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최금진 본문

한국의 시인들

최금진

연안 燕安 2014. 9. 9. 05:56

 최금진 시인

 

 

출생충북 제천시

데뷔2001 제1회 창작과비평 신인시인상

학력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졸업

 

 

 

 

웃는 사람들 

 

 

 

웃음은 활력 넘치는 사람들 속에 장치되어 있다가
폭발물처럼 불시에 터진다
웃음은 무섭다
자신만만하고 거리낌없는
남자다운 웃음은 배워두면 좋지만
아무리 따라해도 쉽게 안 되는 것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난다
계층재생산, 이란 말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그려져 있는 어색한 웃음은 보나마나
가난한 아버지와 불행한 어머니의 교배로 만들어진 것
자신의 표정을 능가하는 어떤 표정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웃다가 제풀에 지쳤을 때 문득 느껴지는 허기처럼
모두가 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웃음은 배가 고프다
못나고 부끄러운 아버지들을 뚝뚝 떼어
이 사람 저 사람의 낯짝에 공평하게 붙여주면 안될까
술만 먹으면 취해서 울던 뻐드렁니
가난한 아버지의 더러운 입냄새와 땀냄새와
꼭 어린애 같은 부끄러움을 코에 귀에 달아주면
누구나 행복할까
대책 없이 거리에서 크게 웃는 사람들이 있다
어깨동무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웃음들이 있다
그런 웃음은 너무 폭력적이다, 함께 밥도 먹고 싶지 않다
계통이 훌륭한 웃음일수록,
말없이 고개 숙이고 달그락달그락 숟가락질만 해야 하는
깨진 알전구의 저녁식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참고 견디려 해도
웃음엔 민주주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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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과 감상> 

   어떠한 웃음을 웃어야 진실된 웃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시는 부조리한 이 시대의, 작위적으로 가공된 모든 웃음들에게 솔직한 일격을 가한다. 他에 편향된 아부의 웃음, 안팎이 다른 냉소적인 웃음, 혹은 어쩔 수 없이 웃어야 하는 어색한 웃음, 가면의 웃음을 드러내는 연출적 웃음을 웃어야만 하는 것이 곧 이 시대적 실상인 것이다. 이러한 갖가지 허구적인 웃음의 배후와 그 표정들 속에서 진솔한 의미의 웃음이란 과연 어디로 실종했는지를 이 시가 묻고 있다. 
   최금진 시인은 충북 제천 출생.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1년 창비신인시인상.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가 있으며,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

                                                                                                           <신지혜 시인>

 

 

 

 

 

평화, 평화로다

 

 

밥을 먹을 때, 어머니와 마주앉지 않는다

아이들 생활이며, 왜 신발을 꺾어 신는지를 묻지 않는다

식사를 다하면, 설거지통에 수저와 그릇을 갖다놓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면

이상하고 불행하고 조금은 행복한 나라가 깃든다

나는 애완견을 씻기지도, 먹이를 주지도, 때리지도 않는다

쓰다듬지도, 눈빛을 주지도 않는다, 그냥 맘대로 짖다가 죽을 권리가 있지 않은가

식구들이 TV를 보며 웃는 소리 속에 잠깐씩 내 헛기침이 끼어들고

누가 볼륨을 줄이고, 또 웃고, 또 조용해지고, 그러다간 마침내

각자 제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이상하고 불행한 평화를 위해

나는 조금은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걸까

밤중에 거실에 나가 서 있으면, 잠들지 않은 개가 나를 바라본다

개는 나를 안다, 나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

나는 어제 목검 3종 세트를 홈쇼핑에서 구입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가장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물러나고, 스스로 도태된다

비가 새는지, 수도꼭지가 부러졌는지, 형광등이 나갔는지

이 조용하고 지루한 평화를 보수하기 위해선 

말을 아껴야 한다

개에게 저녁밥을 한 차례 더 주고, 나는 팬티바람으로 거실에 서서

목검을 휘두르며

어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두려움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아이들은 벌써 훌쩍 다 크고

나는 어머니와는 절대 밥을 함께 먹지 않는다

 

 

 

 

부족한 거리, 초과한 거리

 

