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숨결

박강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3 본문

한국의 시인들

박강 시인 - 애지 작품상 후보 3

연안 燕安 2014. 9. 3. 00:14

박 강 시인

197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마쳤다. 2007년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2013년 등단 6년 만에 첫 시집 《박카스 만세》를 출간했다.

 

 

 

첫 시집 《박카스 만세》의 수록작은 다음과 같다.

 

 

펭귄
폭설
우루사를 먹는 밤
벨로시랩터 철학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이상한 염색
이불 속의 마적단
서툴고 길게 말하는 것은 블루스의 조건
너와 나의 국토대장정
아랫목의 순례자들
절차탁마 발기만성
박 대리는 어디에
크레딧
건기
카운트다운
개원
위생의 제국
쇄빙
풍툼 씨의 사진관
스콜성
부지깽이 소셜 클럽
바이킹
누아르에 대한 짤막한 질문
쨍하고 해 뜰 날
오도독 누룽지
봄날은 간다
렉터 박사의 처방전
고물 드럼을 꺼내다
박공지붕 복원건축공법
폐원
물음표에 대한 짤막한 질문
중유 지대의 말일
앵포르멜
절규 73.5×91cm
주치의 가셰의 처방전
몽마르트르
신신사운드 악기사
하드록 기타 단기속성
낭만이여 안녕
달의 노래
춤꾼 디오니소스
떼르미니 역
오디션
오디션 2
양궁소녀 발굴기
젖은 돌
헬리코박터 파이로리
고목
가벼운 이사
일식
紅記
洛山
이누이트 엽사
길일
박카스 만세
소년은 몰래 구두를 모으며 자란다
하얀 탑의 노래
로프공
베이루트 독서

 

수상 내역

  • 2007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 수상
  • 2009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arko 영아트프론티어] 선정

 

 

묵뫼

 

 

 

      박강

 

   

 

 

 

 

  오늘 우리가 잠든

                        세 개의 무덤

  철산의 바위들이 녹아내린

                                     이곳

                                         녹아서 흐르는

  지하수로 등을 씻은 날들이 지루하였다

                                                        발목부터 썩어 간

  붕대를 한 올씩 풀고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떼고 싶었다

  환한 밤과 삵들의 오솔길을

                                      걷고 싶었다 하지만

  사방으로 막힌 길

                        사방에서 좁혀 오는

  아카시아 숲의 뿌리와 청사들의 발코니

                                                       깨진 화병의 수국

  젖은 양말들의 발코니

                               빛에 녹아 흐물대는 유리창을

  오래전 통과하고 싶었다

                                   산 자들의 복도와 계단을 따라

  전단지를 모아 둔 소각장에 이르는

                                                 길 밑에

  젖은 흙과 잡초의 무덤

                                뿌리를 거꾸로 세운 고목이

  수십 년째 방치되어 있다

                                   가지 끝에 매달린 편지들

  그것은 한때

                 철모를 벗고 휴식을 취한 밤의 언어들

  가벼워진 무기와 펜들

                               어머니, 저도, 내일은

  적의 목을 따야 하나요 어머니, 이제

                                                   웅크린 전사에게

  총알 끝은 뾰족하지 않습니다

                                          참호의 모래알도

  당신 주먹처럼 잘 뭉쳐지지 않습니다

                                                     히야신스 꽃가루처럼

  선회하며 날아오는 폭격기가 있다

                                                 폭탄과 굉음들

  암갈색 가축들의 짧은 비명 그리고

                                                 정말 당신에게도!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면

                                   파편 맞은 얼굴로

  우리는 중얼댈 수 있다

                                바다의 물결이 벽보다 고요하다고

  소각되는 시체들보다 높지 않다고

                                                산 자들은

  전리품으로 소라 껍데기를 주웠을 테지

                                                        귀에 대고 들어 보라

  해변의 사그라지는 모닥불과

                                         향로의 연기 속에서

  우리는 잠들지 못하는

                               세 개의 무덤

 

 

 

 

이불 속의 마적단

- 성훈에게 

 

 

박강

 

 

 

 오오, 돌진하자꾸나, 우리에겐 방패도 투석도 없어, 국경을 무너뜨리라는데, 무한한 전리

품을 획득하라는데, 전사여, 달려보자꾸나, 상사의 심부름으로 무기처럼 커피를 들고

 

 제발 가르쳐 주세요, 적진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 정말 시장을 지배합니

까, 발 닳도록 커피 나르며, 책상 밑 유령 같은 손으로 토익 책을 훔쳐보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없습니까, 사막에 플랜트를 세우겠습니다, 제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뽑아만 주신다면

 

 사무실 곳곳에 왈칵 솓겠습니다, 저의 패기를, 열정을, 오오, 뜨거운 커피를, 상사의, 우

우, 바지가 젖었습니다, 이제 집에서 눈물 젖은 사전을 베고 잠들어야 하나요

 

 이불 뒤집어쓰고 사막을 펌프질 하는 꿈, 탁 탁 타 타 탁, 원자잿값 상승에 맞춰 내 몸

값 올릴 때까지, 이제 난 웅크린 자세로 화석이 되렵니다, 내 성기에서 석유가 뿜어져 나올

때까지, 타 타 탁 탁 탁

 

 

 

 

봄날은 간다 외 1편

 

박 강

 

