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문학상 수상작 본문
제3회 천강문학상 시 대상작
공터의 풍경 / 오정순
공터에 내리는 비는 구겨진 절기의 줄기가 느릿합니다
버려진 액자가 있고
시든 난蘭 한 포기가 비에 젖고 있습니다
일직의 빗줄기가 지나가고 뿌리를 잡고 있는 바위에
푸른 이끼라도 살아 날듯합니다
깨어진 유리에는 깨어진 햇볕이 어울리겠지요
반짝, 비가 갠 공복의 허공엔 햇볕이 따뜻합니다
소슬하게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흔들린 난蘭잎 주변에 먹물이 번져 있습니다
골목을 막 들어선 봄의 등 뒤로 아지랑이 배접이 구불구불하고
몇 년 아니, 몇 십 년 쯤 피어있었을
꽃대가 피곤해 보입니다
붉은 노을이라도 세 들어 있는지
낙관엔 오래 흔들린 악력握力이 흐릿합니다
낡은 시선만 가득한 풍경,
떠나 온 벽의 경사가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저 풍경의 크기만 한 흰 공터를
벽에 남겨 놓았을지도 모르지요
상실의 흔적들이란 저렇듯 각이 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터의 담 벽이 비스듬히 그늘을 만들고 있고
어쩌다 풍경화 한 점 걸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담 벽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공터의 배접으로 드러눕는 시간
흔들리는 그늘들은 모두 저녁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제, 그 어떤 풍경도 이 액자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듯
캄캄해지고 있습니다
2007년 현대시학 작품상
도서관 간다 / 이인원
질기고 긴 문장 붕대로 꿈틀대는 그리움을
꽁꽁 殮해 두러 간다
과월호 잡지 신세 같은 쓸쓸함을
훌훌 거풍시키러 간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에도 깨서 보채는 외로움을
고문서보다 깊은 잠재우러 간다
머릿속에 빼곡한 ‘너’라는 낱말을
모조리 삭제하러 간다
고전이 되지 못할 내 비밀을
고전 속에 암호처럼 밑줄 그어두러 간다
끝내 못 다 읽은 어떤 사랑이야기를
아쉽지만 기일 반납하러 간다
온갖 잡다한 사연 다 끌어안고도 의연한 도서관을
눈꼽만큼이라도 닮으러 간다
제2회 안견문학상
겨울산 / 임만근
눈이 낸 길이 하얗게 비탈을 타고 내려오고 있다
물어뜯을 듯 허옇게 이빨을 드러낸 삭풍을
자력으로 이겨내 보려는 듯
옷을 벗고 엉거주춤 서 있는 겨울 나목들.
어깨를 맞대고
서로의 맥박소리를 들으며
반가운 친구처럼 서로의 잔등이를 두들겨 준다
나목들은 견뎌낼수록 궁리가 되는 듯
마주보는 눈빛이 더 맑다
눈빛만 보아도 큰 위안이 되어주는 이웃, 바위와 잡목들
어우러져 이젠 바람이 응고된 휘파람소리쯤 무섭지 않은 듯,
햇살 품으로 살며시 안겨든 응달을 보자
등뼈가 닳은 산들은
옹그린 허리를 펴고
잎눈과 꽃눈, 피목들에게도 젖을 물린다
더욱 옹이를 빚고 있는 나목들을
품어 안은 겨울산
산등성이 삽목해 놓은 철탑들에게도 수인사를 보낸다
이윽고 산들이 젖을 먹이던 암캐처럼 슬그머니 일어나
앞 두 다리를 뻗쳐 기지개를 켜곤
뗏목을 짓고 도시 가운데로 흘러드는
인근 겨울산을 본다
2011년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작
흑잔등거미 / 오유균
달덩이가 창에 붙어 누런 진액을 흘렸다 어머니는 마른 풀잎 같은 기침을 자주 뱉었다 그때마다 등잔불이 자주 흔들렸다 밤이면 대숲이 빈 몸으로 울었다 돌아누운 어머니 등은 무덤처럼 둥글고 검었다
해질 무렵, 어머니는 마을로 내려가 기울어진 달을 이고 올라왔다 휘어진 산길을 돌아서면 바람이 스스슥 소리를 내었다 산새는 검고 깊게 울었다 부른 노래를 또 부르며 어머니 옷자락을 잡고 걸었다 가끔씩 바구니에 담긴 달이 흘러 어머니 얼굴에 줄을 쳤다 내가 아는 노래는 너무 짧았다