 

내 시선은 당신에게 이르지 못하고 어디쯤에 멈춰버렸다

나는 그 거리가 두려움 때문에 생긴 거라 생각했다

당신은 두려움은 사랑이 아니라 했다 

겨울 나무 줄기들이 쳐놓은 엉성한 그물에

아름다운 여자들이 잡혀 뼈만 남은 노파가 되는 걸 보았다

손을 뻗으면 하늘 한쪽이 가만히 휘어졌다가 튕겨져 나왔다

투명한 고무공, 작용과 반작용, 악수와 거절

감탄사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역사를 물고 

새들이 곤두박질쳤다, 나는 함부로 살지 않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외눈 안경을 쓴 당신을

가끔 돌아오는 골목에서 몰래 훔쳐보곤 했다

당신은 나를 초과하거나 아니면 턱없이 내게 부족했다

양 극단을 오가며 어제 쓴 편지를 오늘 다시 지웠다

너무 긴 이야기, 사랑은 이렇게 계속 지체되는 것이 아닐까 

원시의 당신이 근시인 나를 응시하듯이 

귀가 없는 눈송이들이 종일 들판에서 저희들끼리 

더듬더듬 녹고 없어질 말을 엮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어디쯤, 나와 당신이

서로 등을 대고 걸으며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당신은 나를 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걷는다

 

 

어두워지면 평화가 졸음처럼 내린다

내 사주팔자에도 비가 내리고

그 가느다란 줄을 타고 올라가 오늘은

죽은 자들의 천당이나 유람할까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놓고 죽은 자는 

이 밤에 몰래 물안개 속에 섞여 내릴 것이다 

집 나온 지 삼 년이 넘었고

사람의 고독을 오리고 붙여 모빌을 만든다면 

뎅그랑 뎅그랑 맑게 울리는 풍경 소리가 날 것이다

아들아, 부디 용서하지 말아라

빗속을 혼자서 걸어가면 

누군가 내 등 뒤에 있고, 그건 죽은 노인들

사람에게 내리는 하루치의 일용할 어둠은

잠들기엔 더없이 적절하고

술을 먹었으니 한동안 평화가 왕 노릇을 하겠구나

아들아, 나는 사람을 한참 넘어섰다

멀리 지평선엔 하늘과 땅이 한 몸으로 누워있고

두렵지만 평화는 넘친다

기다리지 마라, 죄책감 갖지 마라

돌아갈 길의 숨통을 

어제쯤 끊어놓았다 

 

 

 

 

깨끗한 말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드름은 함무라비왕이다

악랄함을 척추처럼 곧추세우고 걸어 다니는 저 막대기들을 보라

자신만을 위한 냉혹한 동정심을 보라

누가 잘라다 버린 대나무인지, 쇠파이프인지

놈들은 퉁명스럽게 골목길에 창살을 친다 

봄이 와서 대지에 푸른 이빨이 돋으면

여기저기서 으깨진 토마토 즙 같은 꽃들의 주둥이가 터지고

솟구치며 서로서로 힘을 겨룬다

쾅쾅 바람 속에다 고드름이 못을 박는다, 법전을 읽으며

민사소송 같은 자질구레한 새싹들이며, 씨눈들이 앙앙거릴 때

똑 분질러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찌르고 싶은 놈들, 정수리를 대바늘로 꿰매주고 싶은 놈들 

방망이를 잔뜩 겨누고 있는 4번 타자처럼

도전하면 응전하고, 던지면 맞대어 때려줄 기세로

선지자의 흰 수염, 구름을 타고 온 신령의 지팡이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저 아래 억센 뼈다귀처럼 몸을 세우고 다니는 놈들에게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일어나는 독뱀 같은 놈들에게

깨끗한 말씀이 되어, 기를 모은 무사처럼 

철사장, 촌철살인, 쩡, 쩡, 처마 밑 그늘을 쪼개고 있다 

 

 

 

 

귀뚜라미와 나  

 

 

