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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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작품

개지네의 눈빛

연안 燕安 2016. 4. 5. 21:04
 

개지네의 눈빛
달 뜬 산자락 빛바랜 산장
샤워 꼭지를 틀자마자
욕조 수챗구멍에서 
허겁지겁 벨리 댄스를 추며 기어 나온 
너는 참 운이 좋은 거야
임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쯤 저세상에서 멋진 환생을 꿈꾸고 있겠지
물바가지 타고 도톰한 손목 따라 
어둠에 젖은 화단 모래밭 위 
백억 년의 고독이 들어찬 백억 광년의 공간 속에서
독을 품은 수십 쌍의 다리를 풀어 놓고 
가슴 누르며 한숨 몰아쉬는  
너의 망설임은 너무나 감동적이야
저승 문턱에 휘청거리는 두 다리 걸치고
빠득빠득 버티고 있던 나처럼  
그래, 우리는 반만년 전 따뜻한 별빛을 나누고 있는 거야
파랗게 빛나는 판유리 같은 너의 눈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세상이 보여
늘 내 눈에 보이던
얼락배락 요지경 같은, 굴속의 뱀 같은 삶이 아닌 
오월 훈풍이 누비는 세상 
눈부신 대낮보다
머릿속 깊은 호수 같은  
어슴푸레한 달밤에 
세상의 모습은 더 환한 것 같아.
-- 계간 시에 41호(2016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