낯선 도시 떠다니는 동안 닿지 않는 나를 향해 줄을 내리고 기다림을 익혔다 허공에서 길을 놓친 그날, 햇빛이 들지 않는 습한 방에 담겨 둥글고 검은 눈물을 흘렸다
골목 돌아서서 벽을 후려칠 때
낮게 걸려있는 집 한 채
턱을 박고 체액을 빨고 있는 내가 보인다
어머니가 몸을 푼 집
오그라드는 몸에서 내린 저, 질긴
줄
2010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시 당선작
알츠하이머 / 박미선
어느 날, 나는. 구름이 찔끔찔끔 흘리고 간 볼트를 주워 먹다 돼지우리로 들어왔다 찌지직, 뚝, 뚝
<나는 참새> 나는
전깃줄 잘라 고무줄놀이를 한다 살찐 돼지, 털로 새끼줄을 꼬아 목에 채웠다 코에 코뚜레를 끼우고 밤의 팬티를 갈아입혔다 가슴살 조금씩 잘라 밥상보를 만들자 앙상해진 두 다리 가 콘센트에 꽂혔다 조잘거리던 혀를 뽑아, 나는
돼지의 기억들로 수의를 만들고 있다 눈에선 쌀뜨물이 흘러 나왔다 돼지는 머리에 꽃밭을 만들어 나를 유혹했다 뚝배기 안에는 구멍 숭숭한 양말들이 눌어붙어 있다 한 숟가락씩 먹을 때마다 불러오는 건 배가 아니라 허기였다
발등에 무화과나무 한그루 심을 수 없다 머리를 주머니에 꾸역꾸역 쑤셔 넣으며 만원이 되길 기다려 보고, 솜사탕을 손가락에 먹여 보기도 한다 돼지 안의 돼지 한 마리 지퍼를 열고 유치원에 간다 비오는 날 대추나무 가지에 네발 사다리를 올려놓고 싶다 아직은 아니라고 안녕, 안녕, 주머니에 넣어둔 만원이 수염을 낳을 될 때까지 잠시 풍선껌을 씹으며 기다려 돼지야
묵은 김치를 꺼내려 김치 냉장고를 연다 숨이 하얗게 끊겨 겨울을 내뿜고 있는, 먼저 돼지와 협상한, 어머니의 손 전화 한 구.
[2010 문학과사회 신인상 시 당선작]
모호한 가방 / 황혜경
지구본을 옆구리에 끼고 수선집에 가던 길에서
명랑한 만세를 외치던 내 친구 붉은 치마를 만났다
수심 없는 얼굴에는 가든에 가둔 가득처럼
종(種)이 다른 꽃들 화려하게 피어났다
붉은 치마의 서랍 안으로 착지하는 새들과 정지하는 말들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가방을 만들어준다고 했을 때
떠오르던 실내
뒤집어도 볕이 들지 않던 실내
안을 떠올린 건 그날뿐만은 아니었다
헌책방 구석에 앉아 누군가 그어놓은 붉은 밑줄을 읽다가
애인여기(愛人如己)를 발음할 때도
서랍 안의 얼굴들 서로서로 겹쳐 보였다
남을 내 몸같이 깊이 사랑한 적 있었나
쌍둥이자리는 질투를 배제하는 별자리라는 걸
비서 아가씨 k가 내 좁은 서랍을 뒤져 읽어주던 그날 오후
눈을 돌려 바라본 밖의 문양들은
뒤늦게 누가 누구를 감싸주는 형태였고
수선집 아줌마는 바지의 앞면과 뒷면을 잘라내고 붙여
겉과 겉을 맞대거나 속과 속을 이어 붙여
바지의 겉과 속으로
가방의 안과 밖을 만들기 위해 바느질을 시작하고
나는 그 곁에서 외부와 내부에 대해 생각한다
외부에 의해 내부가 내부에 의해 외부가 결정되는 일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
그러므로 이후의 모든 생일에 출생할 나는 방 안에서
부고(訃告)란을 맡아 쓰는 아저씨와 밤새 안과 밖의
사람의 붉은 부위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고
또, 잘린 케이크와 시든 꽃 사이로 핏물인지 꽃물인지
얼룩진 치마를 입고 한 아이가 뛰어 들어오다가 밖으로 사라질 것이고
바지의 외부의 바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바지에 의해
가방이 완성될 때까지
나는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를 반복하다가
어려운 가방에 무심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지구본을 슬쩍 넣어본다
무엇이 무엇을 감싸고 무엇이 무엇을 담는지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주위가 깜깜해지고 곧 밝아오기도 하니까
안과 밖의 배후를 갖게 된 가방
수선집 아줌마가 바지로 만들어준 모호한 가방을
나는 하나 갖게 되었다
화장터 / 김기택
굴뚝이 누르스름한 연기를 매달고 있다.
