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墨竹 / 손택수 본문
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 전남 담양 출생 경남대학교 졸업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당선 이수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수상 ===================================== [감상]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할머니는 오십리가 넘는 먼 길을 걸어 읍내로 오일장을 보러 다니시곤 하셨다. 갈치며 간고등어, 고운 비단옷과 손자에게 줄 사탕까지 장터에 가면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장터에 가는 길에 발자국은 뒤에 남아서 여린 겨울햇발에 혼자 墨竹을 친다. 눈속에서도 기가 죽지 않은 댓이파리도 발자국 따라 송송 돋아나고, 할머니를 기다리다 지친 손자는 읍내쪽으로 난 창문만 오후내내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눈은 자주 왔으나 분수를 지켜 내리던 눈, 결코 대나무 허리까지 부러뜨리는 법이 없던 눈발을 따라 墨竹도 다시 희미해진다. 눈, 그리고 아침햇살에 드러나는 할머니의 발자국과 살며시 고개를 드는 대나무 이파리까지 참으로 절묘한 조화다. 가슴을 탁 치게 하는 참으로 멋진 그림이다. 어느 누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으랴 [양현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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