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오상순 본문

현대시모음

오상순

연안 燕安 2012. 3. 4. 23:43
· : 기항지 - 오상순
 
· 저자(시인) : 오상순
 
· 시집명 :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 출판연도(발표연도) :
 
· 출판사명 :
 
기항지

오 상 순


천도복숭 따서 민족의 건강에 이바지하고
아름다운 꿈과 화려한 시를
해마다 백지에 옮기리니
작년에 뿌린 피는
금년 들에 들꽃으로 피어
마음마음 돌아와 뿌리를 내리고
미역마냥 바위 위에라도 붙어서
나 자신의 정신 위에 닻을 내리고
소리 없이 먼 길을 가리라.
먼지마냥 떠오르지 말며
손은 생산에만 쓰기로
앞으로 세기의 항구는 오라.
내가 흘린 60년의 땀방울의 결실을
민족아 ! 송아지 같이 젖빨며
서로 속이지도 속지도 말며
앞으로 창창하게 살아가라.

 

· : 허무혼의 선언 - 오상순
 
· 저자(시인) : 오상순
 
· 시집명 :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 출판연도(발표연도) :
 
· 출판사명 :
 
허무혼의 선언

오 상 순


물아
쉬임없이 끝없이 흘러가는
물아
너는 무슨 뜻이 있어
그와 같이 흐르는가
이상스레 나의
애를 태운다
끝 모르는 지경으로 나의 혼을
꾀어 간다
나의 사상의 무애(無碍)와 감정의 자유는
실로 네가 낳아준 선물이다
오---- 그러나 너는
갑갑다
너무도 갑갑해서 못 견디겠다.

구름아
하늘에 헤매이는
구름아
허공에 떠서 흘러가는
구름아
형형으로 색색으로
나타났다가는 스러지고
스러졌다가는 나타나고
스러지는 것이 너의 미요 생명이요
멸하는 순간이 너의 향락이다
오---- 나도 너와 같이 죽고 싶다
나는 애타는 가슴을 안고 얼마나 울었던고
스러져 가는 너의 뒤를 따라......
오---- 너는 영원의 방랑자
설움 많은 배가본드
천성의 거룩한 데카당
오---- 나는 얼마나 너를 안고
몸부림치며 울었더냐
오---- 그러나 너는
너무도 외롭고 애밟다
그리고 너무도
반복이 무상타.

흙아
말도 없이 묵묵히 누워 있는
흙아 천지야
너는 순하고 따뜻하고
향기롭고 고요하고 후중(厚重)하다
가지가지의 물상(物相)을 낳고
일체를 용납하고
일체를 먹어버린다
소리도 아니 내고 말도 없이......
오---- 나의 혼은 얼마나
너를 우리 어머니라 불렀던가
나의 혼은 살찌고 기름지고
따뜻한 너의 유방에
매어달리고자
애련케도 너의 품속에
안기려고 애를 썼던고
어린 애기 모양으로......
그러나 흙아 대지야
이 이단의 혼의 아들을 안아주기에
너는 너무도 갑갑하고 답답하고
감각이 둔하지 아니한가.

바다야
깊고 아득하고 끝없고
위대와 장엄과 유구와 원시성의 상징인
바다야
너는 얼마나
한없는 보이지 아니하는 나라로
나의 혼을 손짓하여 꾀이며
취케 하고 미치게 하였던가
오---- 그러나
너에게도 밑이 있다
밑바닥에 지탱되어 있는
너도 드디어
나의 혼의 벗은 될 수 없다.

별아
오---- 미의 극(極)
경이와 장엄의 비궁(秘宮)
깊은 계시와 신비의 심연인
별의 바다야
오---- 너는 얼마나 깊이
나의 혼을 움직이며 정화하며
상해 메에지려 하는 나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던가
너는 진실로 나의 인연이다
애(愛)와 미와 진 그것이다
그러나
별아 별의 무리야
나는 싫다
항상 변함 없는 같은 궤도를 돌아다니며 있는
아무리 많다 하여도 한이 있을 너에게 염증이 났다.

사람아
인간아
너는 과시(果是) 지상의 꽃이다 별이다
우주의 광영----그 자랑이요
생명의 결정----그 촛점이겠다
그리고 너는 정녕 위대하다
하늘에까지 닿을
바벨의 탑을 꿈꾸며 실로 싸우며 있다
절대의 완성과 원만과 행복을 끊임없이 꿈꾸며
쉬임없이 동경하고 추구하는
인자(人子)들아
너희들은
자연을 정복하고 신들을 암살하였다 한다
정녕 그러하다

오---- 그러나
준엄하고 이대(異大)한 파멸의 스핑스
너를 확착(攫捉)할 때
너의
검은 땀도
붉은 피도
일체의 역사(役事)도
끔직한 자랑도
그 다 무엇인가......

