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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한라산 둘레길 푸른 향기 종처럼 울리는 숲속에서 사박거리는 발걸음으로 아득한 옛 시간 겹겹이 쌓인 오솔길의 호스럼을 즐겨봐 가슴이 메마른 하늘바라기가 되어버린 날 가마솥처럼 끓어올라 답답한 날 파랑새를 찾아 무거운 등산 배낭 하나 짊어지고 짙푸른 그늘 드리워진 길을 저벅저벅 걸어봐 축축하게 젖어 드는 울퉁불퉁한 돌길이면 더 좋으리 천아숲길과 동백길을 걸어보면 고달픈 삶이 왜 필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네. -- 시와사람 94호(2019년 겨울)-- . <p><br /></p>
길라잡이 저녁노을 속에서 나는 초라한 봇짐을 메고 끝없이 길을 걷는 싸구려 보따리장수 거친 땅에 굽이치는 강 가파른 바위산 넘고 불볕 부어내리는 황무지에서 휘늘어진 나는 고독감이 뼈에 저린 절름발이 가로막는 가시덤불에 발걸음은 꿈속처럼 휘청거리고, 낭만을 꿈꾸며 끝없이 뚫고 가는 갈증과 굶주림의 열풍 속 잿빛 머릿속을 호리는 울음소리 허허로운 들판 푸른 달빛 아래 눈을 반뜩이며 길장승처럼 웃고 있는 긴 꼬리 붉은여우, 감쪽같은 눈가림에 보따리를 잃고 절룩거리며 발길을 돌린다 붉은 황혼에 늘 꿈꾸던 피안을 찾아 다시 되돌아 비바람 몰아치는 불모의 황무지 안으로. -- 시와사람 94호(2019년 겨울)--
어둠의 힘 누구도 다친 부엉이처럼 아무 때나 밤을 그리워하지 않아, 어쩌다 어두운 밤을 그려보면 무덥고 지겨운 낮도 가슴 깊이 품어지는 것 같아 시커먼 강바닥을 훑고 불어오는 몸서리치게 비릿한 밤의 냄새 돌풍처럼 몰아치면 텁텁하던 낮이 그렇게도 싱싱한 향기를 풍기는지 저녁 어스름은 헛된 갈등의 끝판 슬쩍 간만 봐도 삶은 한층 싱그럽고, 다가오는 어둠 앞에서 희미한 불빛도 옛 골목집처럼 그립더군 어떤 사람도 거부할 수 없는 환장하게 궁금한, 시커먼 밤의 터널이 있기에 피가 돌지 않는 한낮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견디며 버틸 수 있는 거야 -- 사이펀 15호(2019년 겨울)--
황혼의 구토 천변 은회색 물억새 서걱거리는 난벌 온몸으로 마른 나뭇가지 흔들어 묵은 나무가 날바닥에 흘린 흘림체 몇 줄 지나온 뒤안길 자국이 촘촘하다 저 어둠 속 화톳불의 장작더미처럼 타오르던 한때가 있었던가 물먹은 나뭇단 짊어진 나무꾼으로 비바람 몰아치는 둑길을 밟던 지난날 덜 으깨진 음식물이 톱밥처럼 목구멍을 지나갈 때 얼마나 깊은 두려움 속에서 떨었던가 더부룩한 뱃속에 미처 삭이지 못한 거친 푸성귀 조각들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어리석게 살아온 날들을 희미하게 세어보니 가물거리는 저녁노을 속에서 붉은 모란꽃처럼 쏠리는 무엇인가가 나를 뒤흔들어 온몸으로 뒤틀린 문장을 토한다. -- 사이펀 15호(2019년 겨울)--
머리가 잡념으로 어지러울 땐, 먼 과녁을 향해 힘차게 화살을 날린다. 다리에 힘을 주고 숨 깊이 들이마시며 어깨를 벌리고 만작의 화살을 쏜다. 1차 9순(巡)(45발)에 22발 명중, 2차 9순에도 22발 명중, 11손부터 16순까지는 평 3중, 17번째는 5시5중도, 마지막 순에 3중, 오늘은 시수가 좋은 날이다.
4학년 때 전학으로 헤어진, 60년 전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치기 어린 소년이 되어 1차, 2차, 3차, 취한 걸음을 비척이며 돌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