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허무와 무상, 슬픔 본문
존재론적 허무와 무상, 그리고 슬픔
세상 모든 곳에는 허무와 절망, 슬픔이 있다. 또 그곳에는 사랑과 온정, 순수, 욕망, 희망이 존재한다. 그것은 ‘살아지는 세계’로써 절대적인 것도 아니요 유동적인 것이다.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표현을 달리하는데 예를 들면 뜨거운 해변가에는 바캉스 룩으로 가득하다. 뜨거운 여름날 해변의 사람들은 매직이라도 걸린 듯 미소를 머금고 이리저리 뛰며 물속으로 들어간다. 자유로운 히피의 영혼이 목가적이다. 뜰 안의 자연모습도 마찬가지다. 사과나무는 아침에 찾아온 새에게 자신의 가슴을 내 준다. 영글어 가는 포도는 구술놀이를 하잔다. 호랑나비 노랑나비가 꽃분향기를 전달한다. 붉고 검은 맨드라미가 혓바닥을 바람에 말린다. 이렇게 모든 만물에는 고유의 존재 이유가 있고 실체는 변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여 삶의 끝은 죽음이라는 공통된 종착지에 닿게 마련이다. 꽃은 피고 지는 모습은 인간 존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꽃이 지는 것은 인간존재의 허무함과 대비된다. 돌기둥 틈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서 존재와 허무를 느낀다. 우리 의식, 무의식 속에는 늘 불안과 고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결국 존재의 변화는 곧 존재의 슬픔이요 상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삶,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충족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주의의 운명에는 ‘자연법칙’이 작용한다. 그 가운데서 존재의 순간들을 진정한 삶의 기회, 기쁨으로 만드는 것이 존재의 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혹은 사별을 하던 내일은 다시 찾아오게 마련인데 이것이 존재의 연속성이다. 여기 지금 저기에 있던 사물들을 비롯해 우리들의 슬픔도 우리 내부로부터 멀어져 간다. 다시 말해 슬픔이나 그리움을 어느 한 곳에 남겨 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삶이다.
이글의 주제는 존재론에서 말하는 허무와 무상 그리고 이를 통해 나타나는 슬픔에 관한 것이다. 이런 무거운 주제들, 존재와 비존재의 논의를 위해서는 니체, 하이데거, 플라톤, 헤겔, 싸르트르 등으로 이어지는 지식 계보에서 자주 논의되는 개념들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철학적 입장에서 많이 다루는 존재의 철학 혹은 형이상학적 인간학의 성찰이 필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 칼럼에서는 이들을 불러내서 깊이 있게 논의하기 보다는 귀에 익은 허무와 무상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존재’의 의미를 간단히 찾아보고 끝으로 슬픔이 인간존재와 그 아이덴티와 불확실성의 관계를 성찰하려는 것이다. 존재론적 슬픔은 근원적 결핍감에서 오는 비애 의식으로써 삶이 어렵고 슬프더라도 우리 삶은 계속되고 “나는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본질적 원초적 물음과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실존적/존제론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을 간단히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 해 보자.
존재와 비존재(無)의 관계는 무엇인가?
슬픔의 배경이 되는 존재와 비존재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선 마르틴 하이데거(Heidegger)는《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써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를 말한다. 사물의 의미 및 우리 인식능력을 높이기 위해 존재의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세계와 함께- 세계 내에서- 세계를 마주하는 인간”으로의 현존재(Dasein), 있는 그대로의 현존재를 제시한다. 자신이 늘 이미 만들어진 일정한 세계에서 존재한다는 인간의 존재방식을 강조하는 사유의 개념이기도 하다. 지각의 주체로서 신체가 세계에 작용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현존재의 근본 틀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하나는 세계내의 다른 존재들과의 질적으로 다른 존재(타자관계)이고 또 하나는 이미 지각된(precognitive) 경험을 통해 세계와 관계하는 존재로서 ‘세계- 내- 존재’를 설정하고 있다. 무엇에 대한 작은 관심일지라도 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세계의 일부분으로 세계를 의식하고 규정하면서 자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존재와 의식을 통합하며 존재한다는 점에서 실존이다(Dreyfus, 1991). 우리는 어디인가(공간)에 있고 어느 시간 속에 있다는 것으로 ‘있음’(existential)상태로써 즉 존재-현재(Being- present at)에 있는 것이다.
