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녀 시인
1978년 경기도 양평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7년《세계의문학 》신인상 수상
시집 『시소의 감정』.
<1>-큰 파란 바람의 저녁/김지녀-
바람은 쉽게 땅에 발을 내려놓지 못하고 달아난다
강을 지나 일 년 내내 눈 쌓인 계곡을 지나
그러나 간단하게 뭉쳐지는 구름들 사이로
무섭게 직진하고 있는 태양의 기둥을 지나
벽을 뚫고
천년 전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의 눈동자를 핥으며
지구를 만년쯤 돌고 있는 바람이 이마에 와 닿을 때
국경을 넘어온 얼굴처럼 얼어있는 저녁을 바라볼 때
나는 기둥, 이라는 제목의 나무
활엽으로 침엽으로 옮아가는 숲의 그늘
절벽 위에 서 있으면 어느 고원을 떠돌다 사라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맴돈다
입술 튼 바람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전진하거나 융기하는
대륙의 저 끝에서 잠시 날개를 접고
녹아 내리는 얼음을 밟으며 며칠 밤낮을 걸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눈이나 비가 오는 숲에서
알을 품은 적 있는 둥지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나무 잎사귀가 다 떨어진 저녁
바닥에 누워 영원히 눈감는 자의 호흡은
처음 비행에 나서는 새의 눈빛처럼 새까만 것이어서
수없이 흔들리며 가라앉아 간다
입 벌린 채 마른 강을 건너가듯이
나는 갈증을 느끼며 파랗게 변해 가는 피부 속에
활공하는 바람의 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람이 데리고 온 먼 곳의 먼지들은 낮게 휘돌다 단단해진다
- 제1회 세계의문학 당선작
<2>-크래커/김지녀-
수백 개의 다이너마이트를 준비하고
폭파전문가들은 콘크리트 벽에 뚫릴 구멍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폭파 직전의 건물을 보고 있다
날씨는 쾌청하고
기온도 적당하다
크래커는 바삭바삭 잘도 부서진다
건물은 아직 그 모습 그대로 담담하게 서 있다
이미 깊고 큰 구멍의 뼈를 가지고
천천히 무너졌을 시간이 늙은 코끼리처럼
도시 한복판에 머물러 있다
까맣고 흰 얼굴들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여러 번 크고 작은 눈빛이 오고 간다
벌컥벌컥 물 한 컵을 마시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어버린
벽과 창문과 바닥이
하늘 높이 솟았다 가볍게 흩어진다
방바닥에는 크래커 부스러기들이 잔뜩
떨어져 있다
저 먼지구름은 이제 곧 이곳을 통과할 것이고
<3>-지퍼의 구조/김지녀-
뜨거운 계단들이 열리고 있다
나의 목까지 밀고 들어오는 진흙처럼
계단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나를 잡아당겨 놓았다
나는 한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생각하는 자세로 오해받기 적당하다
그러나 지금 나에겐 어떠한 생각도 자세도 없다
움직일수록 계단들은 더 깊게 열린다
이것은 극단에 가깝지만
위에서 아래로
나를 힘껏 잡아당긴 것은 Y의 말대로, 나이다
그러고 보니 계단을 만들어놓은 것 또한 나이다
이쪽과 저쪽이 잘 맞물려 서 있는 자세에 대하여
틀어진 이를 가지런히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힘껏 당겨도 닫히지 않는 계단 앞에서
나는 기울어져 조용히 멈춰 있다
<4>-오랫동안/김지녀-
햇살을 쏟아내는 태양 나무는 초록의 긴장을 풀어놓아 저 그늘
은 내 얼굴을 물들이지 나를 보고도 울지 않는 소의 커다란 눈 이
건 이미 누군가 써놓은 권태의 기록
하마가 하품을 하는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저녁을 데리고 와 돌
아눕는 지구의 뒷모습 이 순간 육중한 몸을 움직여 천천히 물속으
로 사라지는 하마의 걸음걸이는 아름다운 형식
자그마한 여자가 제 키보다 긴 머리카락을 빗을 때 검은 폭포수
처럼 떨어지는 머리카락, 여자의 손끝에서 돌돌 말려 버려지는 시
간의 길이와 색(色)
나는 벽 앞에서 공을 받아치며 공을 따라 달려가네 가깝거나 멀
게 펄럭이는 마음 사이로, 벌써 열흘째 비는 창문에서 흘러내리고
<5>-잃어버린 천장/김지녀-
너는 나를 습득했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여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곤