굴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허공이 되지 않으려고
연기가 기체의 손가락으로
굴뚝을 꽉 붙들고 있다.
거대한 허공을 머리 대신 달고 있는
굴뚝 모가지에서
연기가 머플러처럼 휘날리고 있다.
굴뚝 아가리에 머리를 처박고
하루종일 어둡고 긴 구멍을 빨아들이고도
조금도 뚱뚱해지거나 길어지는 일 없이
연기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한 통곡이 끝나면 새 울부짖음이 이어지고
한 장의차가 떠나면 새 장의차가 오고
연기는 땅에 박혀 있는 굴뚝처럼 굳세게 붙어 있다.
- 김기택 시집 <껌> 중에서
제4회 시산맥신인상
소리의 계보 / 안은주
산새가 울고 있는 아버지 무덤에 가보고 알았다
소리에도 무게가 있다는 것을
새 울음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중력 때문이 아니라
잘 익은 소리의 무게 때문이다
새 울음이 공중을 선회하여 몇 바퀴 구르는 것도
몸 안에 웅크렸던 소리가
나선형을 그리며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소리는 새의 몸 어디에 고여 있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저장되어 있던 울음은
숨구멍이 열리는 순간부터
어둠을 거슬러 온몸으로 뜨거워지며
부리 끝으로 가고 있었다
거기서 또 하나의 잘 익은 리듬을
익히고 다듬어냈던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울음이 서서히 말라가는 것도
소리가 빠져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울음과 공명 사이에 더 푸르고 탱탱한 소리를 채워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소리는 따로 문패를 달지 않아도
태초(太初)부터 수억 년을 이어온 계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소리는 죽지 않는다
상여 소리를 타고 날아간 아버지는 죽지 않는다
내 몸이 새가 되고 싶은 것도
날개 보다는 소리의 비밀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탄생과 사랑과 죽음 속에 소리의 비밀이 있다
2011년 평사리문학대상
폐선 / 정순
저녁의 딱딱하고 고단한 파도 한 켠에
세월 하나 뒹굴고 있다
부력의 한쪽을 추억으로 비워낸 듯
기우뚱 균형을 놓아버리고서는 낡은 부피를 달래고 있다
얼핏 보아 고기들의 길을 단념한지 오래인 듯한,
따라온 길 파도에 녹이 슬어 보이지 않는다
저 배도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어느 이름 모를 추억 속에서
며칠이고 향긋한 정박을 했을 것이다
불 켜진 환락의 깊이를 쏘다니거나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이름 모를 물살들에게 운명을 맡기며 추억을 탕진했을,
나 이쯤에서 저 배의 소멸들에 대해 받아내려 한다
기억 속 깊이 끼어 있는 몇 줌의 항해일지와
폐유같은 어둠 저쪽에서 환락을 장만하던
나폴리 마르세이유 요코하마의 날들과
며칠이고 정지된 엔진 근처에서 뜬눈으로 보내던
불임의 위도와 경도를 짚어보려 한다
이튿날이면 폐유처럼 떠오르던 희망이라는 낯선 부력의 위로는
어느 해협에서 배운 악몽이었을까
나는 조용히 언젠가의 서풍이 불아와
가슴 속에서 일러주었던 말이라도 실천하듯
관념 속 무례한 부력을 내려놓고서
노을이 내주기 시작하는 저녁 쪽으로 어스름한 귀향을 한다
2010년 평사리문학 대상 수상작
환승換乘입니다 / 김주명