세계의 창조자 된 신아
우주 자체 일체 그것인 불(佛)아
전지(全智)와 전능은
너희들의 자만이다
그러나
너희도 <무엇>이란 것이다
적어도 <신>이요 <불>이다
그만큼 너희도 또한
우상이요 독단이요 전제(專制)다
그러나 오 그러나
일체가 다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참(斬)하는 것이다
너희들까지도
허무의 검(劍) 가지고
허무의 칼 !
오 !
허무의 칼 !

불꽃아
오---- 무섭고 거룩한
불꽃아
다 태워라
물도 구름도
흙도 바다도
별도 인간도
신도 불도 또 그밖에
온갖 것을 통틀어
오---- 그리고
우주에 충만하여 넘치라.

바람아
오---- 폭풍아 흑풍아
그 불꽃을
불어 날려라
쓸어 헤치라
몰아 무찔러라
오---- 위대한 폭풍아
세계에 충일한 그 불꽃을
오---- 그리고
한없고 끝없는
허공에 춤추어 미쳐라.

허무야
오---- 허무야
불꽃을 끄고
바람을 죽이라 !
그리고 허무야
너는 너 자체를
깨물어 죽여라 !<1923>

 

· : 폐허의 제단(祭壇) - 오상순
 
· 저자(시인) : 오상순
 
· 시집명 :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 출판연도(발표연도) :
 
· 출판사명 :
 
폐허의 제단(祭壇)

오 상 순


해는 넘어가다
폐허 위에
무심히도
해도 넘어가다.

호흡이 거칠고
혈맥이 뛰노는
순난(殉難)의 아픔
함께 받는 흰옷의 무리들......
입을 닫고
눈을 닫고
폐허제단(廢墟祭壇) 밑에 엎드려
심장 울리는
세계가 무너져 버릴 듯한
그 신음을 들으라.

넘어가는 햇빛을 맞아
폐허의 허공을 꿰뚫어
짝없이 홀로 서 있는
차디찬 옛 영광의
궁전의 돌기둥 하나 !
그를 두 팔로 껴안고
숨을 끊고 눈 감는 자여 !
마른 덩굴 이끼에 서린
폐허의 옛 성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소리도 마음대로 내지 못하고
느껴 우는 흰 옷의 무리여 !

당혹색 저고리 입은 어린이의
터질 듯이 살찐 손목 이끌고
구름에 잠겨 있는 폐허의 제단 향하는
짚신 신은 늙은 할아버지의
땅 위로 내리 깐 양 미간 !
황혼빛에 서리는 그의 이마 위의
칼자국 같은 주름살 !

폐허의 제단에 엎드려 애소하는
남아들의 등 위에는 땀이 용솟음치고
머리에는 타는 듯한 김의 연기 서리도다.

폐허의 제단에 길이 넘는 검은 머리 풀고
맨발로 소복 입은 처녀들의
말도 없이 경건히 드리는
목단향(木檀香)과 기름 등불은
주검같이 소리없는 폐허의 하늘
바람 한 점 아니 이는데
끝도 밑도 없는 깊은 밤 어둠 속에
아프게도 우울하고 단조하고도 끊임없는
곡선의 가는 흰 길을 찾아 허공에
헤매이다 헤매이다 !
꿈나라의 한숨같이 그윽히도 가는 향(香)의 곡선은
헤매이다 헤매이다 <1923>

 

· : 타는 가슴 - 오상순
 
· 저자(시인) : 오상순
 
· 시집명 :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 출판연도(발표연도) :
 
· 출판사명 :
 
타는 가슴

오 상 순


쥐어 뜯어도
시원치 못한
이내 가슴

애매한 궐련초에
불을 붙인다
피울 줄도 모르면서

나의 가슴속
무겁게 잠긴
애수, 억울, 고뇌
뿌연 안갯가루
묻혀 내어다
허공중에 뿌려다오
씻어 내다오

나의 입속에
빨려 들어오는
연기야
나와 함께 사라져다오

유완(柔緩)히 말려 올라가는
가늘고 고운 은자색의
연기야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질서없이 엉긴
피 묻은

마음의 실뭉텅이
금새 스러져 버릴
너의 고운
운명의 실끝에
가만히 이어다가
풀어다오
허공중에 흔적도 없이
담배는 다 탔다
나의 가슴은 여전하다
또 하나
또 하나
연달아 붙여 문다
그러나
연기만 사라지고
나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진다



나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불을 질러라.<1921>

 

· : 미로(迷路) - 오상순
 
· 저자(시인) : 오상순
 
· 시집명 :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 출판연도(발표연도) :
 
· 출판사명 :
 
미로(迷路)

오 상 순


미록(미鹿)의 낙원
사랑과 힘 유토피아
평화의 서기 서린
불로초 동산에 난데없이
이리(狼)가 들었다
사나운 바람 일고
검은 구름 동하던
하룻밤에.

