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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숨결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상국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
숲에 살고 싶어 정공량 숲에 들어 살고 싶어 저 숲에 들어가 살고 싶어 가랑비 웃음을 듣고 새들 마음을 읽고 싶어 날마다 해가 뜨고 달마다 보름달을 보고 해마다 얼굴엔 주름이 지지만 숨 가쁜 시간은 흔들리고 있어 파릇한 내일이 날 부르고 있으니 바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날에도 ..
불로뉴의 숲 박미산 미로를 헤매다 하나씩 내 길로 만들어 가는 쾌감, 당신은 모르지요? 국적과 이름은 상관없습니다 나는 소비하는 여왕입니다 사고 싶은 목록을 써 내려갑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최신 유행을 따르기 위해 달립니다 불로뉴 숲이면 어떻고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양재..
검은 숲 홍일표 내 가슴에서 빠져나간 저녁이 숲에 산다 숲의 자궁에서 태어난 바다 물 이파리들이 파닥이며 몰고 가는 파도소리 물가의 바위가 꿈틀, 고개를 번쩍 들고 솟구친다 악어와 바위 사이의 거리가 희미해지는 순간 물질은 물질을 넘어선다 황홀하게 숯덩이에서 빠져나온 햇덩..
막 어두워지는 숲길 황학주 숲길이 막 어두워져 더 걸어 들어갈까 말까 하는 갈피에서 무슨 빛인가 발그레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숲이 항아리를 씻어두었는지 무슨 빛인가, 여름날 길을 달리한 모든 가지들 위에 밥 묻은 손바닥처럼 얹히는 것이었습니다 노란 양푼을 업은 금달맞..
숲 손진은 부챗살모양 잎을 늘어뜨린 채 큰 나무가 그늘 드리울 때 작고 앙증한 줄기 끝에 여린 잎들이며 꽃을 매단 어린것들 날아오르려 퍼득거린다 솟아오르고 누르려는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이 두근거리는 몸짓들 사이로 스며들어 그 속에서 자라는 죽음이며 상처까지를 어루만..
숲 맹문재 흔들릴 때마다 마을이 가렸다 보인다 산등성이 닫혔다 열린다 손짓이랄 수도 있는 몸짓 있던 자리는 여백이지만 있는 자리는 마냥 푸르다 뿌리마저 흔들려 엉성한 까치집도 기왓장처럼 단단하다 바위를 흔드는 바람에도 부풀어 오르지 않고 낙엽 번지는 소리 조용히 품는다 19..
숲 이영광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에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
숲 김완하 매미 하나 둘 떠나갈 때부터 나무는 가슴에 고이는 적막 힘겨웠다 가지마다 생기 일깨우던 매미 나뭇잎에 그늘 불어넣던 매미 생각에 나무는 잎사귀마다 몸을 뒤채며 서서히 말라간다 맨 마지막 매미 한 마리도 깊고 깊은 울음 독이 텅 비어 누더기 옷으로 소리의 바닥에 가 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