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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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모음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장석남

연안 燕安 2013. 1. 15. 08:39





장석남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문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 속에
환한 봉분이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이 너무 뻑뻑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 자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엔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무도 없는데
아궁이 앞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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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시집의 표제작이다.
흔히 제목이 주는 감흥이 시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이 시의 제목인 ‘에게로의’는 ‘の(~의)’를 자주 쓰는 일본식
표현이라 할 수 있지만, 시를 한층 감흥있게 만드는 접어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
시인은 현실로부터의 망명을 꿈꾸고 있다. 질척거리는 땅바닥,
남루한 현실을 딛고 서 있지만, 날마다 우리는 그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고, 날아다니는 새떼들의 자유를 희망한다.
언젠가 찌르라기떼가 우우 몰려와서는 어디론가 나를 떠메고
가리라는 것을 알기에 캄캄한 세월 너머 아궁이 앞이 환하다.

장석남의 시에는 풀이나 꽃잎, 별, 달과 같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고통받고 소외받는 현실세계에서의 상처를 부드러운 언어로 쓰다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의 새벽달빛 같은 영롱한 언어를 접하다 보면
상처도 때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그리고 서정시야말로 인간의 감성에 가장 근접한 시의 본류라는
생각에 문득 마음이 닿는다.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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