우리 일상은 다양한 존재들에 포위된 총체이다. 현존재는 “어디 있음”에서 “어디로 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행동은 불안하고 모순적이다. 인간은 불안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자신의 주체성과 관심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살아간다지만 실존적 불안은 필연적이다. 세계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관심에 의해 구성돼 있어서 늘 불안한 존재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유한한 인간의 존재, 고독과 불안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듯이 상품에는 정품과 불량품이 있다. 세계 내에는 타락 분노, 학대, 일탈, 등 불안요소들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불량품이다. 이러한 타락은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우리 존재 내에서 수없이 발생하는 것으로 존재내의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평범한 일들로 삶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여러 모순들, 타락을 현존재내에서 자기의 손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요 한계다. 물론 타락은 진정한 존재가 아니지만 퇴폐적 기쁨, 기괴한 감각은 허망에 빠질 수 있고 존재의 상처를 남기게 된다.
쉽게 말해서 존재론은 있음(有)과 없음(無), 존재(being)와 비존재(non-being)의 관계다. 사물과 나(자아)사이에는 영속성/ 비영속성, 존재/비존재의 관계가 그렇다. 인간은 이런 관계 속에서 누구나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은 존재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한평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존재의 순간들은 즉자/대자관계 이상으로 다양하다. 존재의 순간들은 하루 생활 속에서 깨달음, 계시 같은 것을 느끼는 순간으로 개인이 존재의 실체를 온전히 느끼는 순간을 말한다. 비존재의 순간은 개인이 존재의 그 실체와 유리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다고 인간은 존재의 세계를 살아가지만 비존재 차원을 멀리할 수 없다. 비존재의 세계를 드러내주는 계시자(reveler) 혹은 신들의 세계가 있다. 가까운 예로 신앙생활 속에서 초월성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그림속의 사물을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비존재의 영역을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론은 철학적 소우주의 구조를 이룬다. 존재의 문제는 그리스시대부터 철학의 논쟁거리였다. 사르트르(Sartre, 2009)에서 보듯이 존재(Being)와 무(Nothingness)의 관계는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요 운동과 생성의 관계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며 무(無)를 채워가는 과정이다. 자신이 무언가 결려돼 있기에 이것을 채워서 충실한 존재가 되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와 무의 원리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 즉시 흡수되거나 소실되는 운동이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저편(There)을 향해서 초월하려는 것이다. 존재에서 무(無)로의 손실, 무에서 존재로의 생성이라는 원리가 가능해 지는 이유다. 그래서 모든 존재함은 무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의 정체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하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철학의 영역이다. 당신은 공간과 시간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나름의 자기만의 정체성을 이르며 살아간다. 이름, 몸, 의식, 이미지, 경험, 성격 모두가 당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 같은 정체성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한다. 또 존재론은 사회적이고 사회는 존재론이 된다. 모든 것이 사회 내에 존재하는 것이다. 의식의 지향성은 외부와 연결시켜주는 매개다. 사회 속에서 존재를 발견해가는 것, 그리고 메를리-뽕띠(Merleau-Ponty)가 생각해 낸 ‘존재의 교차’(Intersection of being)가 이뤄지는 곳이 우리의 세계다.
그런데 불안이나 슬픔은 자기가 존재하는 한, 아니면 삶이 자기를 존재케 하는 한은 계속 된다. 버지니아 울프(Woolf, 2002)는 ‘존재의 순간’(Moments of Being)에서 삶과 죽음이란 참 허무하고 아픈 것임을 암시한다. 우리 삶에서 이길 저 길을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영향, 가풍, 신의 계시다. 심지어 한평생 누구로부터 괴롭힘을 받았다는 트라우마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소들이다. 그럴 경우 존재의 순간들이 비존재의 순간들에 묻혀버리는 때가 있다. 존재를 잊고 하루 종일 비존재로 살아가기도 한다. 순간들인 기쁨, 대화, 먹는 것, 옷입는 것, 여행하는 것 모두가 비존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왜 허무와 무상인가
인생 여정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 슬픈 인생이다. 쇼펜하워(Schopenhauer)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무지와 고통은 계속된다.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의 고독은 존재의 불안이요 존재의 허무성이요 무상함이다. 존재의 허무성은 실존적 비극이고 뼈 속까지의 아픔이요 슬픔이 된다. 허무(虛無)의 감정은 삶이 무의미 해질 때 찾아오는 것, 지금의 삶이 무가치하고 헛되게 느껴지면서 오는 허전하고 쓸쓸한 감정이다. 절망과 비관에 휩싸이면 삶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파탄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치명적인손실을 가져 올수 있다. 때로는 허무는 무(無)를 의미하는 허무주의(Nihilism) 혹은 염세주의로 빠질수 있다.