  날씨 좋은 날에 우리는 날씨를 탓하는 욕망을 가졌습니다 빵 봉지 속에선 겨울잠을 자던 곰팡이가 깨어나고 변성하는 목소리로 꽃봉오리가 마른기침을 뱉던 날들 부화를 꿈꾼 새들에게 우리는 어쩌면 변덕스런 봄기운이 몰아닥칠 거라고 공복 시의 몇몇 생존법을 적어두었습니다 붉은 새들의 동공에 봄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릅니다 먼저 강바닥이 마르면 한결 벌레들을 잡아먹기가 쉬워지겠지요 그건 긍정의 힘입니다 라고 애꾸눈의 선생이 외쳤지만 우리는 우리의 남은 한쪽 눈을 찌를 수 있는 신화 속 왕을 추대하며 긴긴 겨울밤을 버텼습니다 여차하면 우리는 맹인이 될 수 있고 쩍쩍 갈라진 강바닥을 지팡이 없이 기고 건너며 날씨를 탓하는 욕망을 노래할지 모릅니다 손 하나를 잘라서 광장에 걸어두고 남은 손으로 짧아지는 밤마다 자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위독한 자들은 아침저녁으로 속옷을 갈아입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명함을 파종하듯 뿌려댑니다 잡초가 자랍니다 제초제를 실은 비행기가 시동을 겁니다 그걸 모르지 않지만 우리도 눈에는 눈의 심정으로 두 눈을 감고 나무뿌리가 자라나는 방향을 손금에 새길 수 있습니다 손에 못을 뚫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월이 가고 오월이 오면 실개천에 우리의 피를 먹고 자란 철쭉이 피어나겠지요 그렇게 봄날은 갑니다

 

블랙

 

  검정 양말을 신자 햇살은 들지 않았다 장맛비만이 조급증을 달래듯 침을 튀기며 태아보험 설계사 같은 수다를 이어가고 있었다 넘치는 물살을 견디며 위태롭게 서 있는 건 하천의 다리만이 아니지 하혈의 예감으로 위축된 나팔관만도 아니지 나팔꽃처럼 젖은 스타킹을 걸어둔 선풍기 앞에서 아내의 발목은 조금씩 얇아갔다 초음파처럼 천천히 좌우로 오가는 선풍기 바람을 껴안으며 이상해요 자꾸만 몸이 뜨거워요 아내의 뼈마디가 구멍 하나만 열어둔 피리 소리를 쌔액쌔액 내고 있었다 온몸의 구멍을 겹겹의 옷으로 막은 아내 이불 밖으로 몰래 내민 아내의 한쪽 발 그것을 막 입적한 붓다의 장례식에서 본 적이 있다 발가락 사이에서 들려오는 건 들어설 장소를 잃어버린 목초지의 바람 소리 같은 것 검은 새가 물어오는 부러진 나뭇가지 같은 것 아가야 너도 들은 적 있니? 초음파 사진의 희미한 점은 검은 색이라 한때 신기했단다 지금도 너는 여전히 검은 색이고 주변의 어둠과 분간되지 않는구나

 

 

시인의 말

 

  한 편의 시가 되려면 얼마나 지독한 기다림과 영혼의 집중과 감각의 활성과 새로워지려는 정신의 무장이 필요한 것일까. 시를 쓸수록 나는 하얀 백지에서 갈수록 가중되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요즘의 내가 그렇고 앞으로의 나도 여전할 것 같다는 느낌. 시는 내 안의 모든 것을 지워낸 여백의 빈자리에 홀연 들어서는 것일까. 아니면 가득 채워둔 감정, 사유, 상상 또는 그 어떤 것들을 반죽처럼 게워내는 것일까.

  시는 어쩌면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순진하지만 변덕스럽고, 단순하게 생겼지만 그 속을 모를 경우가 태반이며, 한동안 떨어져 놔두면 불안하고, 매순간 곁에 두면 날 지치게 한다. 어쨌든 나보다는 오래 살 것이고, 다음 문장과 마지막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불허라 미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아이에게 몇몇 커다란 원칙만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남의 것을 훔치지 마라, 말의 중복을 피하라, 관습적인 직유를 삼가라 등 따위. 사실 아이에게 주는 이 같은 지침은 몇 되지 않는다. 커다란 범위에서 말뚝 몇 개만 듬성듬성 둘러쳐 놓으면 아이는 그 안에서 자기만의 꿈을 가지고 제멋대로 커간다. 쑥쑥 빨리 자라주는 아이도 있고, 좀 더디고 답답하지만 믿고 기다려줘야 하는 아이도 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가지를 쳐주는 것뿐이다. 너무 계획하고 통제하면 반듯하지만 매력 없는 아이로 자라고, 지나치게 자유를 주면 종국에는 내가 쓴 시인지 아닌지 모르는 괴물이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아이도 백 프로 부모 뜻대로 길을 가주는 아이란 없다. 한 편의 시를 쓰며 나는 얘야, 커서 꼭 음악가가 되라고 말해주지만, 서너 문장쯤 가면 벌써 아이는 요리사가 될 꿈으로 다른 길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렇다고 실망할 수 없듯 시 한 편은 나의 손을 거쳐서 크지만, 나의 기대를 떠난 곳에서 저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실현한다. 나는 이 아이가 이왕이면 멋진 요리사가 되도록 돕고 다듬어주고 길을 내주려 애쓸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한 명의 훌륭한 요리사처럼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과정과 결말을 지켜보는 일. 그 자체가 경이이고 기쁨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이 시를 통해서 또 한 번의 시적 체험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