그날 저녁, 마트에서 조개들을 만났다 사각 비닐 팩에 꽁꽁 얼려져 있었다 내란 음모에 가담도 못해보고 잡힌 유민流民의 형틀 같았다 껍질이 없으니 나와 동족인지 알 수 없지만, 벗은 아픔일까 맨살에서 스며 나온 점액질에 나는 발 묶였다
우마牛馬의 수레를 타고 온 내게 버스는 6분후에 도착한다고 안내판이 일러 준다
바다로 가는 길은 졸음일까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열반에 든 석고 반죽처럼 꿈쩍도 없다 제법 익숙한 노래들을 안내방송이 연신 잘라 먹는다 점점이 어깨 벌어진 네온 간판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사라진다는 생각은 결코 녹아드는 졸음을 가두지 못했다
고개 떨어뜨릴 때 마다 마주보게 되는 얼굴,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바다는 침잠 된 삶의 끝에서 푸르렀다 종점이라고 여기가? 등 떠밀리 듯 내려선 여기는 칼바위 갯골, 손 뻗어 몰려드는 밀물이 내 몸의 손잡이를 잡고 첫발을 딛고 있다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
이화梨花 / 조정인
도처에 금가는 소리 고쳐 베는 봄밤
뚝! 지구 살 트는 틈새로 찬 물방울 듣는다
물방울 없다 마른 이마를 문지르며
내려선 마당
나무, 한 家系 소리 없이 밀리는 미닫이 사이
내보이는 버선발,
낯설도록 흰 저 빛은
전생이 반납한 서랍에서 꺼낸 빛
뿌리의 계보,
빙하시대로부터
둥두렷 떠오른 익사체 얼음 서걱 이는 무명옷,
저쪽 생이 제 모습 되 쏘여 보여주는 거울 앞에
이화와 마주 선 새벽
나무 아래는
밤 새워 누군가 마음 지피던 온기
옹관을 보며 / 이영수
박물관에서 여기저기 깨어진 옹관을 보았다
허리가 잘록한 옹관 속에서 방금 새 한 마리
푸득푸득 알을 깨고 날아간 듯
새알 껍질 같은 흙 부스러기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죽은 자의 육신과 함께 살점을 다 삭아 내린 빈 항아리
새처럼 날아가는 영혼의 소리들이
푸득푸득 옹관 속에서 날아올랐다
두 동간 난 허리를 간신히 이승에 잇대어 놓은 독무덤,
저 독 속에 아직도 빈 껍질 같은 몸속을
빠져 나오지 못한 영혼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리저리 금이 간 빗금 간 독무덤에 새겨진
희미한 쥐 한 마리 독 안에 갇힌 것처럼
주름진 무늬 사이에서 안쓰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독 안에 갇힌 내 길 하나도
내 몸에서 날개 짓을 하는지 꿈틀거렸다
제13회 여수해양문학상 시부문 대상
문패를 단 의자 / 박주희
경남 아파트 뒷뜨락엔
사과나무 그 여자 살고 있다는데요
댓 그루 벚꽃이 팡파레 울리며 꽃비 흥건할 때쯤
발치마다 연푸른 눈 치켜뜨는 풀잎들도
이슬 받아 연두빛 척척 널어 놓는다는데요
비파나무 측백나무 동백나무들마다
누가 굴뚝을 푸르게 세워 놓았을까요
동그란 초록 굴뚝마다 회색직박구리 드나들구요
그 원시의 날개마다 웬 잿빛 투성이래요
아마도 남향으로 난 그대 체온을 나르나 봐요
꽃불 지피며 동박새도 한나절 신나게 드나들다가
하얀 박석들을 층층이 깔아 놓은 이 비탈진 이니스프리
철쭉 봉오리마다 바람꽃빨강 초인종을 달았는지
향기 한 줌 딩동딩동딩동
아기대나무 단풍나무도 바람 한 줌 종소리를 내는데요
사람들은 아기사과나무 그늘이 사는 법을 모르는 게 틀림없어요
햇살마저 그대 체온으로 포도에 번지네요
사과나무, 그늘을 쌔근쌔근 내려놓네요
밤새 칭얼거리던 가로등도 순한 눈빛인데요
가까이 다가서 보면
아기사과나무 그늘이라는 문패하나 달아놓은
어머, 저 해맑은 긴 의자 하나 보이네요
제 13회 여수해양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개성적 시의 세계
문효치(시인)- 계간 미네르바 주간-