불길한 감정은 더듬고 싶지 않다, 는 애인의 말이 귀엽다 

가을은 사랑을 포기하게 만든다, 깔깔

우주까지는 깡총깡총 뛰지 못하고

고작 은신을 위한 얇은 비닐막 같은 원룸에서 

우리는 겨우 날개를 바스락거린다

플라스틱 병에 누가 우릴 가두고 장난치는 건 아닌지

머리, 가슴, 배로 나누어지는 신체의 각 기관들은 

명료하게 영혼의 위치를 지시하지 못 한다

등이 넓은 아스팔트에 올라타 세계를 유랑하고 싶다

이랴, 이랴, 회전목마를 타는 아이들처럼

출처도 없고 인용도 없는 밤이 한 페이지씩 돌아오고

나를 위로하는 건 애인의 거대한 알집과 음부

다음 세상 같은 건 없다, 는 애인의 말이 근사하다

지하철역에서 날개를 비벼 노래를 구걸할 수도 있지만 

근원이나 영원, 미래 같은 단어는 엿 같다 

욕 하는 내 입을 애인의 입술이 핥아준다

관절을 분질러서 화분에 심어 놓은 여름도 가고

오늘 하루 살고, 내일은 멀리 날아가서 죽자는 애인의 말이 

어떤 명언보다 더듬이에 잘 잡힌다

지하실에 귀뚜라미들이 시커멓게 모여드는 가을이 왔다 

 

 

 

 


 

<시인의 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 노새처럼 뚜벅뚜벅 내 길을 가자.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참 대견하고 기특하다. 

 

 

작품론

 

삐딱함의 연원

- 최금진의 시 읽기

 

이근화(시인)

 

 

  1. 삐딱한 금진씨

 

  최금진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도봉산 초입에 자리 잡은 김수영 시비 앞에서였다. 김수영과 관련된 책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사오 미터의 거리에서 목례를 하는 최금진 시인을 나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간 시집을 읽고 가졌던 인상과 달라서였던 것 같다. 생각보다 준수하고 말끔했다. 그가 그인 줄 알았더라면 훨씬 더 반갑게 인사했을 터인데 시간이 지나 그게 좀 아쉬웠다. 그 이후에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대담을 하면서 나는 그가 우직하면서도 명민하고 순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감이 가는 시인인 셈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최금진의 시선은 삐딱한데 그의 ‘비딱함’은 상당히 매력적인 데가 있다. ‘비딱함’이란 대체로 태생적인 면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대체로 그의 시는 가난한 가족과 이웃들의 삶을, 그러한 삶을 양산하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그리고 있다고 평가받는 것 같다. 한국시의 서정성이 얼마간 이촌향도(도시화와 이주 속에서 발생한 상실감과 고독의 정서)와 실패한 남성들에 빚지고 있다면 그의 시는 힘 있는 서정성을 지니고 나타났던 것 같다.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여전히 우리를 옥죄고 있는 ‘한국식’의 오랜 굴레를 경험하게 된다. 나는 그의 시가 번역된다면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의 숨결을 생생하게 전달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재와 정서, 어법과 이미지의 차원에서 모두 그렇다.

  어쩌면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많은 사람들(조상이라는 거대한 유령들)을 자각하는 것은 특별한 사회 환경이나 배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들의 목소리와 숨결을 어떻게 불러내는가이다. 그것은 내 몸 안에 축적된 과거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또 먼 미래를 전망하는 일이다. 그 방향이 쉽게 보일 리 없다. 그렇더라도 “다들 어디로 가나” 되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않을까. 늘 우리가 궁금해 하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바로 그 질문 말이다.

 

 

내 꿈속에 오는 빼빼 마른 조상들은

왜 둘씩 셋씩 숨죽이고 앉아

한국식으로 육회를 먹나

피 묻은 쇠고기를 허겁지겁 맨손으로 떼어먹나

손등까지 싹싹 핥아먹고

굶주린 개들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들 어디로 가나

(...)

