

꽃을 피우려다

 

억지로 눈꽃을 뒤집어쓴 나무들에게

 

한동안

 

불청객만 몰고 다니던 바람이

 

오늘은

 

하얀 순결의 보자기를 털어낸다

 

 

 

이것은 분명

 

영혼이 사로잡힌 나무들의 반란이다

 

 

봄바람은

 

즐거워서 즐거워서 나무들을 흔들고

 

불청객 대신

 

제몸에 꽃을 활짝 피우려는 나무들은

 

물오른 불그스레한 얼굴로

 

수줍어 수줍어도 생리통을 시작했다

 

 

피고 지는 것도

 

한줄기의 바람이었다고 했던가

 

오늘은 바람불어 좋은 날이다.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홍해리(洪海里)

 

 

갈비뼈 하나이던 너

이젠 나를 가득 채우고 압도하여

無明인 내가 나를 맞아 싸운다

불타는 뼈의 소리들이

이명으로 잉잉잉 울려오고

천으로 만으로 일어서고 있다

눈에 와 박히는 세상의 모든 물상이

허공중에 둥둥 떠오르고

꽃이 피는 괴로움 앞에 서서

영혼의 그림자를 지켜보면

투명한 유리잔의 독한 액체와

사기그릇의 신선한 야채도

아린 가슴의 한 켠을 채워주지 못한다

밤 깊도록 머리맡에 서성이는

바람소리 빗소리 천둥과 번개

시간이여 절대자인 그대 영원이여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아름답게

아픈 것은 영원히 아프게 아프게.

 

 

 

 

 

 

바람 부는 날

ㅡㅡ망월리를 가며

 

김기홍

 

 

바람이 부는 만큼

서 있겠읍니다.

 

푸른 시간 위로 어둠을 끌어오면

드높은 강물소리

 

먼 하늘로 날아가 구름을 내려다보며

꽃과 칼의 이름을 부르면

 

멀금멀금 돌아보며 가는 흰구름

힐끗힐끗 쳐다보며 눕는 먹구름

 

트림하는 육자배기 몇 구절

새김질하며 가는 길

 

사방에서

수많은 풀꽃들이 따라 걸었읍니다.

 

 

 

 

 

 

 

사랑하는 이여

바람 부는 밤에 나는 더 사랑한다

─ 우리가 산다는 건 사랑하는 것이다

 

이 동 녘

 

 

그리운 이여

바람이 추운 길에 날이 저물고

이 아슬아슬한 삶의 벼랑에서

그대가 내 손을 잡는가 내가 그대 손을 잡는가

갈대가 서걱이면 나는 서러워

바람 부는 밤에 그대를 그리워한다

하루에 지쳐 나부끼는 불빛들은 곤한 다리를 절룩거리고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내 손을 잡았는가 내가 그대 손을 잡았는가

산다는 건 사랑─

바람이 추운 길을 걸어 숨가쁜 사랑

어두운 시대 흔들리는 벼랑 위에서

언 가슴 끌어안고 부비는─

오! 눈물로 우릴 적실 때마다

빛 한 송이 치켜들고 오시는 사랑이여

절망이 깊어질수록

사람의 마을에는 하나 둘 등불이 켜 오고

쿵쿵 어둠을 울리며

그대 오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사랑하는 이여 바람이 불면 불수록

그대를 숨 쉬지 않고는 살 수가 없네

뜨거운 사랑의 몸살을 앓으며

그대를 껴안고 나는 가네

사랑하는 이여

내일은 오늘보다 더욱 푸르고

바람 부는 밤에 그대를 나는 더 사랑한다

 

 

 

 

 

 

바람 부는 날은 바람 있어 좋아라

 

김명석

 

 

 

대나무 숲 사이로 언뜻언뜻 햇살이 비치고

인적에 놀란 산새들 떼를 지어 광풍 일으키는 곳

키 큰 도토리 고목 타며 꼬리 흔드는 작은 다람쥐 있어

정겨움만 가득 차는 산사 가는 길

아무렴 누구 하나 곁에 없으면 어떠랴

마음 있어 마음 찾아 풍경 우는 처마 지나면

미소 짖고 합장하는 스님

스님 한 번 보고 세상살이 잊고 돌아오면 되지

아- 길이 산길이 되고 언덕이 앞을 가려도

세상은 그런 것이여 관세음보살

떠난 것은 떠난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었던 것을

있는 것만 사모하며 아침을 기다리다가

아침 이슬 한 모금을 입술로 훔치다가

받을 이 없는 편지를 가득 메우는 저녁

아무것도 아닌 듯이 아무것도 아닌 듯이 태워버렸었지

 