시는 시인의 독특한 체취와 개성을 느낄 수 있는 상상적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 예심을 통과하여 선자에게 주어진 작품들은 모두 상당한 시적 성취를 이루고 수작들이었으며 저마다 나름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특히, 입상한 세 분의 작품들은 그윽한 문학적 향기가 풍기며 단아한 형태를 갖춘 수작들이었다
(문패를 단 의자)는 화려한 환상적 세계가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마치 샤갈의 그림을 보듯 다채로운 색채감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세상은 이 시인의 손에 걸려 새로운 세상으로 바뀌었으며 독자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이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 사물에서의 경험을 이 시인은 매우 참신한 경험으로 이동시켜 놓음으로써 창조적 세계를 마련하고 있다.
생각을 언어화하고 정리하여 질서있는 문장으로 만드는 솜씨도 뛰어나 읽는 이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것도 이 시인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자는 이 시인의 작품을 대상으로 뽑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2011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당선작
돼지들 / 이지호
어느 날 돼지들이 사라졌다.
노란 우의를 입은 사나이가 피리를 불었다고 했다. 꽥꽥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돼지들이 따라나섰다고 했다. 돼지를
몰고 가는 바람의 목관에 몇 개의 구멍이 있었다고 했다. 그 구멍 속으로 돼지들이 산 채로 묻혔다고 했다.
마을에 낯선 투명한 음계들이 떠다닌다.
마을의 지하 군데군데가 팽창하고
증오는 모두 네 개의 발자국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고
막걸리잔에 붉은 핏발들이 가라앉았다.
골목엔 안개가 돌아다니곤 했다고 했다. 그 위로 은하 같은 봄꽃이 떨어지고 몇몇은 돼지발굽 모양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돼지들이 사라진 마을에 꽥꽥대는 고요가 돌아다닌다고 했다. 텅 빈 돈사마다 기르던 예의를 가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고 했다.
병든 발굽을 하고 봄이 지나가고 음계의 어느 쉼표에도 돼지들이 살지 않는다.
포클레인 몇 대가 지방도를 따라 꽥꽥거리며 지나갈 뿐
사라진 돼지들이
우적우적 마을을 먹어치우고 있다.
그리고 어제
최씨 성을 가진 한 사내가 빈 돈사에 목장을 맸고 오늘 마을 입구로 포클레인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다.
부유하는 평수 / 이지호
풀숲을 다녀오지도 않았는데
바짓단에 새까맣게 붙어 있는 도깨비바늘을 본다
이 부유하는 씨앗들의 안착지는 어느 곳일까
어쩌다 아파트 17층까지 따라왔을까
걸음이 없는 씨앗
그야말로 공중에 붕 떠 있는 이 고층은 담보의 평수인 것
이곳엔 더 이상 지반이 없단다
풀숲을 나가고 싶었니, 사람을 좋아해 이빨 모양의 악착을 배웠니,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날려주면 좋겠니.
색종이를 다섯 번 접고
마지막 입구는 잠그지 않고 보관해둔다
발 없는 흡착.