또 무상(無常)은 허무주의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무엇이 변한다는 뜻으로 에너지 의 흐름을 뜻한다. 불가에서는 모든 만물은 계속 변한다는 점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영원성을 갈망하거나 신을 찾게 된다. 무엇이 되기 위한 생명력이 생겨나고 새로운 동력이 된다. 이러한 무상 개념은 불교의 주요 교리로써 범어(梵語)에서 아니타(Anitya)로, 팔리(Pali)어로는 아니짜(Anicca, 영어로는 impermanence)로 불린다. 무상을 뜻하는 Anicca는 지속성 연속성을 뜻하는 nicca에 부정사 ‘a’ 를 붙여서 연성 속의 부재, 영속성의 부재를 의미한다. Anicca는 변전(Inconstant)을 의미하는 불교의 교리로써 △변화(change), △괴로움(Suffering or unsatisfactoriness), △무아(Non-selfhood or insubstantiality)라는 세 가지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반야심경(般若波羅密多心經)에서는 만물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표현한다. 우선 색(色)이란 형태가 있는 것 즉 물질적 현상이며, 공(空)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풀이하면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형체가 없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과 같으며 실체가 없는 것이라도 형체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참 모습은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늘 있는 것도 아닌, 다만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만물의 근원 모두는 하나의 일체, 동체(不二)라는 의미에서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개념이 수립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무상한 현상에는 정신적 물질적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인생무상'이란 말은 염세적이거나 좌절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이다. 무상은 단순히 인생이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일체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 혹은 생주이멸(生住離滅)의 과정을 겪는다는 뜻이다. 모든 사물이 생기고 머물고 변하고 소명되는 과정으로 사물의 무상함을 의미한다. 어떤 현상을 나타낼 때 그 현상은 제한된 시간 속에 있다가 필연적으로 사라지니 그렇다. 즉시 나타났다가 자연 법칙을 따라 사라져 간다. 부(富)와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명성은 무상하고 덧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도 생각도 끊임없이 돌연변이적으로,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은 무엇인가. 현실은 실제이고 지각되는 것이고 비가역적이다. 그 사실은 △나타난 모든 현상은 사라진다. △모든 현상은 무상의 법, 변화의 법(Anicca)을 따른다. △나타난 모든 현상은 한정된 시간을 가지고 있다. 하기 때문에 인간은 시간이 짧다거나 삶에 불안을 느끼게 되고 생명의 절대 한계를 느끼게 된다. 불가에서는 괴로움(고통)을 없애서 무아(無我, 자기부재, anatta)의 경지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서 마음챙김, 명상, 혹은 영적 스승(Guru)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덧붙이면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에서 영원한 것은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상의 진리다. 나아가 무상은 허무라는 문을 넘어 창조와 진화의 궁극적 개념을 갖는다. 무상이라는 말은 슬프고 아름다운 것, 긍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상은 단순한 비관적 허무적인 의미가 아니라 무상하기에 항상 변화가 있고, 변화가 있기에 욕망, 집착, 탐욕을 갖게 된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에 머물게 되고, 이 무상을 상징하는 표현이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덧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무상이요 슬픔이다. 하지만 여기에 정진 수행하며 대처하는 것이 온전한 생명의 길이다.
이쯤 되면 알아차리겠지만 다시 묻고 싶다. “당신 인생이 허무하냐?”고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이 한순간이요 존재가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다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니까 귀하게 살아야지 않는가” 라는 말에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수년전에 본 영화 ‘젊은 날의 초상(肖像)’(곽지균 감독, 1991)에서는 “절망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출발”로 묘사한다. 방황하는 청춘의 긴 여정 속에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도전, 삶의 존재성과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며 허무와 절망을 극복하고 죽음조차도 이길 수 있는 희망을 노래한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 아닌가?"하고 용기를 준다.
