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스크랩] 찔레꽃은 다 피어버렸는데 본문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올봄 꽃들이다.
겨울은 아주 길었는데, 갑자기 좀 따뜻한 날이 많더니만
차례를 가리지 않고 막 피어버린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컴에 오래 앉았더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난 것처럼
한쪽으로 점점기울어지는 느낌이 들어
그걸 진정하느라고 누워 오름에도 못 갔다.
늦은 아침을 먹고 정신을 차려
오랜만에 별도봉을 찾았더니
곳곳에 이 찔레꽃들이 난만히 피어버렸다.
♧ 찔레꽃 - 김승기
콕콕 찌르지 마
하늘이 깜짝 놀라 일어서잖아
산줄기 가랑이에
한 손을 질러 넣고
다른 손으로 하늘을 감싸 안고
대지의 사타구니를 살살 문지르면서
우주를 핥는 거야
애무는 그렇게, 그렇게 하는 거야
너에겐 하늘을 덮을 수 있는
짙은 향내가 있어
입에서 단내가 솟구칠 때까지
허옇게 개거품을 흘리며
깊은 사랑을 해야 하는 거야
몸살 앓는 사랑으로
뜨거운 유월을 지내야
새 생명이 빨갛게 열매 맺히는 거야
자꾸만 콕콕 찌르지 마
우주와의 사랑은
깊게, 조심스럽게 하는 거야
♧ 찔레꽃 연가 - 심의표
짙푸른 송림 사이 달리는 화심
게으른 뻐꾸기 울어 시샘해도
수줍은 듯 뽀얀 얼굴
내 고향 뒷동산 한 자락 깔고 누워
낮 익은 길손 마음 설레게 한다.
활짝 핀 그리움 하나
연녹색 풀섶에 살며시 묻고 서서
뿌옇게 떠오르는 달빛 맞으며
정든 임 기다리는 열아홉 순정
순애보 같은 사랑을 안고
꽃향기 풀어 순수의 눈빛 열어간다.
♧ 찔레꽃 - 김윤자
겨울 강을 건너온
어머니
파르르 시린 입술로
고뇌의 가시덤불
보듬어 안고
버선발 질긴 목심으로
피워내는
하얀 모시 꽃등
그 빛으로
강산은 밝아오고
조국은 여물어 간다
♧ 찔레꽃 2 - 권도중
꽃잎 따 손에 쥐고
돌아보던 자갈길
붉은 순 꺾어 먹고 배고프던 아이야
주고픈 선물이 있다
마음속에
남았는
흰 저고리 붉은 치마
별자락에 묻히며
갱변에 신발 들고 하얗게 서서 있던
그 꽃잎 꽃잎 사이로
가시처럼
갔던가
볼 수 없이 살아도
보지 않고 살아도
사는 게 절절하여도 피어 찔레꽃
하늘 끝 세월 속으로
묻어두고
피는 꽃
♧ 찔레꽃 필 무렵 - 박인걸
어머니 찢어진 삼베적삼이
가시나무에 가지에 걸려
쏟아지는 유월 햇살에
하얗게 바래고 있다.
보리 고개 넘어가느라
눈물마저 말라버린
감자밭에 앉은 어머니 얼굴이
찔레꽃처럼 창백하고
코흘리개 딸린 애들은
감자 한 톨에 눈이 빠지고
윤기 없는 얼굴 위로
찔레꽃 버짐이 번져갔다.
꿈마저 시들어버린
가난했던 유년의 추억이
찔레꽃 필 무렵이면
가시에 긁힌 듯 아려온다.
♧ 찔레꽃 - (宵火)고은영
보아주는 이 없는
깊은 산,
그래서
물빛 서러움일레라
하이얀 미소
순결의 서약으로 떠도는
슬픈 입맞춤
외로운 몸짓일레라
우수수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깊은 언어의 침묵
아, 고독한 사랑일레라
천년을 기다려도
만날 수 없는 임을 그리다
이는 바람에 포물선 그리는
너의 하얀 비망록
♧ 찔레꽃 사랑 - 양전형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못한다
풀과 나무는 물론 세상 무엇이든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으면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 넘치고 넘쳐 마침내
찢어진 가슴 열며 상처투성이 꽃
왈칵왈칵 구구절절이 피워내는 것
그리고 아품이 큰 꽃일수록
고웁고 향기 더 나는 것
사랑은 아프게 해야 한다
꽃이 아프게 피어나듯
가슴이 찢기도록 해야 한다
상처는 정녕코 아름다운 것이므로
아, 저 하늬 길목 갯도랑 찔레꽃
한겨울을 얼마나 아파했을까
온몸 가시에 뚫리는 고통 견디며
누굴 저리 활활 사랑했을까
♧ 찔레꽃 - 권경업
그 날, 처음으로
처음으로 내가 본 것은
한없이 투명한 가을하늘
가을하늘에 핀 찔레꽃이었습니다
아니 아니, 지금 피어서 어떻게
어떻게 겨울을 나려고
깔딱고개로 깔딱고개로
무서리는 넘어 와
아픔 몇 없다면 어찌 세상일일까
보시오, 땅 위는 다 아픔이라오
도선사 대웅전 부연 끝
뎅그렁, 풍경(風磬)을 울리며
가을하늘 날아오는 물고기 한 마리
아! 윤회(輪廻)의 이 봄날
내 안에, 내 안에 가득한 만다라
하얀 찔레꽃 덤불
........
*깔딱고개: 북한산 인수봉 오르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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