내 가느다란 팔다리마다 최씨들뿐이다

서른다섯 해를 살아도 내 몸엔 온통

가난하게 살다 죽은 최씨들뿐이다

최씨들은 왜 모두 얼굴이 길어

왜 웃을 때 당당하게 남을 똑바로 못 보고 웃나

우리가 죽어서 코끼리들처럼 서로 만난다면

그렇게 모여서 다들 어디로 가나

상아 같은 흰수염을 뽑아 쌓아놓고 우리는

또 어떤 가문에 나서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 초원을 떠도나

 

-「다들 어디로 가나」 일부,『새들의 역사』, 창비, 2011, 16-17면.

 

 

  ‘나’와 함께 시간을 나눈 할머니나 육촌 형님은 기억 안에 존재하는 이들이고, 기억 밖의 조상들까지 귀신이 되어 꿈속의 ‘나’를 찾아온다. 시시때때로 그들의 방문을 받게 되는 것은 죽은 이들이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육체에 남긴 흔적(닮음)이나 정신에 남긴 유전(성격)으로 인식된다. 죽음을 경계로 분절되지 않는 것이 조상이고 가계다. 또 언젠가 닥칠 ‘나’의 죽음 역시 ‘최씨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죽은 ‘나’와 조상들의 만남 혹은 재생이 ‘코끼리’에 비유되는 것은, 그러한 비유가 필요한 것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을 여전히, 끝끝내 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떠돌지 모를 생사의 긴 고리들에 대한 풀리지 않는 질문은 ‘상아 같은 흰수염을 뽑아’, ‘커다란 귀를 펄럭이며’와 같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입음으로써 생사의 무의미함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허무라기보다는 어쩌면 승인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생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을 끌어안고 묵묵히 가는 자의 모습을 이 시는 보여준다.

  위의 작품에서 조상들이 ‘가난’의 외피를 둘러쓰고 나타난다면 「새들의 역사」에서는 가난의 또 다른 짝 ‘떠돎’과 관련되어 가족들의 삶이 형상화된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난생설화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배꼽이 없다”는 첫 행의 선언적 진술은 평생을 나그네처럼 떠돌았던 가계 남자들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날개’라도 단 것처럼 여기저기 방황하는 최씨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새들’이고 나 역시 “어서어서 자라서 훨훨 날아”갈 운명 앞에 놓였다. 정착하는 대신에 끊임없이 떠돌고 방황하는 것이 핏줄의 내력인 까닭에 최씨 집안의 내력은 ‘새들의 역사’라 불린다.

  문제는 ‘코끼리’나 ‘새’에 비유한 것 자체가 아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운명에 직면하여 다른 대상들이 개입되면서 서술어가 대체되고 그 난제들이 활력과 에너지를 얻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 에 직면하여 선회하는 이 작업은 상당히 고되고 지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비딱함’은 이 작업의 성실성과 끈기에서 왔을 공산이 크다.

 

 

  2. 독해와 기록

 

  좋은 문학 작품은 삶의 면면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독특하게 해석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최금진의 시는 가족사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사실 언제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건과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어머니의 이야기는 사내들/그녀의 이야기로 확대되고 작품 안에서 그들은 이 땅의 많은 이들이 지을 법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보편성이야말로 한 개인의 가족사를 뛰어 넘는 의미를 갖고 있는 지점이다. 이러한 제재적 측면보다 그의 유려하고 빼어난 비유와 진술에 미덕이 있기는 하다. 사건을 호출하여 재해석하며 배경과 자연물을 배치하고 해석하여 조응하게 하는 힘을 그는 보여준다. 그의 시의 어조는 고통과 울분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아래는 그러한 감정을 통어하는 또 다른 ‘나’가 있다. 이 다른 ‘나’에 의해 독해와 기록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작업에 의해 승화의 에너지가 발생한다.

  독해와 기록의 주체로서 최금진 시의 ‘나’는 생사의 굴레가 곧 환희의 출구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고, ‘생’의 고통을 철저하게 그리면서 ‘잠/죽음’이라는 환희 쪽으로 그것을 이동시킨다. 그의 두 번째 시집 『황금을 찾아서』의 첫 시와 마지막 시는 그러한 면을 보여준다. 