아이는 도화지에 우리집을 못 그리고
이 거대한 공중에 우리집은 도대체 어디지?
같은 창문과 같은 평수와 같은 담보대출
문득, 풀숲을 갔다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인데
너무 많은 것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빚도 시절도 도깨비바늘 같은 나이도 뿌리와 줄기를 가진 꽃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은퇴가 있는 수입, 은퇴가 없는 지출
이 적자(赤字) 종자 평수에 달라붙어 있는 도깨비바늘들
하루를 떼어내듯 저녁이 오고 아파트 불빛에 제곱의 공간으로 도깨비바늘들이 달라붙는다.
악착스럽게.
별의 거울 / 이지호
하물며 어느 작은 웅덩이에도
하늘이 담기지 않은 것 못 봤다
비는 먼저 떨어지고 뒤이어 빗방울이 보인다
작은 파문 모양의 꽃들이 빽빽이 피어 있는 저수지
어느 때에는 바람의 일가가
주변 버드나무로 살다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별들의 거울에 오늘은 비가 내린다. 은하에 모여드는 별자리들이 수면에 둥둥 떠 있다. 오래된 청룡이 날아간 뒤로 곡식
의 마디나 키우고 있는 저수(抵宿).* 가끔 작은 파문들이 모여 큰 파문이 되기도 했다.
지상의 물 고인 곳마다 은하계다
그곳에 사람 하나 없겠는가
아침부터 저수(貯水)를 빼고 있는 양수기 몇 대
마을의 어린 행방들이 궁금할 때면 두꺼운 물의 뚜껑을 열곤 했다. 낚시꾼이 앉았던 의자며 온갖 기물들이 모습을 드러냈
지만 그 많던 별과 하늘과 빗방울과 바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하늘이 통째로 사라진 물속
사람 하나 같이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다
물을 먹는 것들은 모두 별자리 모양이다
어제와는 다른 각도로 물푸레나무가 서 있다
* 동아시아의 별자리인 28수(宿)의 하나, 동방청룡 7수 가운데 세번째에 해당된다, 하늘나라 임금이 지방(28수)을 순시할
때 머무르는 궁전이자 휴게실에 해당하는 곳.
견인차 기다리는 동안 / 이지호
산길은 이미 오래전에 시동이 꺼져 있다
갑자기 차는 산언덕 하나 넘지 못하고
쉬어가려는 듯
제일 잘생긴 그늘 하나를 차지했다
어떤 고통을 안고도 편안한 차
비포장의 떨림이 끊어놓은
저 먼 곳의 부위처럼
길 한쪽에 나뭇잎처럼 붙어서
어떤 고통은 지금 편안하다
바람이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다
어스름이 데려가는 나무와 새집은
어디까지 흘러갔다 오는지
그저 어둑한 허공이 지붕이라는 듯
검은 물소리만 둥지를 품고 있다
그사이 오후가 밤으로 견인되고
손바닥에 휴대전화 액정만 밝다
캄캄한 어둠의 이불을 덮고 조용한 시간
부스럭거리는 불안마저도 점점 방전되어간다
끊어진 길
끊어진 시간들이란 이렇듯 깊은 저녁에 들어서야
어둠이라는 동색(同色)에 치유되는 것일까
나도 저 차도 모두 한 어둠에 잠시 끊어진 인연이겠다
멀리 견인차 오는 소리가 구불구불하다
제11회 창비신인시인상수상작: 이지호의 「돼지들」외 9편수상자 약력: 1970년생. 충남대 식품영양학과 졸업.심사위원: 박형준 진은영 강성은 (이상 시인) 선정 이유이지호의 시는 현실을 아우르는 탄탄한 서정성이 가장 큰 장점이다. 소도시나 농촌을 배경으로 한 그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의 운행을 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팽팽한 인식을 놓지 않는다. 운문과 산문을 적절히 교직하여 리듬을 만들어내는 능력 역시 높이 살 만했다. 또한 많은 편수를 투고했음에도 골고루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여준 것이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꽤 오랫동안 공들인 것이 틀림없는 이 신인의 시세계가 앞으로 더욱 무르익을 것임을 의심치 않기에 그를 신인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제6회 지리산문학상
푸른 호랑이1 / 이경림
설렁탕과 곰탕 상이에는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어떤 생의 무릎과 혓바닥 사이에는
어떤 생의 머리뼈와 어떤 생의 허벅지 살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픈 눈과 사나운 관능을 가진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저 높은 굴뚝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푸른 연기와
사라지는 뼈
사라지는 살들 사이에는
낡은 의자에 앉아 곰탕을 먹는 노신사와
그 앞에서 설렁탕을 먹는 시든 달리아 같은 아내 사이에는
그것들의 배경인 더러운 유리창과
산발을 하고 흔들리는 수양버들 사이에는
날개를 빳빳이 펴고 태양 속으로 질주하는 새
반원을 그리며 느리게 불려가는 바람 사이에는, 그래!