그리워했다, 그때마다 나는 흑판처럼 어두워졌다
입을 틀어막고 공손해졌다
너는 오늘 천장, 이라고 적는다
천장을 보세요 굳은살을 만지는 것처럼 딱딱한 바닥이 펼쳐져 있어요
거기에 손을 대보면 아주 고요한 안개의 깊이가 느껴져요 쓰다듬을 땐,
손바닥에 어떤 그늘이 축축하게 묻어나는데 그 그늘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죽은 이름들을 만나 인사를 했어요
천장을 걷는 사람들에게 몽실몽실 피어난 곰팡이가 나에게로 날아와 번지고 철자 하나 잘못 쓰인 글자차럼
나는 쓱쓱 지워지고 받침 없이 끝이 없이 펼쳐지고
그러나 천장은 말더듬이의 발음처럼 시작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다
리듬이 끊긴 계절과 어떤 의지도 없는 새벽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밤
나는 자음 하나를 잃고
모음과 그림자를 잃고
갑남을녀 사이에서 갑이어도 을이어도 슬프지 않았다
비과거 시제時制를 잊어버리고부터
나는 너의 얼룩진 지하실의 벽이고
어둠에 발을 담그고 굳어버린 바닥이었다
작은 전구 하나 달지 못하고
나의 천장은 유실되었다
글씨는 단정하지만
올려다볼 천장이 없다는 것
<6>-지구의 속도/김지녀-
천공(天空)이 아치처럼 휘어지고 있다
빽빽한 어둠 속에서
땅과 바람과 물과 불의 별자리가 조금씩 움직이면
새들의 기낭(氣囊)은 깊어진다
거대한 중력을 끌며 날아가 시간의 날카로운 부리를 땅에 박고 영원히 날개를 접는 저 새들처럼,
우리가 더 이상 날아갈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생각할 때
교신이 끊긴 위성처럼 궤도를 이탈할 때
우리는 지구의 밤을 횡단해
잠시 머물게 된 이불 속에서 기침을 하고
다정한 눈빛을 보내지만, 묵음의 이야기만이 눈동자를 맴돌다 흘러나온다
문득 창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의 어깻죽지에 머리를 묻고 잠들고 싶어도
근육과 뼈가 약해진 우주인과 같이
둥둥떠다니며 우리는 두통을 앓고
밥을 먹고 함께 보았던 노을과 희미하게 사라지는 두 손을 가방에 구겨 넣고는 곧 이 밤의 터널을 지날 것이다
어딘가로 날아갈 수 밖에 없는 새들의 영혼처럼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지구의 속도처럼
조용히 멀미를 앓으며
저마다의 속도로 식어가는 별빛이 될 것이다
너는 어쩌면 내게 바닥, 이라고 쓰고 있었던 것이다
<7>-발설/김지녀-
조개처럼 두 개의 껍데기가 있다면
스스로 나의 관 뚜껑을 닫을 수 있겠지
닫히는 순간 열리는 어둠 속에서
나는 가장 사적이고 사색적인 공기를 들이마시고
모래나 바다 속으로 숨어버릴 거야
입술이 딱딱해질 거야
오늘은 무얼 먹을까?
어떤 옷을 입지? 이런 걱정들로 분주한
나의 인생을 어리고 부드러운 속살로 애무해줘야지
내 몸 어딘가에 있는 폐각근(閉殼筋)을 당겨
살아 있는 동안
죽어 있는 것처럼
한번 닫히면 절대 열리지 않을 테다
이런 생각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다섯 개나 열두 개의 주름을 만들어
감추고 싶은 말들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을 테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거야
하나의 사원처럼
돌멩이처럼
조개는 고요하고 엄숙하다
죽고 난 뒤에 입을 벌린 조개껍데기 속 무늬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8>-루나틱 구름에 휩싸인 얼굴/김지녀-
창문 없는 방에 누워 있으면 어느 순간 이마에 고인 미열이 참 따뜻하다
무릎 나온 바지를 입고 잠든 엄마 뱃속
여기는 얇은 주름이 잡힌 호수의 밑바닥
손톱으로 긁어 보면
이곳에 살다 간 사람들 살냄새가 바스스 일어나 말을 건네고
기침이 많은 밤을 나는 소름 돋는 눈빛으로 느낀다
낯선 구름을 데리고 온 계절 앞에서
내 얼굴은 곰팡이 슬어 가는 벽이 되었다가 깊은 우물이 되었다가 하얗고 동그란 달*이 되었다가
다시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끌어 담지 못하는 그물
나는 한 달에 한 번 사라지는 그늘
어제는 이곳에 나를 뚝 떼어 놓은 배꼽이 간지러워 바닥을 뒹굴거리다
목이 말랐고
목매달고 싶었다
그러나 식물처럼 가만히
내 안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때
몇 겹으로 덧바른 꽃무늬 벽지에선 시간의 뒷모습 냄새가 났다
가끔 얼굴을 씻고 저녁을 만나도
저기 저 북극에서 보내온 편지에는 차갑고 무거운 글자들이 떠다닐 것만 같고 그 편지의 두 번째 혹은 네 번째 줄에는
누군가 흘리고 간 웃음이 얼어 있을지 모른다, 는 생각