 

 

아직 숨이 붙은 꿩은 깡충깡충 갈잎을 물고 달아나고

그 뒤를 따라가 나는 발로 걷어찬다

놈이 살았다면 커서 황홀한 날개의 장끼가 되겠지

애비도 없이 자란 나는 밭둑에서 꿩을 줍는다

숨이 끊어질 때 죽음은 싸이나처럼 몸에 황홀하게 퍼졌을까

인간과 꿩 사이에 언제까지나 이런 장면들이

반복될 거라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

나는 머리를 오동나무에 대고

왜 이 모든 풍경들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지가 궁금했다

해마다 눈은 내릴 것이고 꿩들은 배가 고플 것이고

나는 죽음 아버지 함자를 까먹지 않기 위해

손톱을 세워 나무에다 새겨넣었다

 

-「산꿩이 우는 저녁」 일부,『황금을 찾아서』, 창비, 2011, 8-9면.

 

 

  「산꿩이 오는 저녁」은 싸락눈이 내리는 저녁 꿩 사냥을 하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부재는 고모부의 말과, 약을 먹고 맥없이 누워 있는 굶주린 산꿩의 눈동자를 통해 확인된다. 이야기의 바깥은 꿩 사냥이지만 그 안에는 ‘채찍처럼 사나운’ 결핍이 있다. 숨이 겨우 붙은 꿩을 발로 걷어차며 “애비도 없이 자란” 내가 밭둑에서 던지는 의문들은 그 자신의 삶과 집안 내력을 요약해준다. 꿩 사냥의 장면이 반복될 거라는 예감, 저녁의 풍경이 내 몸 깊숙이 파고드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그런 의문들을 품은 해 “죽은 아버지의 함자를 까먹지 않기 위해 손톱을 세워 나무에다 새겨넣”으며 가계와 자신의 운명을 들여다보게 된다.

  밭둑에서 약에 취한 꿩을 주우며 죽은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는 ‘나’는 그 풍경에 속한 자이지만 그 풍경에 갇힌 자는 아니다. 이 시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그러한 풍경 속에서 빠져나오기를 절실히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해마다, 모든, 언제까지나 등의 부사가 아버지의 부재와 그 결핍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생사의 굴레가 반복될 거라는 사실의 표면을 지시하지만 ‘산꿩이 오는 저녁’의 슬픔과 허무에 대한 한편의 아름다운 기록은 균열된 상처를 봉합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의 죽음과 부재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날마다 일정한 제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 제의를 통과해내며 세세히 기록하고 해석하는 자이다.

  천운영의 소설 「엄마도 아시다시피」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아들의 몸부림을 볼 수 있다. 멀쩡하고 준수한, 비교적 사회화가 잘 된 이 남자도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결국 제사상 앞에서 여장(한복과 화장)을 하고 나타나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다른 가족들을 큰 충격과 혼란에 빠뜨린다. 이 느닷없는 돌출 행동이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몸부림이며 그것을 벗어나려는 충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있다. 그 앞에서 언제나 무너지고 마는.

‘죽음’이 부재의 형식으로 결핍감을 발생시킨다면 ‘잠’은 내 육신으로부터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의 한 형태일 것이다. 우리는 그보다 더 효과적으로 멈출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이 멈춤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이상한 죽음의 형태이다.

 

 

잠이 산수유꽃 같은 등불을 몸에 켜놓는다

나는 섬진강변 구례 어디쯤

꿀벌들이 오물오물 꿀물을 씹는 봄 햇볕 아래를 지나고 있을까

잠엔 자동항법장치가 있고, 내 육신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이런, 너무 늦었군, 화를 내고 있을까

거리엔 온통 잠들이 바퀴에 사람들을 얹고 배달 다닌다

식기 전에 마시는 잠은 우유를 넣은 홍차처럼

인생을 느슨하고 부드럽게 해준다

어떤 사람의 잠은 다 식어 하얗게 응고된 촛농처럼

그의 머리맡에 떨어져 쌓인다

그는 불 꺼진 삶을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 것이다

완벽한 잠을 원하는 사람은 현실도피자가 아니다

초저녁, 달이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가느다란 팔을 창틀에 걸치고 앉아 지구를 바라본다

그 곁에 나란히 기대어 몇벌의 잠을 더 갈아입어도 좋다

(...)