존재의 슬픔은 어디까지?
슬픔의 배경에는 알 수 없는 존재/비존재들이 작용한다. 사회적 구조, 법과 규범, 제도, 가치들이라는 비존재 양식들이 작용한다. 우리 삶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또 경험되는 세계 내에 존재 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울타리 속에 갇혀있는 한 마리의 토끼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듯 하다. 자연환경도 존재에 영향을 미치기는 마찬가지다. 비가 안와 가물면 대지도 아프고 우리 목도 마른다.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농장물이 타 들어가는 자체가 존재의 슬픔이고 아픔이다. 영국의 기후 역시 존재들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겨울철인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슬픈 현상이 크게 늘어난다고 한다. 인터넷 사이트(www.sada.org.uk)에 의하면 영국인구의 약 20%가 이 기간 동안에 슬픔((Sub-syndrome SAD)을 느낀다고 한다. 그중 약 2%는 적절한 치료 없이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고 했다.
그 본질로 볼 때 인간은 근원적 결핍감, 존재론적 비애감을 늘 느끼며 살아간다.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위협을 받는다.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아무도 살아서 죽음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브라질 작가 코엘류(Coelho)는 자신의 수필집 ‘흐르는 강물처럼’(2008)에서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 듯 살다가 살아보지도 못한 것처럼 죽어가는 것, 사실 삶이 흥미롭기 보다는 서글픈 일”이라고 했다. “일에만 매달려 삶의 의미를 도외시 한다는 것은 저주”라고 까지 했다. 모든 존재는 어느 순간 사라지게 마련인데 왜 그렇게 여유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느냐고 묻는 것이다. 말인즉 인간은 자신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창조의 원리다. 본질적으로 존재는 무(無)로의 변증법이다.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비극이지만 삶과 죽음, 존재와 무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삶을 만들어 갈수 있다.
한편, 죽음의 반대는 생명의 생성, 창조되는 생명으로써 행복의 길을 추구한다. 칸트(Kant)의 행복론에서는 행복이란 철저히 개인선택이며 각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일을 할 것,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을 권한다(Sissela Bok, 2012). 또한 인생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발견한다. ‘관계론’에서 인간관계는 사회의 본질이다. 세계는 관계이다. 세계에는 불변의 존재성이란 개념은 없다. 존재는 계속 변하고 변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사회적이고 그 안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일회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 정체성과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감정 자체가 모호하다. 이것이 이 글에서 발동을 걸어 놓은 주제다. 삶은 살아갈수록 쓸쓸하고 외롭고 사랑은 흔들리고 괴로움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세상은 뒤죽박죽이다. 존재의 분열, 존재자체의 부정성, 상호모순, 정체성 혼란으로 우리 삶의 존재, 나아가 사회가 불안하고 심드렁하다. 그러니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존적 세계(Existential world)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교섭(Communion)형태 역시 ‘혼란’ 그 자체이다. 익숙한 것이 아닌 낯설은 것, 부분적이지만 극단적인 감각을 갈구하는 존재로써 혼란스럽고 불안하기만 하다. 인간의 세계는 이성보다는 욕망(하이데거에게는 Besorge)에 기초해 굴러가는 경향이 강하다. 욕망에는 끝이 없지만 삶의 에너지다. 그리고 욕망을 추구하지만 ‘세계-내 존재’의 끝은 결국 죽음이요 슬픔의 끝 역시 죽음이다. 죽음은 현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헝가리 여류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The Third Lie, 2014)에서는 인간존재와 그 아이덴티의 불확실성을 고발하고 있다. 살인, 강간, 수간(獸姦), 근친상간 등의 충격적인 비도덕적인 행동이 나온다. 남편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여직원, 한권의 책을 쓰겠다는 알콜중독자 서점주인, 자신의 출생비밀을 모르는 불구의 소년, 동성연애자인 공산당 간부, 늙은 불면증 환자, 아버지지의 딸을 낳고 방황하는 처녀 등에서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을 암시한다.