오늘은 내 뒷모습이 보고 싶다, 라고 쓴다
식어 가는 이마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병에
지구의 기울기를 느끼는 이 순간에
푸른 나뭇가지 끝에 걸려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 나는 한 달에 한 번 추억되는 구름
<9>-알약들이 녹는다는 것/김지녀-
창문들이 내 주위를 빙빙 돌며
휘파람을 분다
신사 숙녀 여러분, 밤이 돌아왔습니다
복도를 지나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 밤의 병명은 무엇입니까
잠깐 자고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길게 하품을 하는 나의 입속은 한겨울 비닐하우스처럼 후덥지근해
쫄쫄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물에선 약냄새가 진동하는데
낡은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는 밤이여, 오늘은
수용소 문학을 이해할 것 같은 날이기에
소각장의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을 위로할 겨를이 없네
꿈을 꾸고 겁을 먹고 토사처럼 몸이 무너져 내려도
나는 영생을 믿지 않고
윤회 또한 내 차례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이웃들의 침대 위에서
믿음은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
누가 저 사람 입 좀 다물게 할 수 없어?
가래침처럼, 믿음은 왜 저렇게 끈적한 건지
내 쓰레기통에는 믿음이란 낱말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붉은 십자가의 전원을 내리고, 나의 머리맡에 자비를
그러나 나의 기도는 두 손 사이로 미끄러지는 비누처럼
거품이 잘 나지 않는다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누운 밤이여, 창문들이여
잠들었는가, 물끄러미라는 부사가 나를 수식해도
나는 나를 증명해 줄 만한 소속이 없네
창밖을 바라봐도 자꾸 내가 흐릿하게 나타나는 건
내 안의 암흑이 깊은 탓일까
새벽이 올 때쯤
이웃들은 하나 둘씩 일어나 기도를 시작하고
나는 색색의 크고 작은 알약들을 입에 또 털어 넣는다
연기가 흘러가는 쪽으로
비밀이 더 많아졌다
<10>-불의 맛/김지녀-
불을 먹는 마술사에게 불은 어떤 맛일까
뜨거운 밥 한 덩이를 삼키고
끝인 줄 알았더니 다시 끝이다
끝을 이어붙이며 밀고가는 아침이다
여름의 수레바퀴에 감겨버린 빗속으로
귀머거리의 텅 빈 귓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두 발엔 발자국이 없구나
창문이 없구나, 박수 치며 기립하는 나에겐
설탕과 버터와 파도가 부족하다
분노와 웃음과 태양이 부족해 부족하고 부족해서
뜨거운 밥 한 덩이를 삼키고
마술사의 입속처럼, 나는 잠시 따뜻하다
그러나 나의 끝을 뾰족하게 장식하는
발톱은 단단하게 자라고
나는 붉고 따뜻한 피의 맛에 대해 생각한다
길고 긴 식도 속으로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나의 목구멍에 누가 꽃을 꽂고 있는가
<11>-질주의 날들/김지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창문들이 담고 있는 것, 전속력으로 달리는 심장의 운율 같은 것
울퉁불퉁한 나의 창문에
나뭇잎들이 생겼다 적의가 생겼다
너라는 단어 앞에서 자꾸만 벨을 누르고
그러나 나는 아무도 내리지 않는 정거장이다, 문이 열릴 때마다
내 입술과 그림자는 흙먼지 속에서 잠시 사라지고
왜 이렇게 나에게 창문이 많은가
봄은 갔고, 바다처럼 색이 변하면서 너는 등을 돌렸다
어제와 오늘은 경적을 울리면서
내 옆을 지나가고, 창밖에는
지금 눈이 내린다 펑펑, 모든 것에게
눈이 내린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지울 수는 없다
나뭇잎 진 자리에서 나뭇잎이 돋아나듯
캄캄한 나의 창문에 너와 함께 보낸 밤의 별들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빛난다
너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나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어떤 질주는 무수하게 멀어지지만 결국 제자리라는 것
<12>-더 딱딱한 희망/김지녀-
땅속에 감자를 심고 꾹꾹 밟는다
밟히면 밟힐수록 싹이 올라오고
하얀 꽃이 피고
다정하게 못 박혀 빠져나올 수가 없다
각자의 구멍 속에서 썩어가거나
독이 오르거나
땅속에서는 너무 많은 감자들이 자라고 있다
