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김은주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2 본문

한국의 시인들

김은주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2

연안 燕安 2014. 9. 3. 00:16

 


김은주 시인
1980년 서울 출생.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술빵 냄새의 시간> -2009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 에 나오는 대사.

 

 

                     ㅡ김은주, <술빵 냄새의 시간> 전문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심사평]
심사위원 이시영(시인), 남진우(시인)

마지막까지 선자들의 눈길을 끈 이들은 '술빵 냄새의 시간' 등을 투고한 김은주와 '꽃 피는 일' 등을 보내온 류화, 두 사람이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과 돌파력이란 점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뤘다. 새벽녘 시장에서 돼지 잡는 장면을 다룬 '꽃피는 일'은 동물의 몸을 부위별로 분리하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처참한 장면을 복사꽃이 피어 가지를 타고 뻗어나가는 것과 중첩시킴으로써 기발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탐미적 시선이 공존하는 그의 시는 이미지의 조형 능력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질서를 투시하는 만만치 않은 인식의 깊이를 내장하고 있었다.

김은주의 작품은 심각한 현실에 정공법으로 대응하기보단 가볍게 우회해서 대응하는 여유와 다채로운 화법이 돋보였다. 비근한 현실에서 예기치 않은 놀라움을 끌어낼 줄 아는 이 응모자의 시는 친숙한 어조로 삶의 다양한 양태를 포착하고 있다.

류화의 작품은 집중력이 있는 대신 단조롭게 여겨지는데 비해, 김은주의 작품은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듯 대상에 따라 화법을 다채롭게 변주할 줄 아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축하와 더불어 정진을 당부한다. 이밖에 선자의 관심을 끈 응모자로는 '바람 부는 날의 모과'의 박은지, '흰 개와 바다'의 이현미, '구불구불거리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의 진유경 등이 있다.

 

 

[당선소감]
김 은 주 △1980년 서울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누군가는 만남에 대한 어휘가 가치 있다 했지만 나는, 미래의 이별들을 모으느라 하루를 보내곤 했다. 가령, 눈이 오면 눈의 일부처럼 만남을 맞고, 흩날리거나 녹아 없어지는 눈을 보며 이별이 아팠다. 그러한 내력으로 연연해하며 살았다.
연연의 목록이 추가될 때마다 구덩이를 팠다. 얕기도, 넓기도 한 연유들이 둥글게 고인 구덩이들. 그 속에 풀리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녹아 없어지지 않을 삶의 문제를 대신해 스르르 몸을 녹였다. 그 구덩이 안팎에서 만만한 한 生을 들여다보려 시를 썼다. 게으름과 무책임을 가책으로나마 아플 수 있는 시간. 이제 서른이니 뭐라도 하나는 구원해야하지 않을까, 골몰하는 밤이 앞으로도 길겠다.

習은 어린 새의 퍼덕임이라고, 날기 위한 연습에 멈춤이 있어선 안 된다 알려주신 장석남 선생님, 다른 시선은 틀린 게 아니라 특별하다 가르쳐주신 권혁웅 선생님께 인사 올린다. 통증의 마디인 어머니, 일평생 소슬함의 자루를 매고 가는 아버지,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근원 창수 창현 창미 세 형제들, 많은 것의 동기가 되는 민혁,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 이리, 내 모든 풍경의 흉곽인 달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아가는 연습을 하도록 어깨를 두드려주신 이시영, 남진우 선생님께 조금은 더디어도 주저앉지 않을 거란 다짐을 드린다.
 