미친듯이 포효하는
푸른 호랑이 한 마리가 산다
달밤 / 이경림
-푸른 호랑이4
수천 그루 나무들이 산 하나를 떠메고 가는 장관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정처를 알 길 없는 나는
그 소란이 그저 고요이거니 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언제 한번 핀 적도 없는 벚꽃 아래서 길을 잃거나
산수유들의 노란 허구렁에 눈을 주거나
그 밑에 잠시 똬리 틀고 잠든 초록비단뱀 같은 마음 하나에 끄달리느라
방금 전 그 산이 수만리 저쪽으로 막 달아나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 자리, 처음 보는 나무들이
처음 보는 산 하나를 또 메고 와서는
어딘가로 또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 미친 속도를 무어라 쓸 길이 없어
나는 속절없이 또 고요라 쓰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 이경림
-푸른 호랑이17
내가 네가 아니라고 말할 단서가 어디 있니?
또 네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어떤 혐의도 없잖니?
30년 전에 죽은 그의 소설 속에서 아직도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그녀는 또 누구니?
그렇지만
지금 너는 100년 후에나 지을 집을 설계하며 터무니 없이 즐거워하고
우리는 오십 년 전에 우리가 잃어버린 길에 대하여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지금 막 치타 한 마리가 영양의 무리를 쫓아
TV 속 딱 1분의 사막을 날 듯 가는데 그 1분의 영원 이후
치타가 될 영양 한 마리가 절대로 내가 아니라고
우리는 시치미를 떼야 하지만
그렇지만
약속된 오늘, 502호는 네 번째 인공수정에 실패하고
1005호는 쌍둥이를 낳고 글쎄
연평도가 쑥대밭이 되었다는데
TV가 된 벽이 왜 저리 흥분할까
그렇지만
호성의 한 갈대밭에는 지금 십만 살밖에 안된 어린
공룡의 알들이 화석 속에서 아무도 몰래 부화 중이라는데
너는 애 또 머리카락보다 가는 전화선 속을 걸어와
엄마, 추워 더 따뜻한 자루가 필요해……자구 지지직거리니
그러니까 나는 머리카락보다 가는 너를 보려고
돋보기를 귀에 댔다 코에 댔다……
그렇지만……얘야
못듣는척당나귀귀로무선전화기속에곰곰들어앉은너는
누구니
개구리 울음소리 / 허영둘
이것은 한 마지기 꽃밭이다 이 꽃들은 허공에서 핀다 가지런히, 아니 산만하게 한 음조씩 다른 빛깔로 핀다 꽃은 피면서 자신의 생을 모두 뱉어낸다 꽃 피는 소리에 달빛이 노랗게 익는다 꽃은 향기와 함께 한 계절을 다 떠메고 갈 기세다 허공이 치밀해지고 살갗이 따갑도록 향기가 달려든다 나는 꽃을 피해 봄밤을 닫는다 꽃은 바람이 되어 밤을 잘게 부순다 냄비처럼 꽃은 피면서 자신의 생을 물속에 넣고 삶는다 꽃이 핀다 와글와글 너의 옛날도 한 마지기 두 마지기 조개껍데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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