그리움 많은 날은 그리움 많아 좋고

바람 부는 날은 바람 있어 좋아라

 

 

 

 

 

바람 부는 날 ·1

 

나호열

 

 

흩날려 쓴 글씨들이 백지를 떠나고 있다

한 권의 참회록에서 쏟아져 나온 의미들이

내출혈을 일으키며 떼지어 몰려간다

죽음보다 쓸쓸한 곳으로 먼지를 일으키는

광란의 저 말발굽소리

방목한 양떼를 불러 모으는

목 쉰 목동의 휘파람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꼬리가 되어 흔들리고

채찍맞은 자국을 감추며

끝마무리의 종루에서 목을 매는 우리

하나씩 허물어져

마지막 폐가에서

흔들리는 거미줄을 걷고 있는

임종 직전의 그 미소

우리 모두는 뒤집혀진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바람 부는 날 ·2

 나호열

 

 

바람이 몹시 센 날에는

그저 바람을 바람으로 마주할 수밖엔 없다

사금파리로 부서져 내린 별빛을 밟으며

온밤을 헤매인다 해도

그저 바람을 바람으로 맞이할 수밖엔

넋두리와 한숨을 버무려

힘을 뺄 수밖엔 없다

나야, 나야 외치며 불러본들

누구도 나 대신 대답할 수 없다

바람이 몹시 센 날에는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기울어진 세계를

기울어진 채로 걸어가는

비어 있는 초상화가 걸려 있다

 

 

 

 

 

바람 부는 날

- 가파도 3

이생진

 

바람 부는 날 바다는 거울이 아니라 수렁이다 거울이 몸살나는 것을 보았느냐 거울엔 일렁이는 언어가 없듯 그만큼 언어엔 백치다 거울을 깨뜨리면 파경 파경은 이미 거울이 아니다 바다는 깨뜨려도 깨뜨려도 바다다 바다는 그만큼 단결력이 강하다 거울 속에서 언어를 꺼내 본 적이 있느냐 깨뜨리는 순간만 소리가 있을 뿐 다시 소리를 내려하지 않는다 바다는 죽을 때까지 소리의 연속이다 소리가 사라지려면 바다가 먼저 사라져야 한다 소리 없는 것은 갯강구 발이 수십 개인데도 발자국 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바다를 점령하려 함은 결코 흉이 아니다

 

 

 

 

 

 

세차게 몰아가는 바람 속에도

―思慕·11

 

정숙자

 

세차게 몰아가는 바람 속에도 별들은 한 자리 빛나옵니다

 

낮에 숨던 슬픔 밤이면 짙어 푸르고 붉게 고이는 눈매

 

평생에 못 뵈올 임이라 한들 기다림을 버리고 살자 하오리

 

임께서 걸으신 발자국 위에 속살 같은 마음 포개나이다

 

참지 못한 별 하나가 주루룩 옥루玉淚를 떨구는 칠야漆夜

 

돌아앉아 잠자던 돌멩이들도 놀란 듯 적시우며 눈을 뜹니다.

 

 

 

 

 

바람 불고 흐린 날

 

이향아

 

 

바람 몹시 불고 흐린 날이연 모처럼 나를 대접하고 싶다 노을빛 심지에 불을 당겨서 조그맣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이리 흔들리며 사라지는 그림자를 위해 이 세상 시계들은 일어나겠지 초침들이 행군하듯 지나가겠지 홀로 슬피 우는 것들, 홀로 울게 둘 수는 없다면서 시계들이 일제히 종악을 울리는가 너는 울지 말거라 내가 대신 울어주마 창문이 심난하게 덜컹거리는 날이면 지평선에 떠오르는 어떤 마지막 사기 등잔 감추어 둔 기름을 채워 모처럼 나는 나를 대접하고 싶다 흘러서 언제던가 잊을 뻔했던 낡은 약속 하나에 불을 켜고 싶다