평화의 무리들은
암흑 속으로 흩어졌다
사면팔방으로
공포와 원한과 맹목 중에----

그때어린 사슴 한마리
길을 여의고
사막으로 뛰어들었다
불의의 실락(失樂)이여
그에게는
엎드러지며 빠지며
무서운 방황이 비롯되었다.

아---- 그는
풀도 없고 샘도 없는
불 같은 열의
끝없는 모래바다에 선
자기를 발견했다
저편 모래바다 수평선 위에
붉으 해솟아올 제

미친 듯 그는 울부짖었다
아---- 그러나 메아리도 없는
절망이여! 불안이여!
모든 것은 이미 끝나고 있었다......
속절없이 운명의 길을 그는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막에도
무심한 밤이 오고 날이 새고
날이 가고 밤이 오기를
여러 번 거듭했다.

뜨거운 모래에 빠지는
발자욱에는
적혈(赤血)이 고였다
전신에선 땀이 흘렀다.

최후의 충동으로
번쩍이던 그의 눈에
풀과 물의 형적이
희미하게 비치었다
저----편 하늘과 모래바다가
맞닿은 곳에----
오, 그것은 오아시스였다.

힘 ! 최후의 힘을 다하여
거기로 단번에 뛰어가고자
발버둥쳤다
아, 그러나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입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 순간
단말마의 그 순간이었다
미로 전의 불로초 동산의
비련(幻想)이 전개되어
몽롱한 눈에 비치었다.

그곳에는 여전하게
자기 동무들은
불로초를 뜯어 먹고 있었다
이 운명의 벗을
거뜰떠보지도 않고...... .

불로초의 상징
힘의 자현(自現)이던
젊은 사슴의
최후의 숨은 끊어졌다
그 환영(幻影)이 사라지는
같은 순간에...... .

이리하여
이상한 운명의
사막의 비극은
미해결 그대로 영원히
최후의 막이 떨어졌다.

오, 끝없는 사막에
태양은 꺼지다
어둠의 베일이
미로의 어린 사슴의
시체를 덮도다
고요히 말없이...... .<1921>

 

· : 어둠을 치는 자 - 오상순
 
· 저자(시인) : 오상순
 
· 시집명 :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 출판연도(발표연도) :
 
· 출판사명 :
 
어둠을 치는 자

오 상 순


바닷속처럼 깊은 밤
주검같이 고요한 어둠의 밤
희랍 조각에 보는 듯한
완강히 용솟음치는 골육의 주인
젊음에 타는 그는
그 어둠 한가운데에
끝없고 한없이 넓은 벌판 대지 위에
꺼질 듯이
두 발을 벌려 딛고 서서
힘의 상징, 우옹(牛翁) 같은 그의 팔 !
무쇠로 만든 것 같은
그 손을 주먹 쥐어
터질 듯이 긴장하게
부술 듯한 확신 있는 모양으로
어둠을 치도다 허공을 치도다 !
그리고
어둠과 허공을 깊이 잠근
안개의 바다를 치도다.

잠기어 나리는 안개는
퍼부어 흐르는 땀과 한가지로
그의 몸 위에 타도다 !
밑 모르는 이슬의 모양으로......
어둠과 허공의 비밀 부수는 듯한
그의 <침>은 끊임없이
치고 치고 또 치도다 !

안개의 바다는 점차로
스러지도다
그리고
그 어둠의 빛은 어느덧
멀리 희미하게 변해 오도다.

오---- 힘의 상징 !
<침>의 용사는
그 변해 오는
어둠과 공허의 벌판과 대지 위에
넘어가도다 !
오 ! 그는
쓰러지다 !
산속의 거목같이...... .

오---- 대지는
이상한 소리로 웃도다
어둠과 허공은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알 수 없는 웃음 웃도다.

오---- 저 대지의 끝으로부터
고요히 발자국 소리도 없이
넘어오는 여명을
영원한 서광의 서림은
위대한 싸움으로 쓰러진
젊은 용사의 모양을
대지 위에 발견하는 그 순간에
그의 시체를 안아 싸도다
고요히 소리도 없이
그를 조상하는 듯
그를 축복하는 듯...... .

그의 몸은 벌써
돌같이 굳어져 버렸으나
그의 입술 위에는 오히려
미진한 나머지의 표정 서리도다.

오---- 이대(異大)한 어둠은 가도다
오---- 위대한 서광은 오도다.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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