 

-「구례 어딘가를 지나가는 나의 잠」 일부, 『황금을 찾아서』, 창비, 2011, 120면.

 

 

  잠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등불’처럼 환하고 ‘꿀물’처럼 달콤하며 ‘달’처럼 아름다운 세계가 잠과 함께 펼쳐진다. 구례 화엄사로, 유년의 모래톱으로 달려갈 수도 있고 죽은 친구를 불러올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내 육신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잠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하는 작은 위로”이다. 잠은 여러 결이 있어 딱딱하면서도 출렁이고 무늬가 있으며 축축하기도 하며 새록 돋아나기도 한다. 돌멩이와 빗줄기와 꽃봉오리의 형상으로 잠은 다가온다. ‘발끝까지 환한’ 잠의 세계에 취한 ‘나’는 무력하기보다는 즐겁다.

  「구례 어딘가를 지나가는 나의 잠」을 읽으며 잠의 혼몽함을 이렇게 멋지게 그린 시를 읽어 본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더러 꿈속에서 숲과 호수 위를, 산맥과 강줄기를 따라 날아다닌다. 바람을 타고 자유자재로 내 몸을 움직일 수가 있다. 도둑을 때려잡기도 하고 즐겁게 추락하기도 하며 숨을 곳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이 때 나는 나이면서도 나를 벗어나는 환희를 맛본다. 이런 감각적 착란이야말로 현실 세계에서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꿈의 일부일 것이다. “인생을 느슨하고 부드럽게 해주”는 잠이야말로 인생의 보약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한 편의 아름다운 시에서 가계의 불우한 삶과 어쩌지 못한 운명을 노래하던, 도시화된 삶의 불모성과 그 안에서 패배한 자의 목소리를 힘 있게 제시하던 최금진의 시가, 고통에서 환희 쪽으로 이동할 수 있음을 엿보았다. 그 단초는 여러 편의 시에서 ‘달’과 ‘나무’가 또 다른 ‘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소재로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시에서 달과 나무를 바라보는 일은 종종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과 통한다. 인간에게 거울 이상의 명약이 없다면, 그건 거울이 나를 정직하게 비추면서 또 상당히 왜곡한다는 점에 있다. 이 구부러짐이 없다면 살면서 ‘나’를 용인하기는 참 어려울 것 같다. 대상을 통해 되비춰지는 ‘나’를 들여다보는 것 말고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답을 구할 수 있겠는가.

 

 

  3. 대화와 유머

 

  시적인 중얼거림은 ‘나’의 독백처럼 읽힐 때가 많지만 사실은 많은 경우 대화이다. 무엇과 어떻게 대화하는지가 중요할 텐데 최금진의 대화는 주로 과거 시간들을 불러내고 그 내력을 밝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함께’ 아픈 것들이 줄줄이 불려나온다. 그런데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함께할 때 우리는 서로를 감염시키고 슬그머니 웃음과 유머가 발생하기도 한다.

 

 

혼자 돌아서는 어두운 골목 끝에서

세상 가장 무서운 공허와 마주치는 사람아

서둘러 다음 페이지를 넘겨놓고

뻔한 결말과 대면할 때

냄새나고 누런 네 입에

웃음을 가르쳐라, 웃음이 가장 맛있다

야간 노동자인 달이 따라 웃는다

배고픈 공장 유리창들이 입을 덜컹거리며 웃는다

 

-「나는 만화책이다」 일부,『황금을 찾아서』, 창비, 2011, 107면.

 

 

  코믹 만화를 제일 좋아하는 나와 머리맡의 유머를 강조하는 어머니, 요절한 아버지의 미친 듯한 웃음은 모두 현실의 괴로움이나 고단함, 열등감과 나란히 놓인다. 그러한 감정들이 만화책과 유머와 웃음을 교훈 삼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만화책이다」의 ‘웃음’은 쓰고 아프다. 더 많은 경우 최금진의 시는 뿌리 깊은 절망감과 그것을 형상화하는데 바쳐진다. 도심 한가운데서 느끼는 절망감은 「원룸생활자」에서 양파를 바라보는 심정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낡은 다방에 모인 사내들의 모습 속에서 폐수처럼 고이고 썩어가는 분지의 형상을 읽는 것이 「분지」이다. 그나마 위의 「나는 만화책이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이 그리 불행한 것만도, 고통에 찬 것만도 아니어서 조금 다행스럽달까.