무엇이든 꼭 쥐고 놓지 않는 감자
손가락이 잘린 감자 파업 중인 감자
떠도는 감자 침묵하는 감자 감자들은 똘똘 뭉쳐
형제애로 가득 차오르고 있다
더 크고 딱딱하게 부풀어 오른다
이것을 각오라고 부르자
감자의 각오는 남다르다
땅속에서 따뜻하고 온순한 주먹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빠져나올 수가 없다 땅 속의 평화와 안전은
보장받을 수 없다
거대한 손아귀가 줄기를 잡아당기는 순간
크고 작은 주먹들이 열없이 쏟아져 나온다
올해도 흉작이다
<12>-장미와 주먹/김지녀-
오늘 밤은 길어서 구부리기에 좋다
끝을 잡아 돌리니까 밤은 잘도 돌아 서른 번째 밤은
주먹이 되고 우리를 향해 멈춰 있다
좀 투박하고
비어 있지만 마음에 든다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고
체온을 조금 나누어주었을 때
장미가 피었다 서른한 번째 밤이 되기 전에
장미, 장미, 장미가 피어서 장미의 밤으로
서른한 번째 밤은 아름답고
시들어서 고요해
구부러진 밤,
그 속에 웅크려 도취된 밤,
주먹은 조금 더 커져 있다 오늘 밤은 길어서
촛농이 흐르고
목이 마르고
편지를 써야지 죽어가는 것들을 잘 기억하도록
병에 걸린 나무에 기대어
나무의 마지막 숨소리를 들어주어야지
오늘 밤, 장미는 다시 필 거야
무거움을 버리고
차가운 주먹을 펼 거야 우리를 향해, 다시
첫 번째의 밤이 길어지고 있다
<13>-백지의 날들/김지녀-
그 어떤 페이지도 첫 페이지가 될 수 없고
어떤 페이지도 마지막 페이지가 될 수 없습니다
-보르헤스, 「모래의 책」부분
내 앞에 놓인 백지가 넓어지고
잘못 조판된 글자처럼, 나는 이곳에 왔다 그건 그날
일어난 사건들 중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우연한 일
이것은 소멸에 대한 이야기
나는 입구였다 줄지어 내게로 달려 들어온 것들이
뒤엉킨 자리에서, 진지하게 거짓말할 줄 알았다
너도나도 슬퍼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땀을 흘리지 않았다
손이 차가워졌다
낯선 그림자와 악수하며 나는 네 번째 온 사람, 봉투처럼 밀봉되어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다 여섯 번째의 노인이거나
아흔 두 번째의 양일 거라고 누군가 말해주었다
다시 나를 반죽해 펼쳐놓았다
모든 계절이 추웠다
바람을 사전에서 지우고 호주머니가 깊어졌네
나를 향해 백지가 더 넓어지고, 비틀거리면서
나는 왔네, 물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네
좁고 어두운 이마는 나의 몇 번째 밤인지
언제까지나 나는 입구였네
안개 속에서
짐승의 소리를 듣고 술렁거리는
숲 속에서, 나의 그림자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불 속에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검은 재가 되었고
백지 위에서
나는 뛰어내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아프기 시작했다
<14>-코끝의 감정/김지녀-
가만히 보면 잘 익은 빵처럼 부풀고 따뜻한데
바람이 불어나온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철학도 종교도 없이 흔들리지 않고
실패한 혁명처럼 떠올라
캄캄한 터널이야
비도 눈도 없는 기후인 거야
폐가였다
거짓말이었다
거기에, 뿌리 없이
솟아올라
추방당한 것처럼
기도하는 손처럼
솟구쳐 올라,
가만히 보면 활화산처럼 뜨거운 불기둥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데
눈물이 흘러나온다
웃음이 터져나온다
<15>-여진/김지녀-
수백 개의 뼈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로부터 가장 멀리까지 흘러갔던 바퀴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오나
끊어진 철로처럼 누워
나는 불안한 진동을 감지하는 바닥인가
이 순간 나는 유신론자 아니 유물론자 아니 아무 것도 아니
다만 닥닥 부딪치는 이빨을 소유한 자
그러나 나의 떨림에도 근원은 있다
차가운 내 살 속에도 자갈과 모래처럼, 또 나뭇잎처럼 켜켜이 쌓인 사람들이 있다
지붕 없이 이빨도 없이 새들은 벌써 이곳을 떠나고
뒤틀려 열리지 않는 문짝 속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는 휘어져버린 시간
당신의 밤은 무사한가
오늘은 기차처럼 몸을 떨고
목소리는 나의 것이 아니고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모든 사물이 제자리로 가기 위해 흔들린다, 는 생각