<1>-미래는 고양이처럼/김은주- 구름이 한 번도 정면을 보여주지 않은 계절 사람들은 오로지 시력을 맞추기 위해 발을 헛디딘다 꼭 필요한 공기의 움직임만이 있는 방 서로를 탐하던 연인들이 거대한 탄수화물로 굳어간다 하루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하루는 어른을 연습하는 전능한 자들의 목소리에 화장이 입혀지는 밤 폭설을 참아내느라 지상의 주머니들은 소리 없이 분주하고 염화칼슘을 집어먹은 길고양이는 담장 밑에서 수분을 잃어간다 자고 일어나면 한 뼘씩 지붕이 자라있는 집에서 자신을 해체하지 않고도 존재증명에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하루는 반성하는 것만으로도 비밀이 생긴다 백설기가 된 기분으로 웅숭그리는 쓸쓸한 유령들 꾸준히 번지고 있는 안개의 출처를 모르고 쓰레기통 앞에 모여 저마다의 입술을 지운다 송곳니를 녹이며 서서히 벙어리로 진화하는 미래는 고양이처럼 <2>-토렴/김은주- 햇빛만 보면 재채기가 시작되는 사람을 알고 있다. 소매 속에 하루치의 빛을 넣어두고서 필요할 때만 조금씩 꺼내 밝아지는 사람을. 당신은 매일 같은 시간에 어두운 통로를 지난다. 먼지의 결을 이해하는 촉을 가지게 된지 오래, 당신은 허름한 스웨터의 올이 풀리듯 후드득 시간을 줄여가고 있는 중이다. 통로를 지나면 당신의 방이 있다. 당신의 방에는 사기로 만든 그릇이 놓여있고, 위는 넓고 아래는 좁다. 야트막한 굽이 있는 그릇을 들여다보는 것은 당신의 묵은 취미다 말린 생화의 떫은맛을 선호하는 당신. 다음 생엔 티백에 줄을 매다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릇 안에 천천히 물을 따를 때 소매 끝에서 보윰한 빛이 잠깐 일렁였다 사라진다. 물의 체온과 그릇의 온도가 적당히 비슷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일과. 적당하다는 말은 당신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물이 이동을 멈출 때까지 당신은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예견한다 당신은 기다림이 동사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3>-사칙연산의 날/김은주- 마저 우는 사람은 없고 곡물의 기분을 이해하게 된 처음의 날에 엄마는 남은 초를 위해 나를 결심했나 자꾸만 케이크에 구멍을 내고 나를 버리고 엄마와 처음 사귈 때 서른다섯 살이던 나는 엄마와 헤어지고 나와 자려고 보니 간신히 서른 살이네 두 개의 유방이 같아지도록 어깨를 흔들며 울고 춤을 추다가 우리는 만나게 될까 같은 좌표의 스테이지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콧수염들과 달력은 오 일에 한 번 작은 글씨가 되고 혼식을 권장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건강하지 종교를 바꾸고 처음 맞는 요일의 이름을 뭐라고 불러야하나 엄마가 숨겨놓은 초를 모두 찾으면 촛농처럼 알록달록한 기분으로 노래 불러야지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입가에 묻은 투데이 송은 끝날 줄 모르고 끝나 가는데 엄마는 왜 나에게 맡겨둔 생일을 찾아가지 않나 뒤집어라 엎어라 혼자만 다른 손바닥처럼 엎어져 등허리를 맞고도 도대체 속셈이 뭔지 모르고

 

 

 

 

★ 동명이인, 2명의 김은주 시인이 있다.

 

김은주 시인, 제18회 영랑문학상 ‘우수상’ 수상
 강원여성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김은주(49^사진) 시인이 '모란이 피기 까지는’ 김영랑(본명 김윤식) 시인의 시정신을 기리고자 제정한 제18회 영랑문학상 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돼 26일 서울 경복궁 앞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지난 2005년 시인으로 등단한 김 시인은 2007년에 첫 시집 ‘연못 속 하늘’ 출간 후 그동안 꾸준한 창작활동으로 인해 ‘한국농촌문학상’과 ‘한국글사랑문학상’도 이미 수상한 바 있다.

 시낭송가로도 활동하는 김 시인은 초등학교 방과 후 시낭송지도교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소꿉놀이 같은 세상이 있다면  

  
         
어렸을 적 친구와 함께 하던 소꿉놀이에서
엄마와 아빠는 이혼하지 않는다.
아이는 굶거나 학대받지 않는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데 실패하지 않는다.
소방관은 항상 성공적으로 불을 끄고,
죽었던 병사들은 그다음 전쟁에서
어김없이 다시 살아난다.
전쟁은 단지 놀이다.
아이들이 상상하는 세상 속에는
고통은 없다.
비리는 없다.
투기와 탁상공론은 없다.
아이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른들이 만드는 세상보다
완벽하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치를 맡겨야 될지도 모르겠다.

 

 

 

 아카시아 /김은주

작년 초파일 저녁
집 뒷산 조그만 절
연등 불 밝히러 갔었지
조용하고 고즈넉한 풍경
갑자기 세상의 티끌
자연 속에 묻히다
독경소리 바람 소리
흐드러진 꽃향기의 달콤함
잊지 못하지
다시 시작된 오월의 축제
온산의 꽃향기
바람 타고 거실 안까지 밀려드네
이 비 그치고 나면
다 떨어져 떨어져
바닥에 꽃눈 쌓이고
지나는 사람들 발자국에
풍경 하나씩 묻어가겠네
아쉬운 잔상만 남아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