 

 

 

 

 

바람 부는 날

 

윤준경

 

 

 

바람 부는 날은 숲으로 가자 푸른 바람 가득 가슴에 담고 영혼의 부피 작게 접어 꽃씨마다 날개를 달자

 

꽃씨 날아 앉는 곳 산이건 들이건 바위틈에라도 연두빛 고운 싹 틔울 준비

 

바람이 이리 부는 날은 잠들 수 없다 달빛에 몸을 기대고 명희, 춘자, 복순이 같은 옛 이름들을 떠올리며 숲의 향기만큼 키를 낮추어 바람소리 나직나직 헤아려 보자

 

바람 부는 날은 숲으로 가서 자연의 노래에 귀를 적시고 갖은 꽃으로 돌아오자.

 

  

 

 

미친 바람 돌아가고

한혜영

   

누가 먼저 따귀를 올렸던 것인가 아예 날이라도 잡은 듯이 팜츄리 긴 팔들 서로 척척 엉기면서 벌어졌던 떼싸움이라니 맨 정신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번도 삿대질, 함부로 해본 적 없는 순한 나무들 팔뚝에 핏줄 툭툭 불거져서는 죽기살기로 서로의 따귀를 갈겨대던 나무들 필시 미친 혼령이 숨어들었던 게지 그때 그 선생 같은 수업시간에 떠들었다는 이유로 짝꿍의 따귀를 서로가 때리게 만들었던 실버들 같은 팔뚝에 까닭도 모르는 분노의 힘이 실려 무당춤을 추게 만들었던 그 선생의 이름을 지금에서야 고쳐 부르네 미친 바람! 한바탕 일으킨 뒤 태연하게 퇴근했던, 사십 년 전의 바람처럼 한나절 내내 미치게 만들었던 혼령이 돌아가고 나무들 벌개진 짝꿍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조심조심 어루만지다가 어깨 서럽게 들썩거리네 5학년 3반, 그때 그 교실 같은 저 팜츄리 숲

 

 

 

 

 

바람 부는 날은 풍경을 단다

 곽홍란

  

 

바람 부는 날은 가슴도 풍경을 단다 불어오면 부는 대로 그렁그렁 흔들리다 줄줄줄 휘어 끄는 넋 휑하니 따라나선다

 

산은 말문 닫고 좌선에 든지 오래고 풀꽃은 기슭마다 잔뿌리만 들썩이고 저 바다 몸 뒤척이며 쉼 없이 출렁이고

 

날 선 거리 헤매며 지치고 주려 떨다가 깨어나는 어느 아침 또 다시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겹게 매달려 제 소리 새겨듣는

 

 

 

 

 

바람 불어 좋은 날

  

(宵火)고은영

  

 

구절초 만발한 언덕에 누워 향기 취해 하늘 보면 독수리 드높은 하늘 가 날고 병아리 어미 날개 아래 숨던

 

제트기 흘리고 간 긴 똥 줄기 거칠어 철없는 파도 소리 괭이갈매기 끼룩거리는 너머 우도의 등대가 아득했다

 

누추한 마음 안에 고운 색동옷, 고름 여미고 촌스런 단발머리 반딧불도 고왔지

 

봄이면 안개 피고 여름이면 바람 풀섶 헤집고 가을이면 잡초 향기 온 동네 마실 다니는 바람 불어 좋은 날

 

고향은 지금쯤 아직도 그 보리수나무 달콤한 탐스러움 간직하고 있을까

20051020

 

 

 

 

 

바람부는 날의 그대와 나

 

서지월

 

 

땅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하나인 하늘과 해와 달을 거느리고 몇 천년을 데불어 왔건만 고향을 알 수 없는 하늘 위의 별들과 땅의 풀꽃들 이름하여 아름다운 얼굴들, 그대와 나 사이도 어디서 시작해 이 바람부는 쪽으로 눈길 부딪히며 스쳐 지나가는지 생각해 보면 신통한 이 하늘아래 작은 길… 둘이 걸어서 가는 하나의 길 해와 달에 가 닿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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