숨쉴 때마다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바닥
나무뿌리 같은 혈관들이 살갗으로 불거져 나오고 있다
나를 떠난 것과 나에게 떠밀려 온 것
사이에서, 나는 뜨거워진다
온몸에서 문이 열리고 있다
<16>-선/김지녀-
주차장에는 많은 선들이 그려져 있다
턱도 없고
늪도 아닌, 선은 글자가 아니고
울타리가 아닌데
그것을 아무도 넘지 않는다
선은 곧고, 기도하지 않아도
길다, 선에는 인생이 빠져 있지만
선을 따라 걸으면 난간 위를 걷는 기분이야
선 위에서 우리는 떨고 대결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되어 줄다리기를 한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아서
선은 공평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선이 자란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돌이킬 수 없게 우리에게
선이 생겼어
적당한 거리로 우리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 있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아이들이 선과 선 사이를 뛰어다닌다
건반들처럼 선들이 차가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17>-나의 잠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온다/김지녀-
북쪽은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감염된 계절이에요 팔과 다리를 오므리고
한 덩어리의 어둠으로 녹아가는 중입니다 크고 검은
고래의 뼈를 생각합니다 아늑한 동굴입니다
나는 얼마나 남았을까요?
벤젠처럼 독특한 냄새가 없어요
창문을 열어 놓고 자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을 지우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아래로
더 아래로, 추락하는 꿈을 데리고
차가운 바람이 분다, 나를 모르는 사람의 눈동자에서
북쪽을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여기는 빗속에서도 젖지 않고 메말라가는 곳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뻗어가야 하는 동굴일까요?
충혈된다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것
나의 서랍 속에서
북쪽의 밤이 길어지고 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태어나고 있다
나는 조금 도 어두워졌다
*릴케,『말테의 수기』에서.
<18>-나쁜 일/김지녀-
불을 끄고 있으니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꿈에서 나쁜 일이 잘 보인다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 묻는다
어젯밤 꿈에 내가 나왔다고
내 꿈에도 없는 내가 친구 꿈속에 갇혀 있는 꼴이라니
우습다, 불을 끄고 있으니
엄마가 울기 시작한다
꿈에서 엄마 모가지를 잡고 뒤흔드는 사람은
더 떨어질 것도 없는데 손을 바꿔 가며 엄마를 뒤흔든다
나무 기둥처럼 누워서 엄마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누가 알겠어 내가 엄마 모가지를 꽉 잡고 놓지 않는 건지
보고 있으니
엄마 얼굴이 객관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꿈속을 걸어다니면서
늙지 않고 산다는 게
힘이 세진다는 게, 나를 증명한다
새파란 하늘에서 눈과 비가 쏟아진다 불을 끄고 있으니
나는 젖어 가는 꿈속이다
나쁜 일처럼 당신들에게 번지기 시작한다
<19>-부화/김지녀-
나무들이 사나워진다, 이 문장을 쓰고 부르르 입술을 떤다
한 번도 잡아주지 않은 손을 향해,
달이 떴다
노른자위처럼 오롯하고 싶었다
빛이 조금 흘러들어오는 쪽창으로
반쪽만 얼룩져 있고
반쪽만 다정해져
흰자위같이 미끄러운 것을 흘리고 싶었다
깨지지 않는 껍데기에 둘러싸인 밤에 그랬다
그러나 공난포처럼 속없이 부풀어 내게 무엇이 있겠는가
없지만, 어지러운 맹세를
맹세할 뿐, 그런 날엔 입을 크게 벌리고 달빛을 모았다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짙어지는 것처럼
몸이 사나워졌지만
늙은 얼굴보다 더 두꺼워진 손을 잡고
담을 따라 이끼가 번진다
짖지 마라 알아듣지 못하는 발음으로
푸른 입술로 젖지 마라
밤을 뚫고 나온 나무들이 더 높아진 계절이다
한 번도 잡아주지 않은 손을 향해
달이 커지고 있다