가령 이런 내용에서 그렇다. 소제목 ‘타인의 증거’에서는 근친상간에 빠지는 아버지와 딸의 욕망, 아버지의 아이를 갖는 딸의 모습에서 이를 찾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몸을 기울여 거기를 핥고 키스해 주더군.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내 몸을 덮쳤어. 아버지는 당신의 성기를 내 넓적다리 사이에 밀어 넣었어. .....우 리는 그런 식으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어느 날 밤은 내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어. 아버지를 맏아들이고 싶은 내 욕망이 극에 달한 거야. 난 다리를 벌렸어. 그것도 완전히 벌려서 아버지가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지”(228쪽)
이러한 존재론적 불확실성, 비관적인 사건들은 예술적 작품들에게서 많이 다뤄진다. 작가들의 창조적 표현 역시 주변세계와의 대화이고 의미(meaning) 찾기다. 대상(객체)에 대해 창조적인 표현을 통해 불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실존을 부여한다. 예술가가 세계- 내- 존재로서 유일한 아름다움 진실을 표현하는 것처럼 예술가 역시 마찬가지다. 즉 예술가(작가)- 내에- 진실 된 존재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자유의 표현이다.(주니어, 1996)
그렇게 볼 때 문학의 산물은 바로 사회적 생산과정이요 감각의 내재적 존재론이다. 자신의 의미세계를 구성하고 삶의 스타일을 구축해 가는 것은 작가의 개인적인 자유요 사회 참여다. 예를 들어 김춘수, 정호승 시인을 비롯해 많은 문학가들을 통해 존재의 슬픈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존재에 대한 부정 혹은 회의, 거부 등으로 지각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선 김춘수(金春洙) 시인의 ’구름과 장미(1948), ‘부다베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에서 존재의 슬픔‘을 엿 볼 수 있다. 꽃, 가을의 저녁시, 처용단장, 부재, 푸서리, 불나비 등의 시에서 비애 의식을 느낄 수 있다. 눈물을 흘리는 감정, 슬픔과 울음이란 시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유의 모든 측면, 즉 슬픔과 동시에 실존적 아름다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정호승(鄭浩承)시인의 작품에서도 역시 비슷하다. <슬픔이 기쁨에게>(1979) <허허바다>에서 허무적 비애이식이 묻어난다. ‘슬픔이 기쁨에게’서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 가겠다”고 노래한다.
또한 ’허허바다‘에서는 “.....살아도 산 것이 없고/ 죽어도 죽은 것이 없네/ 태풍이 지나간 허허바다에/ 겨자씨 한 알 떠 있네“ 라고 했다. 시인은 기다림의 슬픔까지, 작고 작은 겨자씨 하나가 떠 있는 것처럼 존재론적 슬픔을 품어낸다. 이렇게 시인들은 존재와 허무를 느끼면서 시어를 찾아내고, 그리고 문자가 설명 못하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 채우려고 웅얼대는 모습이 아니었던가. 세상의 모든 존재는 결핍감정 때문에 서로 부러워하게 마련이다. 자기가 소유하지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상대를 부러워한다는 말이다. 노인은 젊음을 부러워하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를 부러워할 것이고, 권력자는 건강을 살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가까운 친구의 떠남, 유전적 장애(외상), 심지어 애완동물의 손실 등에서 슬픔을 느낀다. 또한 늙으니 숲과 같이 무성했던 머리칼이 빠져 나가고 치아가 빠지고 얼굴에는 죽음의 흔적들이 어른거린다. 늘 존재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형국이다. 모든 존재는 무(無)로 돌아가는 것, 꽃이 피고 지는 순간에서도 슬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두려움, 불안, 슬픔을 넘을 수 있다. 세상은 고독과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힘도 있다. 우리의 후회가 무엇이고 슬픔이 어떤 것이고 무상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 생명의 의지가 살아나게 된다. 말을 바꿔 불안이나 슬픔이 없다면 그만큼 희망이나 자유가 없을 것이다. 한 잔 술로 온갖 시름과 슬픔을 잊거나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 자기 삶을 긍정하지 못한다면 생기를 잃고,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인 삶으로 변할 것이다. 때문에 무언가 없기(무)에 위태롭지만 모험을 하고 혁명을 하고 도전하는 것이 우리 삶이다. 시간의 폐허위에서 ‘재생’을 기대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인간으로 완성돼가는 과정이다.
끝으로 이글을 읽었다면 잠시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처다 보며 힘을 얻으라. 그것이 우리 삶의 존재방식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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