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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찔레꽃은 다 피어버렸는데

연안 燕安 2013. 1. 28. 16:13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올봄 꽃들이다.

겨울은 아주 길었는데, 갑자기 좀 따뜻한 날이 많더니만

차례를 가리지 않고 막 피어버린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컴에 오래 앉았더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난 것처럼

한쪽으로 점점기울어지는 느낌이 들어

그걸 진정하느라고 누워 오름에도 못 갔다.

 

늦은 아침을 먹고 정신을 차려

오랜만에 별도봉을 찾았더니

곳곳에 이 찔레꽃들이 난만히 피어버렸다.

 

 

♧ 찔레꽃 - 김승기

 

콕콕 찌르지 마

하늘이 깜짝 놀라 일어서잖아

산줄기 가랑이에

한 손을 질러 넣고

다른 손으로 하늘을 감싸 안고

대지의 사타구니를 살살 문지르면서

우주를 핥는 거야

애무는 그렇게, 그렇게 하는 거야

너에겐 하늘을 덮을 수 있는

짙은 향내가 있어

입에서 단내가 솟구칠 때까지

허옇게 개거품을 흘리며

깊은 사랑을 해야 하는 거야

몸살 앓는 사랑으로

뜨거운 유월을 지내야

새 생명이 빨갛게 열매 맺히는 거야

자꾸만 콕콕 찌르지 마

우주와의 사랑은

깊게, 조심스럽게 하는 거야

 

 

♧ 찔레꽃 연가 - 심의표

 

짙푸른 송림 사이 달리는 화심

게으른 뻐꾸기 울어 시샘해도

 

수줍은 듯 뽀얀 얼굴

내 고향 뒷동산 한 자락 깔고 누워

낮 익은 길손 마음 설레게 한다.

 

활짝 핀 그리움 하나

연녹색 풀섶에 살며시 묻고 서서

뿌옇게 떠오르는 달빛 맞으며

 

정든 임 기다리는 열아홉 순정

순애보 같은 사랑을 안고

꽃향기 풀어 순수의 눈빛 열어간다.  

    

 

♧ 찔레꽃 - 김윤자

 

겨울 강을 건너온

어머니

파르르 시린 입술로

고뇌의 가시덤불

보듬어 안고

버선발 질긴 목심으로

피워내는

하얀 모시 꽃등

 

그 빛으로

강산은 밝아오고

조국은 여물어 간다  

 

 

♧ 찔레꽃 2 - 권도중

 

꽃잎 따 손에 쥐고

돌아보던 자갈길

 

붉은 순 꺾어 먹고 배고프던 아이야

 

주고픈 선물이 있다

마음속에

남았는

 

흰 저고리 붉은 치마

별자락에 묻히며

 

갱변에 신발 들고 하얗게 서서 있던

 

그 꽃잎 꽃잎 사이로

가시처럼

갔던가

 

볼 수 없이 살아도

보지 않고 살아도

 

사는 게 절절하여도 피어 찔레꽃

 

하늘 끝 세월 속으로

묻어두고

피는 꽃  

 

 

♧ 찔레꽃 필 무렵 - 박인걸

 

어머니 찢어진 삼베적삼이

가시나무에 가지에 걸려

쏟아지는 유월 햇살에

하얗게 바래고 있다.

 

보리 고개 넘어가느라

눈물마저 말라버린

감자밭에 앉은 어머니 얼굴이

찔레꽃처럼 창백하고

 

코흘리개 딸린 애들은

감자 한 톨에 눈이 빠지고

윤기 없는 얼굴 위로

찔레꽃 버짐이 번져갔다.

 

꿈마저 시들어버린

가난했던 유년의 추억이

찔레꽃 필 무렵이면

가시에 긁힌 듯 아려온다.   

    

♧ 찔레꽃 - (宵火)고은영

 

보아주는 이 없는

깊은 산,

그래서

물빛 서러움일레라

 

하이얀 미소

순결의 서약으로 떠도는

슬픈 입맞춤

외로운 몸짓일레라

 

우수수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깊은 언어의 침묵

아, 고독한 사랑일레라

 

천년을 기다려도

만날 수 없는 임을 그리다

이는 바람에 포물선 그리는

너의 하얀 비망록   

 

 

♧ 찔레꽃 사랑 - 양전형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못한다

풀과 나무는 물론 세상 무엇이든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으면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 넘치고 넘쳐 마침내

찢어진 가슴 열며 상처투성이 꽃

왈칵왈칵 구구절절이 피워내는 것

그리고 아품이 큰 꽃일수록

고웁고 향기 더 나는 것

 

사랑은 아프게 해야 한다

꽃이 아프게 피어나듯

가슴이 찢기도록 해야 한다

상처는 정녕코 아름다운 것이므로

 

아, 저 하늬 길목 갯도랑 찔레꽃

한겨울을 얼마나 아파했을까

온몸 가시에 뚫리는 고통 견디며

누굴 저리 활활 사랑했을까   

♧ 찔레꽃 - 권경업

 

그 날, 처음으로

처음으로 내가 본 것은

한없이 투명한 가을하늘

가을하늘에 핀 찔레꽃이었습니다

 

아니 아니, 지금 피어서 어떻게

어떻게 겨울을 나려고

깔딱고개로 깔딱고개로

무서리는 넘어 와

 

아픔 몇 없다면 어찌 세상일일까

 

보시오, 땅 위는 다 아픔이라오

도선사 대웅전 부연 끝

뎅그렁, 풍경(風磬)을 울리며

가을하늘 날아오는 물고기 한 마리

 

아! 윤회(輪廻)의 이 봄날

내 안에, 내 안에 가득한 만다라

하얀 찔레꽃 덤불

........

*깔딱고개: 북한산 인수봉 오르는 고개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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