  나는 편혜영의 소설 「해물 1킬로그램」을 읽으면서 이 시의 ‘웃음’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에는 뜬금없이 웃어서 곤경에 처하는 인물이 나온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진지한’ 모임에서 엠이 이야기를 하는데 딴생각에 빠진 케이가 느닷없이 웃는 바람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오해를 푸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의 전이인 것 같다. 슬픔도 기쁨도 쉽게 옮아간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건들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엠은 케이가 재래시장 해물 코너에 서 있는 것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는데, 자신 역시 남편과의 저녁 식사를 앞두고 해물 1킬로그램을 사든다. 뚜렷한 계획도 목적도 없이 사든 해물 한 봉지를 들고 집으로 가면서 엠은 케이의 느닷없는 웃음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케이는 아이를 찾기 위한 전단지에 ‘앞니 빠짐’이라고 썼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던 것이다. 엠이 ‘쌍가마 있음’이라고 적었던 것처럼 작은 실마리라도 붙잡고 싶었던 절실한 마음이 여지없이 거부당했을 때 그들은 무력한 절망감에 빠졌고 그것은 영원히 치유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삶속에서 터져 나오는 ‘이상한’ 웃음을 우리가 승인하지 않는다면 하루하루 숨 쉬는 것이 정말 어려울 것도 같다.

 

 

  4. 고통의 현상학

 

 

(...)

당신은 나를 초과하거나 아니면 턱없이

내게 부족했다

양극단을 오가면 어제 쓴 편지를 오늘 다시 지웠다

너무 긴 이야기, 사랑은 이렇게 계속 지체되는 것이 아닐까

원시의 당신이 근시인 나를 응시하듯이

귀가 없는 눈송이들이 종일 들판에서 저희들끼리

더듬더듬 녹고 없어질 말을 엮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어디쯤 나와 당신이

서로 등을 대고 걸으며 자꾸만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당신은 나를 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족한 거리, 초과한 거리」 일부, 신작시 중에서.

 

  글의 시작에서 나는 최금진 시를 놓고 ‘한국식’이라는 말을 잠깐 썼다. 써놓고 보니 좀 불편하고 해명이 필요한 말 같다.

  얼만 전 대학로에서 <달무리>라는 연극을 보았다. 예전에는 종종 보았지만 이제는 즐겨 찾아보게 되지 않는 연극말이다. 시라는 장르도 좀 그런 것 같다. 그 내부의 들끓는 에너지에 비해 조금 빗겨서 보면 촌스럽고 부적응의 장르처럼 보인다. <달무리> 역시 크게 감흥을 주지는 않았다. 고아원에서 자란 한 처녀가 접신의 고통을 느끼며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아 작은 섬에 찾아들어가는 이야기다. 어머니 역시 신을 받지 않기 위해 무당인 어머니를 거부하고 도망갔으나 불행은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남편과 큰 아들을 바다에 잃고, 작은 아들마저 바보가 되고, 무당의 피를 물려받을까 두려워 일찍이 고아원에 보내버린 딸이 찾아온다. 어머니가 거부한 신의 부름을, 끝내 딸이 받게 되는 스토리가 대물림 되는 정신과 육체의 영역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이었지만 그보다 연극에서 반복되는 한 대사가 더 한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죽은 할머니, 무당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말이다. “내가 고통 받아야 남의 고통이 덜어진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달무리’를 바라보는 손녀 역시 그 말을 중얼거리며 접신의 세계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통이 대물림되고 운명을 나누어 질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다른 대상을 거울삼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사유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한국인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이 아닐까. 가치 판단에 앞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추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부족한 거리, 초과한 거리’에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떨칠 수 없는 ‘나’라는 존재 말이다.

  최금진 시가 한국적이라면 얼마간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의 시에서 내가 더 좋아하는 부분은 빛나고 거침없는 그의 화법이다. 다음에 만나면 더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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